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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마저 이기주의에 빠졌는가?

2008.06.06 11:04

김성찬 조회 수:1246 추천:122

교회마저 이기주의에 빠졌는가?



곡해된 프리즘(prism)의 축복


오늘 우리 교회의 이기주의적 모습을 가장 극명하게 나타내 보여 주는 성서적 실례는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마 21:18~19)입니다. 시장하신 예수께서 잎사귀밖에 아무것도 얻지 못하시자 저주하여 곧 마른 나무, 온갖 은총과 축복을 베풀었어도 열매 없는 영적 이스라엘, 교회의 모습을 우리는 이 말씀에서 보게 됩니다. 이러한 교회의 무서운 집단적 이기주의(collective egoism)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축복을 곡해한 신앙의 유산이라 생각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축복은 프리즘(pr-ism)의 축복이었습니다. ‘너로 인하여(through)’ 만인에게 찬란히 펼쳐지는 무지갯빛 나눔의 축복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축복을 오목렌즈의 축복으로만 받아들인 것입니다. ‘너를 위하여(for)’ - 이것이 축복의 사유화를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했고, 그 결과 교회는 나눔의 열매 없는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로 변하고 만 것입니다.


누룩 - 그 이기심의 맹아(萌芽)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선민(選民) 이스라엘이, 그리고 공교회(公敎會)가 축복의 프리즘 사상을 망각할 때마다 부패했고 곧 이어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가 태풍처럼 휘몰아쳐 그들에게 임했던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구약의 역사는 땅(에레츠)의 역사에서 시작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성취가 땅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땅이 없는 백성은 민족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약속의 땅, 축복의 땅은 그 누구의 소유도 아니었고, 오직 하나님께 속한 것이었습니다. (레 25:23~24) 그러므로 인간은 그 누구도 이 하나님의 것을 사유화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축복의 사유화를 결코 허락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가 기름 부은 왕일지라도 - 사울이 이 일로 심판 당했고 솔로몬의 영화가 아침 안개와 같이 사라져버렸음도 이에 연유합니다.


예수께서는 바로 이런 이기심의 맹아 - 누룩들과 피나는 싸움을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바리새인의 누룩과 사두개인의 누룩(마 16:11), 헤롯의 누룩(막 8:15)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셨으며 친히 몸으로 이들의 악한 생각과 세력에 맞서 싸우셨던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바리새인의 누룩, 사두개인의 누룩, 헤롯의 누룩은 프리즘의 축복을 망각한 선민 이스라엘의 집단적 이기주의의 산물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누룩, 그 이기심의 맹아는 초대교회 이후 4세기 초에 콘스탄티누스가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면서(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공인되면서) 다시 발아와 성장을 거듭해 신약의 교회의 의미를 퇴색시켜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부패와 타락-하나님의 심판-회개와 용서’의 변증법적 부침(浮沈)이 기독교의 역사라고 할 때, 오늘 우리 학국 교회 또한 축복의 그늘에서 독버섯처럼 퍼져가는 누룩의 이기주의를 결코 간과해는 안 될 것입니다. 혹자들은 이 땅에 또 한번의 종교개혁이 요청된다고 힘주어 말하고 있습니다. 더욱 더 솔직하고 심화된 자기반성을 하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마땅히 그래야만 합니다.


그러나 개혁은 끊임없는 자기반성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에 기초하여 오늘의 교회 이기주의의 유형과 현황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 유형은 바리새인의 누룩, 사두개인의 누룩, 헤롯의 누룩으로 교권적이고 귀족적이고 물량적인, 이름하여 이익집단(?)인 교회의 형태를 가리킵니다.

 

교회의 이기주의, 그 유형과 현황


첫째, ‘바리새인의 누룩’이라는 말에 함축된 교권주의, 분파주의, 종교적 이기심이 교회의 이기주의의 한 유형입니다.


교회가 이기적일 수는 없습니다. 문제는 교회를 구성하는 인간들의 집단화입니다. 한국 교회가 이기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은 지나친 분파주의자들에게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교회의 서로 다른 분파들은 종교개혁의 산물이었습니다. 로마와의 결별을 선언하고 참된 신약교회를 수립하려고 노력한 성도들이 교회의 교리에 대한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나온 어쩔 수 없는 산물이었습니다.


