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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64: 구사일생-그 나미 감각으로

2022.05.11 03:15

관리자 조회 수:29

4464

 

구사일생—그 나미 감각으로

 

우리 집에서 5분 거리에 어르신스포츠센터가 들어있는 5층 어울림센터가 있다. 1층은 값싸고 질 좋은 주민 사랑방, 2층과 3층은 어린이 도서관, 4층에는 65세 이상 어르신을 위한 탁구장과 당구장 그리고 휴게실이 있다. 일찍 완공했으나, 엔데믹 이후로 문을 열었다. 오전 9시30분부터 오후6시까지 문을 연다. 틈나는대로 2층 도서관에서 책을 보다가, 4층으로 올라가서 탁구도 치고, 당구도 친다. 탁구대가 4대고, 당구대가 6대다. 그중 3대는 포켓볼대다. 

 

당구는 목포교대 다니던 시절, 잠깐 손을 댄 적이 있다. 당구 실력이랄 것도 없지만, 나는 당구 기술 중 유독 나미를 잘쳤다. 나미란, 일본말로 당구에서 얇게 치기를 의미한다. 앞에 선 공 옆구리를 스치듯 말 듯 얇게 건드린 후 뒷공을 맞추는 예리한 기술. 이름하여 벗기기. 초보자 분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샷이란다. 너무 얇게 치려다가 빗나가기도 하는데, 나미는 영어로 페더샷이라고도 한단다. 근데 나는 나미를 일천한 실력에 비해 상대적으로 잘 쳤다.  

 

지금부터 십수 년 전, 나는 나미 감각으로 죽을 뻔했던 교통사고를 극적으로 모면했던 적이 있었다. 그날 나는 편도 3차선인 서해안 고속도로 하행선을 타고 시속 100km 이상의 속도로 질주하고 있었다. 근데 그 고속으로 질주하던 내 앞에 달려가던 승용차가 1, 2차선을 갈지자로 오가며 추월을 못하게 하더니, 그만 좌우 1, 3차선 어디로도 피할 수 없게 근접한 상황에서 갑자기 차를 2차선 내 코 앞에 콱 세워 버렸다.  

 

시속 100km나 되는 고속 주행을 하던 나는 브레이크도 밟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어 여지 없이 앞차를 그냥 들이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이제 죽었다는 생각이 듦과 동시에, 놀랍게도 과장해서 0.0001초도 안되었다 여겨진 찰나적 순간에 수십 년 전, 20대 초반 아주 짧은 기간에 부렸던 당구 기술 나미 감각이 운전대를 쥐고 있던 손끝에서 불현듯 살아남을 느꼈다. 전혀 감지할 수 없었던 운동 감각이 확 임했다.  

 

동시에 3차선에는 흰색 승용차가 쾌속 질주해 들어오고 있었다. 허나 내겐 2차선과 3차선 사이에 그어 놓은 흰색 실선 사이로 치고나가면 살아날 수 있겠다는, 치고나갈 수 있겠다는 큰 확신이 임했다. 나는 기이하고, 신통하게 불같이 되살아난 나미 감각을 발휘해 좌고우면할 틈도 없이, 한치의 두려움도 없이 핸들을 오른쪽으로 확 꺾었다가 바로 돌린 후, 눈을 찔끔 감고 2, 3차선 사이 그어 놓은 흰색 실선을 중심삼곤 엑셀을 확 밟았다. 내가 2차선에서 갑자기 3차선 쪽으로 핸들을 확 꺾자, 3차선으로 쾌속 질주해 들어오던 흰색 승용차가 놀라 갓길 쪽으로 확 밀려갔다가 욕할 시간도 없이, 다시 3차선으로 들어서더니 달리던 속도를 못이겨 앞으로 내달렸다.  

 

우와 죽었던, 까맣게 잊혔던 나미 감각으로 나는 2, 3차선에 놓인 차들 사이를 100km의 속도로 기적 같이 빠져 나갔던 거다. 그 찰나에 이런 생각도 떠올랐었다. 김구 선생의 아들 김신 장군이 비행기를 타고 한강 철교 교각 사이를 빠져나갔다는 전설도 말이다.  

 

살려고, 살려 주실려고 까맣게 잊혔던 나미/운동 감각에, 김신 장군의 신공까지 떠올려 주셨던 거다. 지금도 그 순간 임했던 불같았던 큰 확신이 위기상황 속에 든 주눅보다 더 화끈하게 날 달아올린다.   

 

그 나미의 곡예를 성공리에 마친 후, 나는 2차선에 서있는 승용차를 향해 코를 씩씩 불면서 걸어갔다. 근데, 승용차 운전석 차창이 스르르 내려가면서 드러 난 이들은 머리가 허연 노신사 부부였다. 순간 화가 확 가라앉았다. 연유인즉슨 고속도로 첫 주행이었고, 빠져나가야 했던 램프웨이를 놓치는 바람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서 우물쭈물하다가 고속도로 2차선상에 차를 세워버렸다고 했다. 기가 막혔으나, 하행선을 타고 내려가던 내내, 그분들이 어떻게 그곳을 빠져나갔을까라는 염려만 앞섰던 기억이 새롭다.

 

다시, 큐대를 틈틈이 쥐어보고 있다.

 

우리 동네 참 좋은 동네다.

 

2022.05.09(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