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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62: 시/시늉

2022.05.11 03:14

관리자 조회 수:29

4462

 

뿌려만 놓으면 절로 자랄 줄 알았습니다  

 

하늘이 비를 내려주고 

땅이 기운을 내줄 줄 알았습니다 

 

비는 내리지 않았고 

땅은 퍼석 말라 흙먼지가 풀썩풀썩 피어올랐습니다 

 

뿌린 적 없는 풀씨들이 아우성이었습니다  

일주일에 단 한 번 돌아 본 밭에는 무성의만 무성했습니다

 

자유방임주의자연 알아서들 잘 자라라고만 격려해줬는데

전제군주처럼 솎아내지 않으면 갈아엎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씨 뿌리고 가지 치고 고루 김매고 북주어

지기(地氣)를 북돋우는 날마다 차오르는 곳간이랍니다

 

밭농사에만 초보가 아니라 

사람 농사에서도 흉내만 낸 격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날마다의 보살핌 없어 영글어 가는 영혼의 알곡이 없음도  

거울 보듯 알게 되었습니다

 

뿌려만 놓으면 절로 자랄 줄 알았습니다 

낳아만 놓으면 홀로 자랄 줄 알았습니다 

방목을 해도 알아서 자랄 줄 알았습니다 

 

무려 일백육십팔 시간 만에 

쇠스랑을 높이 쳐들고 호미로 마른 흙을 탈탈 털어내며

뒤늦게 속죄하듯 수압을 한껏 높여 메마른 목을 축여주며

 

돌이킬 길이 없는 종점에서

농부는커녕 아비로서 목자로서도 

시늉만 내다가 가는  

푸석푸석 마른 인생임을 알았습니다

 

2022.05.08(주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