종교적 자유라는 관점에서 볼 때 그것은 훌륭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몸의 단일성’(엡 4:3)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그것은 좋지 않았습니다. 다양한 분파들 사이의 경합과 증오는 ‘한 몸’에 관한 신약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각 집단은 자신들의 신념에 관하여는 전적으로 교의적이었습니다. 이것이 교파주의의 발생입니다.


종교적 자유의 새로운 땅은 아메리카였습니다. 그 땅에서 틀지어진 교파주의가 아무런 여과 없이 이 땅에 흘러들어 왔고, 우리 한국 교회는 선교 초기부터 교파주의의 악영향에 물들어 버린 것입니다. 오늘 우리 한국 개신교회가 가톨릭이나 불교 등 다른 종교나 종파보다 더 이기적이고 독선적이며 배타적이라고 비판을 받는 이유도 교파주의가 초래한 경쟁의식이 비크리스찬들에게 상업적이고 속된 모습으로 비쳐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교파가 다르다는 이유로 20cm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교회를 세우는 한국 교회의 극단적인 교파주의적 발상은, 세속 사회의 상도의(商道義)만도 못한 추태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교파의 난립은 신학교의 난립과 맥을 같이하고 있습니다. 우스개 소리 같지만, 모 신학교 졸업생들은 두셋만 모이면 ‘어느 나라 어느 학교로 유학 갈까?’ 생각하고, 모 신학교 출신들은 개척 어디에 할까? 궁리하고, 모 신학교 졸업생들은 두셋만 모이면 ‘우리도 총회 하나 세울까?’ 라는 농반 진반의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입니다. 교파의 난립이나 신학교의 난립은 한국 교회가 갖고 있는 집단적 이기주의(collective egoism)의 산물입니다. 이는 ‘함께 살자.’라는 미명 아래 ‘너를 죽여서까지라도 나만 행복할 수 있다면 그 길이 선이다.’라는 극단적 상대주의자의 이기심이며 결국은 ‘함께 죽자.’라는 어리석음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또한 한국 교회는 교회 연합에 있어서도 똑같은 집단적 이기심만을 앞장세우고 있습니다. 말이 연합이지 철저한 지분 싸움입니다.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는 그의 책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Moral Man and Immoral Society)」에서 ‘철두철미한 죄악적 존재로서의 인간 그리고 그 인간 사회의 집단적 에고이즘’을 이야기하면서 “인간이 개인으로서는 양심적이고 이성적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한 사회나 집단은 그렇지 않다. 매우 이기적이다. 그래서 한 국가나 계급들은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서는 부도덕도 무차별 감행한다.”라고 말했습니다.


교회 연합기관에 한때 몸담았던 필자는 니버의 이 말을 피부로 체험하며 살았던 것 같습니다. 윤리도 도덕도 선도 악도 없고 단지 자기 교파, 자기가 속한 집단의 이익만을 위해 존재하는 도구로 전락한 인간들의 모습뿐이었습니다. 우리는 예수의 가르침과 교훈을 보잘것없는 규정들로 땅에 묻어버린 배리새 인의 모습을 봅니다.


이 땅의 문제는 기실 교파주의의 문제요, 더 나아가서는 그 집단에서 자칭 지도자연 하는 사람들의 의식의 문제입니다. 이런 단순논리가 가능한 것은 마치 예수 당시의 바리새 인들처럼, 그들이 많은 것을 누리고 가질 수 있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로마 교회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신앙을 얻고자 했던 프로테스탄트가 또 다시 교권주의자들의 집단적 이기심 때문에 압살당하고, 한 몸된 교회가 분열되는 모습 속에서 가장 심각한 교회의 이기주의의 원형(proto-type)을 보는 듯합니다.


둘째, ‘사두개 인의 누룩’이라는 말 속에 함축된 합리주의, 귀족주의적 이기심이 교회 이기주의의 한 유형입니다.


