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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와 문화  -  라면 땅과 반(反) 뉴 에이지 운동

 


 “뉴 에이지 운동은 과연 교회에 영적 위기를 줄만한 정도인가? 물론이다. 뉴 에이지의 위험성은 마치 살인 수법 가운데 비소를 밥이나 국에 넣어 감쪽 같이 오랜 세월 그를 말라 죽게 하듯이, 오는 새로운 문화에 목이 마른 젊은 이들에게 접근하여 올바른 믿음에서 떠나게 만드는 치명적인 영의 독소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리믹스 음악이나 컬트 무비, 정신 세계나 심령술, 록음악과 사탄의 도구로 전락한 듯한 영적 파괴력을 지닌 영화들, 아, 아 대책 없는 비디오.”

 

이상은 기독교 문화 운동에 관심을 갖고 있는 이들이 왜 뉴 에이지 운동이 사탄적인가를 설명하고 있는 글에서 몇 마디 인용한 것이다. 교회가 대중문화에 무감각한 상태로 있는 동안 무섭고 집요하게 사탄의 공작이 감행 되었다는 것이다. 교회는 특히 청소년들은 이런 엄청난 음모의 포로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들(뉴 에이지 운동을 반대하는 이들:반(反) 뉴 에이지 운동가들)의 문제 제기는 실로 충격적인 것이었다.이들의 강연을 들을 사람들은 공포를 느꼈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대중문화에 대한 높은 경각심을 느끼게 된 것 같다. 그리고 대중문화에 대한 우리 신앙인의 관용적 자세에 대해 많은 반성을 하게 된 것 같다. 매우 훌륭한 문제 제기였다.

 

그러나,

나는  그동안 그들의 글과 강연등을 접할 때마다, 이상하게도 기억 조차 없었던 먼 옛날의 사건이 자꾸만 오버 랩 되어 오곤 했다. 이런 것이다.

 

그러니까  70년댄가, 정확히 그 연도는 기억 할 수 없지만, 문득 이런 이야기가 생각 난다. 그 시절 우리는 간식으로 곧잘 ‘라면 땅’을 즐겨 먹었다. 라면 부스러기를 기름에 튀긴 고소한 과자를 말이다. 그런데 어느 하루 그 ‘라면 땅’이 맛이나 가격 문제가 아닌 엉뚱한 일로 다시 한번 더 유명해졌던 것이다. 뽀빠이가 그려진 상품 도안이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내용인즉슨, 한 간첩단이 적발 되었는데, 그 간첩단중의  한 사람이 문제의 ‘라면 땅’의 도안을 그렸다는 것이다. 적화통일의 음모가 담긴 ‘라면 땅 도안’을 말이다. 그제서야 우리는 그 도안에 적화통일의 음모가 있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것은 일종의 헤프닝이었다. 왜냐하면 간첩단 사건 이전에는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한 일이었기에, 그런 음모가 전혀 우리들에게는 무해한 것이었던 것이다. 그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감추어진 음모인 그 문제의 그림 때문에 ‘적화(赤化)’된 사람이 없었고, 간첩단 사건 발표 후에도 그 그림 때문에 ‘간첩’이 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저 값싸고 맛난 라면 땅이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바로  ‘반(反) 뉴에이지 운동’을 하는 이들의 글과 언행이 나로 하여금 이런 생각을 자꾸만 떠올리게 한 것이다. 그것은 직관(直觀)이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공통 분모가 있었다. 누군가가 그 숨은 의도를 말해 주기 전까지는 아무도 그 사실을 인지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거기에는 분명한 차이점도 있다. ‘라면 땅’사건은 분명한 음모의 주체가 있었지만, 반(反) 뉴 에이지 운동가들이 말하는 뉴 에이지의 음모는 그 실체가 불분명하고, 더나아가 무엇이 뉴 에이지 현상인지를  구분하는 명확한 한계를 설정해 주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다. 어떤 의도를 해석하는 해석자(반 뉴 에이저)의  시각이 과연 올바른 것이냐 라는 의문이 일어난다. 문제 제기는 훌륭한데  혼란스럽고, 문화적 메시야연 하는데  대안이 없다는 것이다. 매우 자극적이기는 한데 그래서 극단적이다. 기존 교회의 문화에 대한 인식을 비판하면서 오히려 교회를 문화  적대적 공동체로 몰고 가려는 의도가 엿 보인다. 문화상업주의를 비판 하면서 자신들도 문화상업주의화 되어 가고 있는 듯해 보인다. 그래서 이런 운동(movement)에 대해 우려하는 교회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것 같다.(긍정적인 부분이 많이 있슴에도 불구하고)

