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읽지 않고 비판하기

2008.09.02 12:48

김성찬 조회 수:1185 추천:96

읽지 않고 비판하기

2008.09.02(화)

 

 


지난 8월초, 솔제니친이 타계했다. 70년 솔제니친은 노벨 문학상을 받는다. 그리고 58년 보리스 파스테르나크가 노벨문학상을 받았을 때와 같은 일이 벌어졌다. 파스테르나크는 걸작 『의사 지바고』를 타미즈다트(소련에서 공식적으로 출판될 수 없는 저작을 외국에서 출판하는 경우를 가리키는 용어)를 통해 프랑스에서 출판했고 이 작품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소련의 공식 일간지들은 '우리는 읽지 않았지만 비판한다'는 제목으로 파스테르나크에 대한 선동을 이끌었다. 파스테르나크를 따라 솔제니친은 그의 걸작 『암병동』과 『연옥의 제1권』을 서구에서 출판했고, 러시아의 70년은 58년을 반복했다. 공식 일간지들은 이번에도 '읽지 않고 비판하기'를 이끌었다.


여기서 내가 주목하는 것은, ‘읽지 않고 비판하기’라는 용어(用語)다.

방향은 다르지만, 난 여기서 편집부가 내게 선정해서 보내준 책들을 ‘읽지 않고 비판’ 하려고 한다. 내가 폐쇄된 크렘린궁의 공식 일간지 편집국이라는 말은 아니다. 단지, 그 매력적인 ‘읽지 않고 비판하기’라는 용어만 차용할 따름이다. 입장은 다르지만 그 용어의 역사성을 제시하여, 내 글의 객관성을 담보하고자 한다.


책 속에 길이 있다고 말하지만, 모든 책에 길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사람마다 싫어하는 종류의 책들이 있다. 로이드 존스는 그의 부친에게서 책읽기를 배웠다고 말한다. 그는 그의 부친에게서 “책 읽기는 항상 부정적인 것에서부터 출발하라” 는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다. 그만큼 책의 폐해가 크다는 말이다. 책은 잘 골라 읽어야 양약이 된다.


마찬가지로 모든 책이 비평의 대상일 수 없다.

비평이란 비평가가 비평하고 싶은 책만 비평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비평은 그 글쓴이의 장점을 잘 드러내 주어 그 글로 하여금 만인에게 좋은 영향력을 구사하도록 돕는 일이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비평이란 이름으로 저자나 설교자들을 무차별적으로 난도질(비판)하는 경우를 본다. 의미 없고, 분별력 없는 무지의 발로다. 이 세상에 그 장점을 소개할 만한 책과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이런 혼탁한 흐름에 복음적인 답변을 해야 할 필요를 느낍니다. …… 비교서평을 해주시”라는 원고청탁서를 편집자는 보내왔다.


그러나 그 두 책은 비교서평을 할 의미가 없는 책이었다. 그 이유는,

한 책은 우리 교단 사람들에게는 뒷북치는 것 같은 내용을 담은 책이고, 다른 한 책은 시대 역행적인, 읽을 필요가 없는 책이기 때문이다. 아니 무익을 넘어 영적 해악을 끼치는 책이다.

그래서 전자는 비평할 필요가 없고, 후자는, 평가할 가치조차 없는 책이다.


더군다나 이런 의미 없는 책들을 비교서평 한다는 것은 비평을 위한 비평이요, 독자들을 기만하는 행위라 여긴다. 하여, 난 그 두 책 중 한 책만 저자와 책명을 소개한다. 그 한 책이 김무현의 <하늘의 언어>다. 다른 한 책은 그 영적 혼탁을 더 부추길 것 같아 그냥 여기서 무시한다.

그러나, 이 ‘읽지 않고 비판하기’는 바로 그 제목이나, 그 저자의 성(性)씨 조차 소개할 수 없는, 마케팅을 비판하나, 절묘한 마케팅 전략으로 기독교출판계를 헤집는 그 책과 저자에 대한 비평 아닌 비판이다. 사실 그 비판도 내키지 않으나 noyes를 못해 휘말려든 죄를 속죄하는 심정으로 한줄 늘어놓는 거다. 


도대체 무슨 연유로 이런 장광설을 늘어놓는 것일까? 독자들은 의구심을 발할 것이다. 영리한 독자들은 이미 눈치를 챘겠지만, 나에게 비평을 요구한 그 어느 한 책은 읽을 가치가 없는 책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이런 장광설이 그 어떤 비평보다 독자들의 의식을 깨우는 각성제라 여겨 의도적으로 반복을 거듭했다. 학습이 반복의 기적이라서.


하나, 말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 말해야 한다. 책도 그에 합당한 이력을 갖춘 자가 쓴 책만이 책이다. 바른 학문적 연마와 신앙적 체험이 전무한 사람이 탁상공론식으로 시비를 거는 이야기에 관심을 쏟을 이유가 없다. 그 아버지의 이름으로 유명세를 탄(활천 편집자도 내게 그 저자를 소개하면서 그 누구의 아들이라고 친절하게 소개해 왔다.) 그리고 출판계의 기발한 상업주의에 기댄 베스트셀러는 더 이상 자리할 수 없게 해야 한다. 그것은 독자의 몫이며, 이런 기독교 언론매체의 사명이다. 그런 점에서 이 비판은 당연하다. 편집부도 이런 의도 하에 이런 기획을 했으리라 여긴다. 그러나 보다 더 적극적인 방어는 이런 류(類)의 시도도 하지 않았어야 했다. 우리 성결교회 교역자들은 이런 류의 책들에 대해, 읽지 않고 비판할 수 있어야만 한다.