제사장적 귀족 집단인 사두개 파 사람들은 헬라 문화에 정통했으며 헬라화를 지지하고 성서에 기록된 규정들만 확실하다고 믿었던 합리적, 문화적, 귀족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신적계시를 부정하였고, 능력과 경건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의 이해관계는 본질적으로 정치적인 것이었고, 늘 현상 유지를 지지하는 쪽이었습니다. 이들에게서 오늘날 귀족주의적 교회의 모습을 봅니다.


학벌과 재산이 커트라인이 되는 교회는 없습니까? 언젠가 운동권 학생들이 서울 시내 열 개 교회를 선정, 방화를 모의한 적이 있다는 소문이 공공연하게 나돌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흥분하고 경계했지만, ‘왜 그들이 그렇게 나왔는가?’ 라는 물음에 대한 답은 아무도 내리지 않고 회피한 채 어물쩍 넘어갔던 것 같습니다. 교회가 귀족화 되면 그 생명이 결코 길지 못하다는 것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귀족화된 교회라 함은 큰 건물, 많은 예산, 교인 수가 많은 교회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나만의 세계(me-society)’를 추구하며 ‘지금 여기(here and now)’에서만 삶의 존재 의미가 있는 현상 유지(status quo)자들의 공동체를 말합니다. 자기 교회만, 자기들끼리만 잘 먹고 잘 사는 교회, 내세도 없고 부활도 없어서 지금 여기에 천국을 건설하고 기득권을 유지하며 현실에 안주하여 한 걸음도 더 전진하려 들지 않는 사두개 인들. 그래서 사람들은 방화를 모의하고, 교회를 떠나갑니다. 스테인드글라스와 샹들리에로 치장된 천장 높은 서구의 교회당에 관광객들만 북적거리는 몰락한 서구의 기독교(post christian era)가 역사의 준엄한 수레바퀴에 깔린 우리 안에 재현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이 앞섭니다.


셋째,  ‘헤롯의 누룩’이라는 말 속에 함축된 물량주의, 성공주의, 세속주의적 이기주의가 교회의 이기주의의 한 유형입니다.


한국 교회의 급성장을 물량주의와 기복사상에서 찾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세속주의와 샤머니즘적 신앙으로 몰고 간 교회 지도자들의 지도력과 메시지에서 기인한다고 보는 이들도 많습니다.


아무튼 한국 교회가 물량화 되었다는 데는 아무도 부인할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물량주의는 교회의 세속적 가치에 대한 무비판적 수용의 결과로 생겨났고, 그것의 목표는 성공이며, 표준은 크기(size)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건물이 메시지가 되었고, 교회의 관심은 대형교회가 되고 보자는 성공지상주의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흔히 있는 한 예(例)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전단이나 현수막을 자주 보게 됩니다. “대지 확보, 건평 300평, O층 완전분양, 냉방 완비, 차량 운행, 경제적 부담이 전혀 없는…….” 이것이 무슨 광고입니까? 자기 네 술집이나 카바레를 찾아 주십사고 널리 알리는 전단지 내용 같지만, 이것은 불행하게도 교회 전도지의 내용입니다.


뿐만 아니라 여기에 한술 더 떠서 자칭 ‘말씀이 좋아 어쩌구 저쩌구’ 하며 교회의 세속화, 상업화의 극치를 보여 주는 우리 교회의 부끄러운 자화상입니다. 이는 곧 실적이 찬양을 받고, 승자가 사랑을 받는 세속주의로 귀결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성장(양적 성장이건 질적 성장이건 모두 다)을 반대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말씀의 본 뜻을 결코 침해받길 원치 않으십니다.


그렇다고 이 물량주의가 여러 가지 면에서 침체의 늪에 빠져 있던 교회들에게 의욕과 활력을 불어 넣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물량주의적 성공주의는 교회 성장을 위한 ‘거룩한 실용주의(consecrated pragmatism)’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물량적 성공주의는 앞에 예를 든 전도지의 문안에서도 살펴볼 수 있듯이 그리스도의 중심성을 훼손하여 그리스도의 상리화(商利化), 그리스도의 이윤 동기화 그리고 그리스도의 인과법칙화로 치닫게 될 우려가 높은 것입니다.