 

나는 반(反) 뉴에이지 운동을 하는 이들의 열정에 감사를 드리면서, 그 운동이 보다

건전하고, 균형 잡힌 기독교문화의 정착에 기여하는 일이 되길 바라면서 작은 우려를 몇가지 제기해 보고자 한다.


첫째로, 반(反) 뉴에이지 운동가들이 말하는 뉴 에이지 운동(가)의 실체가 누구냐 라는 점이다.

 

먼저 독자들의 이해를 돕게 하기 위해 그들이 언급하고 있는 뉴 에이지 운동의 역사를 간략하게 살펴 보고자 한다.

 

“뉴 에이지 운동의 근원은 1875년 뉴욕에서 러시아 사람 헬레나 페트로브나 블라바츠키에 의해 창설된 ‘신지학 협회’(神智學協會)에 있다.이 협회의 삼대째 회장인 베일리는 영국 출신 여자로 뉴 에이지 운동에 실질적인 기초를 놓았고 그들의 대제사장으로 여겨진다. 그는 영매(靈媒)였는데 티벳 사람이었던 Djawal Khul, 소위 지혜의 주인으로 자처하는 악령으로 부터 지시를 받았다. 1975년까지 뉴 에이지 운동은 비밀 지령에 의해 완전히 지하에 숨어 있었다. 그러나 1975년 부터 그들은 새로운 세계 질서와 임무를 위해 ‘계획’을 공개 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새로운 시대의 이론은 광범위하게 퍼졌고 새로운 시대의 구세주의 선언과 연결되어 전세계적으로 사용 가능한 모든 매체를 통하여 선전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뉴 에이지 운동의 주장들이 공공연 하게 드러나게 된 것은 퍼거슨이 쓴 ‘물병자리의 음모’에 의해서이다.‘물병자리’ 시대라는 개념은 점성술로 부터 나왔다. 이것은 태양의 춘분점으로부터 순수한 천문학적 변위를 의미하는 것으로 약 2,000년 동안 지배하게 되는 12성좌의 하나이다. 이번 2,000년 말에 태양의 춘분점이 ‘물고기자리’로 부터 ‘물병자리’로 바뀐다고 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 이행이 바로 1962년에 이미 있었다고 한다. 물고기는 초대 기독교에서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고백하는 상징이 있었고 그리스도인임을 나타내는 표시로 자주 사용 되었다. 뉴 에이지 운동 추종자들은 물고기 자리를 떠남과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도 끝났다고 주장한다.”

 

이상이 그들이 천편 일률적으로 말하고 있는 뉴 에이지 운동의 역사이다. 그리고 실체이다. 그런데 여기 이들의 주장의 허구성을 말하는 이의 시각도 있다.

 