둘, 그 책이 시대역행적, 시대착오적 논쟁을 부추기고 있다는 점이다. 강력한 은사주의에 대한 세대주의적 반동으로 1930년대에는 그런 문제제기가 필요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젠 그 치열한 영적 공방을 거쳐 은사운동이 일반화된 시대다. 육과 영을 이원론적으로 구분하던 전통신학이 이젠 전일체로서의 몸을 말하는 성서해석학에 대해 말씀 안에서 승복한 시대다. 이미 신학과 심리학이 그 긴밀한 관계설정을 위한 치열한 논쟁을 끝내고, 상호 보완하는 복음적 관계로 발전해 가고 있는 이 시대에 그는 “심리학은 반 기독교적이다”라고 떠들고 있다.


심리학이 반 기독교적이 아니듯, 아니 그것에 비견할 바는 아니지만 그의 주장대로 방언이 비성경적인 은사가 아니다. 절대 아니다. 한때, "기독교는 코미디다" 라며 냉소를 날렸다는 그가, 느닷없이 등장해  이젠 반쪽 복음으로 냉소를 날리는 형국이다. 이렇게 뒤죽박죽, 신앙적, 학문적으로 소아병적 사고에 머물고 있는 그가, 툭, 생각 없이 내놓은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분별력 없는 이 땅의 크리스천들의 필독서가 된, 독서 풍토가 안타깝기 그지없다.  병약한 교회의 영적 현실이 서글프다.


그런 그가 이 시기에 은사의 초보이자 꽃일 수도 있는 방언에 대해 일갈한다는 것이 코미디다.  오늘 성령의 강권적 역사하심으로 가톨릭(성령쇄신(리뉴얼; 가톨릭 식으로))까지 포함한 한국기독교계에 충만해져가는 성령의 역사하심에 대해, 그의 시계 바늘을 거꾸로 돌리려는 그 억지시도는 한마디로 블랙코미디다. 그리고 그 성령 충만의 첫 선물인‘방언’에 대해, 감히 단절을 발설하는 것 또한 어불성설이다. 그는 책을 쓰기 전에 먼저 기도 굴에 들어갔어야 한다. 영적 할례 받지 못한 사이비들은 물러나야 한다. 그래 더 교훈할 가치도 없다. 논평할 가치가 없는 일이다. 더군다나 신유의 복음을 전도표제 삼는 우리교단은 한때의 오판을 반성하고, 성령의 온전한 역사하심에 우리 전부를 순전히 그 영에 내어 맡기고 있다. 


셋, 그는 시대의 언어를 판독해내지 못했다. 이 시대의 언어가 뭔가? 통전, 통합, 일치 등등이다. ‘방언’에 대해 시비하는 것은, 바벨탑 사건으로의 회귀를 획책하는 분리주의적 음모다.


난 여기서 은사로서의 방언이 선사하는 기쁨과 유익함을 열거하지 않는다. 우리 이미 다 그 하늘의 언어가 주는 생명력에 충만해 있기 때문이다. 선물은 받은 자만이 그 선물의 가치를 알 수 있다.


글은 무서운 것이다. 책은 더 무섭다. 이런 말도 있지 않은가? 세상에서 제일로 무서운 사람은, 단 한권의 책 밖에 읽지 않은 사람이다. 가장 무서운 사람은 은사(카리스) 그 선물 하나도 받아 누리지 못한 교조주의자들이다. 혹자는 말한다. 그 책에도 밑줄 그을 부분이 있다고. 그렇다. 모든 책이 부분적으로 옳지 않거나, 부분적으로 명쾌하지 않은 책은 없다. 그런 혹세무민할만한 달콤함이 없이 어떻게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를 수 있겠는가? 그래서 베스트셀러는 극히 조심해서 골라 읽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그 숨은 의도가 무엇이냐 이다. 필자의 참된 힘은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필자의 신앙적, 신학적 방향에 있다. 능력이 아니라 방향이다.


우리는 상당 부분 바른 책 읽기에 실패하고 있다. 대중들은 베스트셀러에 관심을 갖게 된다. 우린 그런 회중을 대한다. 그러므로 영적 지도자는 바른 책 읽기에 주의를 기우려야 한다. 일반 신문 사설이나 잡지에 게재된 비평을 한 단계 뛰어 넘는 영적 통찰력이 필요하다. 한 권의 책, 한 사건 등이 말하고 있는 그 시대의 메시지를 발견해 내고, 그 시대정신이 올바르게 표출되고, 교정될 수 있도록 돕는 일이 우리 영적 지도자들의 몫이다. 그것이 강단의 힘이다.


레비-스트로스에 의하면 글의 최초의 효용이 권력의 명령 전달이었다. 우리는 자기 인식의 노예가 되어서도 안 되지만, 더더군다나 타인의 인식의 노예가 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 책 속에 길이 있다고 하지만, 다시 한 번 더 강조하자면, 모든 책 속에 길이 있는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