아직도 우리의 기억에 생생한 어느 목사의 총기 살인사건이야말로 힘이 곧 진리고, 큰 것이 선한 것이고, 큰 교회 목사가 위대한 인격자이며, 과정이야 어떻든 결과만 좋으면 모든 것이 선하게 된다는 물량주의적 성공주의에 빠진(차별당한) 세속주의자의 슬픈 연가(戀歌)인 것입니다.


더 청빈하게, 더 ‘심플’하게 - 탈이기주의를 위한 제언


교회의 이기주의는 그 교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의 이기주의이고, 특히 교회 지도자들의 이기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지도자들의 이기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지도자들은 자기의 정체와 자아상을 발견하여 한국 교회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갱신하고 벌전시켜야 할 시대적 사명을 지고 있습니다. 여기 한국 교회의 이기주의를 극복할 몇 가지 방법을 제언한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교회의 이기주의에 대한 비판을 겸허하게 받아들여 철저한 자기반성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비난을 교회의 도그마로 묵살해 버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회적 관점과 그것들을 낳게하는 시대의 기질과 관계 있는 것’이라는 통념에 사로잡혀 교회의 이기주의에 대한 비판이 곧 이 시대를 풍미하는 운동권의 흑백 논리의 귀결일 뿐이라고 묵살해 버리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교회의 비판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고 도그마가 아닌 말씀에 귀를 기울어야 합니다. 그래서 부단히, 가차없이, 자학적일 정도로 처절하게 자기반성의 길로 용감히 나서야 할 것입니다.


둘째, 축복의 프리즘(prism) 사상으로 우리의 사고를 전환해야 합니다. 축복의 사유화를 금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일대 사고(思考)의 대전환이 필요합니다. ‘자기들끼리 잘 먹고 잘 사는 교회’ ‘너희들끼리 잘 먹고 잘 살아봐라’식의 비난과 외면이 점증되고 가속화되면 이 땅에 교회가 설 자리는 어디겠습니까? ‘너를 위하여(for)’ 주신 축복이 아니라 ‘너 로 인하여(throgh)’ 만인에게 찬란히 펼쳐지는 무지갯빛 나눔의 축복을 사유화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생각 바꾸기, 이것이 바로 탈이기주의의 첫걸음입니다.


셋째, 심플 라이프스타일(simple life style) 운동을 전개해 나갑시다. 가난 구제는 나라도 못한다는데 교회가 무슨 구제사업 단체냐는 항변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구제사업 단체는 아닙니다. 그러나 청빈하고 소박한 삶은 교회의 몫입니다. 탐욕스런 교회의 모습을 떠올리기도 추합니다. 오늘 한국 교회에 영향력을 지닌 대교회들이 새로운 바람을 일으킬 수 있는 무슨 프로그램과 계획을 수립, 추진하고 있음을 우리는 신선하게 느낍니다.


좀 오래 된 이야기지만, 1976년 미국의 한 교회(Kansas 주 Eastminster 장로교회)가 교회 건축 계획을 세워 놓은 후, 과테말라에 지진이 일어나 수천의 집과 건물 그리고 많은 교회들이 파괴된 사건을 전해 듣게 되었습니다. 그 교회의 당회는 과테말라의 지진피해 상황을 돌아보고 “과테말라의 우리 형제들이 그들의 폴크스바겐(little Volkswagen)을 잃었는데 우리가 어떻게 우리 교회를 위해 캐딜락(Cadillac)을 사겠느냐?”라고 하며 건축 예산을 2/3로 줄이고, 12만 달러를 과테말라로 보내어 26개의 교회와 28동의 목사관을 지어 주었다고 합니다.


물론 우리 한국 교회도 이에 못지않은 일을 행하고 있음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나 말고 모두’는 나를 향해 체중을 줄이고, 탐욕을 버리고 더욱 더 가난한 삶, 청빈한 삶을 살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지 세상과 이웃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주님의 요청인 것입니다.


세속주의의 탈을 벗읍시다. 더 소박하게, 더 청빈하게, 더 가난한 자를 위해 삽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마 19:21). 이 시대에 주시는 주님의 음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