“그러나 정작 뉴 에이지 운동의 실체를 규명할 신지학협회의 조직계보라든지,악령의 지침서라든지, 1975년 새로운 지시에 대한 증거등은 찾아 볼 수 없다. 또한 ‘물병자리 음모’라는 것도 점성사들의 말장난에 불과하다. 비과학적 말장난인 점성술에 과민한 기독교인들은 세차 운동과 춘분점의 이동을 설명하는 천문학에 더 민감해질 필요가 있다. 무지는 두려움을 낳기 때문이다. 점성술에서 의미를 두는 모든 별자리는 감상적인 인간들이 우주에 떠 있는 몇개의 별을 모아 작위적으로 만든 것들이다.어쨋든 ‘뉴에이지’라는 용어의 근원은 비밀지령의 ‘지시’보다는 지구 자전축의 기울기,‘23.5’로 보는 것이 상식적인 판단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미국의 ‘뉴에이지문화’는 왜곡된 기독교 문화권 밑에서 생겨난 비트족에서 그 뿌리를 찾는다. 이 비트족들은 기성세대에 반발하는 신세대를 주축으로 했는데, 신세대는 문자 그대로 ‘뉴에이저들’이었다. 이 어휘의 뉘앙스에 의해 점성술의 말장난에서 기원한 ‘뉴에이지’ 개념이 신세대의 ‘반항문화’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다. 한국교회에  반뉴에이지운동의 물꼬를 터준 ‘뉴 키즈 온 더 불록’도 이름부터가 뉴키즈, 뉴에이저이고 우리 나라의 10대들에게 폭발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서태지와 아이들’도 이름부터 아이들 뉴에이지이다.”((‘사탄은 대중문화를 선택 했는가’(뉴에이지, 그리고 반뉴에이지운동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비판, 신태균,복음과 상황 ’92년11월호))

 

정말 어떤 점성사들이 말하는 “이번 2,000년 말에 태양의 춘분점이 ‘물고기자리’로 부터 ‘물병자리’로 바뀐다 ”는 말에 근거해서 ‘새시대(New Age)’의 도래를 말하고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부질 없는 일일것이다. 그리고 그런 근거에 비정상적으로 민감해 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작년(1992년) 시한부 종말론자들이 성경적 근거도 없는 ‘직통 계시’를 문자화, 객관화 시켜서 숱한 ‘영계의 아이들’을 양산해 냈던, 영적 신드롬 현상의 재현인 것일지도 모른다. 거짓과 허위(점성술)에 기초해서 새시대의 도래를 외치는 자들의 이야기를, 진실인 것처럼 받아들여 객관화 시켜 주고, 떠들어 댈 이유가 무엇인가?  그렇다면 반 뉴에이저들은 그 점성술이 말하는 2,000년대 말의 새시대를 믿고 있단 말인가?

 

둘째로, 반 뉴에이저들이 뉴에이지운동의 사상적배경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들에 대한 것이다. 그런 사상들이 정말 ‘새로운’(new) 것이냐 하는 점입니다.

 

엘리스 포터에 의하면 뉴에이지는 “모든 만물은 하나이다, 혹은 모든 만물은 하나님이다”라고 믿는 사상적 흐름인 것이다. 이는 동양 종교 - 힌두교, 불교,요가등에서 유래한 사상이다. 불교의 일원론과 유교의 이원론(음,양)에 관련된 운동이다. 따라서 새시대운동은 단일론이나 이원론에서 처럼 모든 문제의 해결을 자기자신에게서 찾는 운동인 것이다. 

 

더글라스 R. 그루두이스는 “뉴에이지의 희망은 그 모든 표현들에 있어 인간의 잠재력, 마음속에 있는 신성, 만유일체에 있다”고 말한다.  한 마디로 삼위일체 하나님 중심이 아닌 모든 것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사상의 뿌리는 깊고도 오래된 것이다. 그리고 우리 삶의 전 영역에 두루 퍼져 있는 사상인 것이다.

 

이것이 새로운 것인가? 물론 하비 콕스가 “동양에서 온 빛에 대하여 서양이 다각도로 굴절 시킨 마지막 결과는 완전히 새로운 형태이다”라고 말했지만, 그것의 형태는 새로운 것일지 몰라도 그 본질은 동일한 것이다. 동양 종교가 서구인들에게는 새로운 사상적 흐름인지 모르지만, 우리처럼 유,불,선 삼교의 지배 아래 있었던 종교 다원적 사회에서는 이미 다 경험하고 있는 일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그러한 다원주의를 극복하여 이 땅에 기독 신앙의 뿌리를 든든히 내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또한 그들은 ‘예수 없이도 이 세상은 낙원이 될 수 있으며 인간은 신이 될 수 있다’는 뉴에이지 정신에 비추어

 

“환경보호, 동물보호, 군비축소운동, 새로운 종류의 경영 이론, 기아퇴치운동과 그외 기타등등의 복지를 내건 활동들은 모두 뉴 에이지 운동의 일환으로 겉으로 드러난 활동목표가 진실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기독교의 세계관을 해체하는 것이 목적이다.”라고 말한다.

 

그들의 주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이런 운동들을 가리켜 전적으로 평화를 가장한 사탄의 음모라고 몰아 붙인다는 것은 지나친 해석이다. 빈대 한마리 잡으려고 초가삼간 태우는 형국이 아닐까?

 

환경보호문제만 해도, 오히려 작금의 생태계의 위기는 기독교의  인간중심적 세계관의 산물이며, 이러한 창조 질서의 보전을 위한 노력은 지배와 정복이 아닌, 자연을 위한 섬김과 봉사의 청지기적 사명의 결과가 아닌가? 

 

더나아가 그들 중 어떤 이들은 오늘 한국교회 강단의 메시지가 ‘인간의 잠재력’을 부추긴다는 점에서 뉴 에이지적 음모가 있다고 혹평하고 있다. 

 

이런점에서 볼 때, 뉴에이지 사상의 위험을 말하는 사람들은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있다고 믿는자들이 아닌가 생각 되어진다.  그러나 복음적, 성서적 문화 이해란 인간의 창조와 타락의 실존적 현상 및 역사는 하나님의 구속사의 무대이자, 또한 사탄의 활동 영역임을 직시하는 시각인 것이다.

 

셋째로, 반(反) 뉴에이저들의 문화에 대한 태도는 매우 배타적이다. 극소수의 기독교 언론 매체를 가진 몇몇사람들의 문화에 대한 배타적 시각을 한국교회가 강요 받고 있는 느낌이 든다. 모두를 문화 배격주의자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2세기의 교부 터툴리안은 “신자의 투쟁은 자연을 상대로 할 것이 아니라 문화를 상대로 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리차드 니버는 전 기독교 세대를 통해서 계속된 하나의 영속적인 문제 기독교와 문화를 다루면서 터툴리안의 입장을 ‘문화에 대립하는 그리스도’로 구분하고 있다. 그런데 이 땅의 소위 반 뉴에이지 운동을 하는 이들의 입장이 바로 여기에 속한 것이라 생각 된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사탄은 마침내 대중 문화를 선택 했다. 대중문화, 그 적과의 싸움은 끝이 없을 것 같은 생각도 들고 대중문화, 그 적과의 동침은 잠시 고통을 잊어 버릴만큼 흥미롭기도 하다. 뉴 에이지 운동은 순수 기독교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것의 집합체인 것이다. 1000편의 영화중 999편이 사탄적인 영화다. ‘스머프 가족’, ‘스타워즈’,‘E.T.’,‘사랑과 영혼’등이 사탄적 영화다.”

 

그들에게 있어서 문화는 ‘적’인 것이다. 1000명중에 999명이 적이라는 말처럼 들린다. 그들의 강연을 들은 사람들의 한결 같은 고백은 무섭다는 것이다. 그동안 친근하게 대했던 문화 예술이 하루 아침에 ‘적’이 되어 몰려 오는 느낌을 주고 있는 것이다.

 

내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그들의 ‘E.T.’라는 영화에 대한 해석에 심한 충격을 받았다.

“가장 좋은 본보기로 ‘E.T.’를 들 수 있다. 악마 같은 얼굴을 한 ‘E.T.’는 우주생물로서 신만이 소유할 수 있는 힘을 가졌다. 사실상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본따서 만들어진 것이다. 즉 사람의 병을 고치고, 인간들의 마음을 읽고, 언어 없이도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 또한 공중으로 떠오르며, 공중에서 내려 오기도 한다. 이 영화는 죽음과 부활의 장면까지도 삽입 했다.”

 

이런 식의 설명이다. 그래서 사탄적 영화라는 것이다.참으로 절묘(?)한 해석이다. 알레고리적(우의적) 해석이다.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우의적 해석이란 해석자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텍스트(성경)를 악용하는 경우가 생긴다는 것을. 설령 스필버그 감독이 그렇게 설명 했을지라도 어떻게 우리 예수님께서 길 잃은 외계인이며, 맥주에 취해 비틀 거리는 나약한 우주생물인가 항의라도 해야 할 판에, 오히려 스필버그는 입도 벙긋하지 않고 있는데, 서둘러서  “예수가 ‘E.T.’”다라고 신령한(?) 해석을 붙일 일이 어디 있는가? 

 

죠지 오웰의 1984년 - 암울한 미래를 전하던 그 해, 이 땅에  상륙하여 화선지의 먹물처럼 대중 속에 번진 ‘E.T.’  좀 처럼 가실 줄 모르는 흥분과 감동을 우리에게 주고  갔던 아름다운 영화. 사랑할 줄 아는 어린이, 오색 빛깔 쵸코 볼을 허기진 ‘E.T.’에게 던져 주던 그 아이는 ‘사랑한다는 것은 먹을 것을 주는데서 부터 시작 된다는 것’을 생래적인 감각으로 알고 있었던가 보다 라는 신앙교육적 영감을 주었던 좋은 영화. 그 고운기억 속에 찬물을 끼얹는 우의적 해석은 다소 지나친 것이 아닐까?

 

마지막으로, 그래서 그들에겐 대안이 없는 것이다.

 

신앙 역사가 말하고 있다. 문화에 대립하는 유형의 사람들에게는 대안이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영과 육, 성과 속, 하나님의 것과 가이사의 것을 지나치게 구분하는 이원론적 사고 속에서 교리와 문화의 접점을 찾기 힘든 것이다. 물질 문명의 이기(利器)인 컴퓨터나 비디오등은 가치 중립적인 것이다. 누가,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따라 이기(利器)도 되고 흉기(凶器)도 되는 것이다.  또한 그들에게 대안이 없다는 말은 이런 그들의 고백에서 살펴 볼 수 있다.

 

“일단 뉴에이지 음악을 단순히 음악의 한 쟝르로서 취급코자 할 때, 그 기준이 무엇이며 그 한계는 어디까지로 할 것이냐 하는 것을 정의 내리기는 마치 우리 사회 전반에 문화라는 이름으로 침투해 들어와 있는 ‘뉴에이지 정신(?)’의 흔적들을 전자 현미경으로 구별해 내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다.”라는 것이다.

 

그렇다. 구체적으로 무엇이 뉴에이지 영화며, 음악이냐에 대한 기준이 불분명 하다는데 큰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들 스스로도 그 구분은 전자 현미경으로 구별해 내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서도 그들은 명확한 진단이나, 예리한 수술 도구도 없이,  그들 나름대로 자의적으로 판단하여 환부(患部)라고 여겨지는 부위를 도끼로 찍어 내는 듯한 무모함을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이루어 내고자 하는 기독교문화라는 것은  문화를 말하는 협의의 개념인 문예를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영화, 음악, 건축, 문학등을 말이다. 그러나 기독교 문예에 증진을 위한  기독교 신자들의 노고를 지금도 계속 되고 있다. 그리고 대중 문화의 폐해에 대처하는 신앙교육적 노력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외설 폭력물에 대한 비평적 시도는 이미 오래 전부터 YMCA산하 건전비디오연구회등에서,  올바른 T.V.시청법 및 대중매체의 효과적 이용등에 관한 것은 기독교교육학자들의 글을 통해 이미 소개 되어 있다.

 

진정한 기독교 문화란 복음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종교등 모든 공동체적 삶에 침투하여 인간 본성과 문화를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변혁할 때만 이룰 수 있다.  한가지 예로 천민자본주의적이고 물질만능주의 풍조에 대해 먼저 기독교는 청지기 정신과 건전한 직업 윤리를 실천하고, 청빈 ,절제의 생활화를 모범화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한국 현실에서 기독교 문화 건설의 실제적 모습일 것이다. 그리하여 기독교 문화란 잘사는 것 대신 바르게 사는 것을, 거짓된 과장보다 진실된 양식을, 쟁취하는 욕망보다 나누어 주는 기쁨을 가꾸는 문화임 입증해야 할 것이다. 기독교문화의 창출이란 이렇게 큰 과제를 안고 있는 것이다. 더불어 해야만 한다. 상호 존중하는 풍토 속에 기독교문화는 뿌리를 내릴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