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성서 언어를 배우라

2007.11.03 11:41

김성찬 조회 수:1441 추천:135

  성경언어를 배우라

  외출했다가 집엘 들어갔더니 책상위에 예쁘게 포장된 책 한 권이 놓여 있었습니다. 무슨 책인가 싶어 뒤적여 봤더니 뜻밖에도 ‘최불암 /시리즈-사랑이 뭐길래’라는 제목의 책이었습니다. 그렇찮아도 요즘 화선지의 먹물처럼 번져가는 화제의 책이라서 무슨 내용이 적혀 있는지 궁금도 했고, 얼마 전 서점에 들렸을 때 그속 내용이 궁금도 해서 한번 사볼까망설이다 차마 그렇게까지는 하기 뭐해서 관둔 책이었는데, 이렇게 뜻하지 않게 집안에서 발견케 되어 내심 반갑기도 하고 한편 의아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 책이 여기에 놓이게 되었을까? 이 책을 살만한 사람은 우리집에서는 아무도 없는데... 혐의(?)를 둘만한 사람이 분명히 없음을 인정하면서도 난 이렇게 물었습니다. “이 책, 누구 책이냐?” 아뭏든 하늘에서 떨어진 건 아닐테니까. 막연히, 누군가 대답하리라고는 생각하지도 않고 툭, 내 던진것 뿐이었는데, 뜻밖에도 제 방에서 공부하고 있던 국민학교 2학년짜리 딸아이가 불쑥 튀어나오더니
“아빠! 그거 내책이야”라고 소리쳤습니다.
“뭐? 누구책?”
“내 책이라니까요”
“아니, 이게 어떻게 니 책이냐?”
“기냥요(호호)”
“기냥?...”
기가 막힌 일이었습니다. 이제 겨우 국민학교 2학년짜리가 물경 4천원이나 되는 책을 부모의 동의도 없이 덜컥 산 것도 예삿일이 아닌데, 한 수 더 떠서 ‘최불암/시리즈’라니....

그 애가 이 책을 사게 된 이유는 이러했습니다. 그 하나는 요즘 신문, 방송을 필두로 그야말로 인구(人口)에 회자(膾炙)하는 공중 담화의 내용이 된 이 책의 내용이 막연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기냥’이 아니라 실제로 그 어린애들 사이의 주된 대화가 그런 내용들이어서 자기만 벙어리 노릇을 할 수 없어 ‘공동의 언어’를 개발하고자 거금을 투자해 ‘원본’을 구입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실로 충격적인 사실이었습니다. 누룩처럼 번진 유행어. 우리는 유행어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 그 말들은 자라나는 세대들의 생활에 큰 작용을 한다는 것이다. ‘최불암 씨리즈’를 읽노라면 문득 엄청난 현실의 변화를 느끼게 됩니다. 거기엔 최선을 다한다거나 진지한 삶에 대한 자기 성찰도, 고뇌하는 인간상도, 현실에 대한 분노의 고발도 없습니다. 그뿐만 안라 정상적인 생활로부터의 소외감이나 패배감을 이기지 못하는 좌절도 또한 없습니다. 단지 무색, 무취, 허무, 맹랑합니다. 이것이 이 새대정신의 한 단면일까? 생각해보면 유행어가 그 시대정신의 한 표상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80년대 유행했던 ‘잘났어 정말’이라는 말이 ‘시니컬’한 그 시대의 냉소주의를 표현했던 것처럼, 오늘 90년대의 ‘기냥’은 냉소할 여력조차도 상실한 무관심, 무목적, 무책임한 시대상을 대변하고 있는 것만 같급니다. 거기엔 필연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모두가 너무도 철저히 우연적인 것 뿐입니다. ‘빈 말’의 장(場)터엔 사유도, 진지한 대화도 없습니다. ‘나만의 세대(Me-society)’에 안주할 따름입니다. 헤드폰을 낀채 거리를 질주하거나, 오락실의 전자소음에 정감을 느끼고, 컴퓨터의 키보드를 신경질적으로 두들기면서 스트레스를 풀고 쾌감을 맛봅니다. 이제 타인에겐 관심이 없습니다. 박애(博愛)도, 공동선(善)도 없습니다.대화도 없고, 독백도 없습니다. 거기엔 말초신경만을 자극하는 맹랑한 ‘빈 말’만 있을 뿐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인간이 언어를 배움으로써 인간이 된다’고 한다면, 사실 그들이 기성세대들로부터 배운 것이란 ‘혼자 있으면 낮잠 자고, 둘이 되면 남 흉보고, 셋이 모이면 고스톱판 벌이는 것’뿐이어기 때문일 것입니다.

  1. 위기의 시대-성서 언어의 퇴조

  “과연 우리에겐 언어와 상관없이 존립하는 현실이 있는가?” 한번 생각해 봅시다. 카시러(Cassirer)는 “우리는 언어가 형성해 주는 현실만을 갖는다.”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 주변에 떠도는 언어가 형성하는 현실은 과연 바람직한 것인가? 이 시대를 혼탁케 하는 것이 단지 공장에서 내뿜는 시커먼 연기나 폐수 뿐일까? 이 가치전도된 사회는 이미 자정(自淨)능력을 상실했는가? 그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바닷물이 항상 신선한 것은 단지 2.5%밖에 없는 염분 때문이라는데 우리,자칭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고 자부하는 이들의 언어-그 신선도는 이 사회에 얼마만큼 영향력을 미친 것일까 25%나 되는 그리스도인들의 언어가, 우리 현실과 꼭 맞아 떨어지는 것은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지적이 있습니다.

  예일 대학 역사신학 교수 린드백(George A. Lindbeck)의 진단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이시대의 위기는 서양 문화에서의 성서적 요소의 퇴조, 성서 언어의 퇴조이다. 성서지식을 상실함으로 공중담화가 빈곤해졌다. 예를 들면 우리에겐 더 이상 국가적 목표(곧, 의미, 목적, 문명 따위에 대한 질문)를 표현해 줄 수 있는 없다가 없습니다. 우리는 공리주의나 치료복지론(therapeutic welfare)의 얄팍하고 빈약한 언어로써 원자핵과 생태학적 위기라는 묵시론적 언어를 다루려 합니다. 성서에 대한 친숙함은 한 시대 전만 해도 미국인에게 있었습니다. 세속 지식인들도 니버(Reinhold Niebuhr)에게 흥미와 도전을 발견하기에 충분한 성서적 배경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전 미국인이 킹(Martin Luther King, Jr.)목사의 메시지 속에 있는 성서적 요소에 응답했습니다. 그런데 겨우 25년이 지난 오늘날 그들이 동일한 충격을 줄 수 있을까? 우리 사회는 마치 아라비아 숫자를 잊어버려 할 수 없이 로마 숫자를 사용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미 비기독교인들 뿐만 아니라 기독교인의 문화까지도 탈기독교화 되었고 일반 대화의 언어들은 위험할 정도로 무기력해졌습니다. 교회 내에서 조차도 공동의 언어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예컨데 인종차별을 지지하는 근본주의자들과 그 반대 입장을 취하는 해방신학자들 사이의 언어상의 괴리는 남북전쟁 당시 북부의 복름적 노예 페지론자와 남부의 복음적 반폐지론자 사이를 갈라놓았던 것보다 엄청날 정도로 큽니다. 사회는 전체적으로 그리고 교회도 상당한 정도로, 의사소통불능의 팔다리가 잘린 환자가 되었습니다. 진정한 논증은 불가능합니다. 찬성도 반대도 깊이 있게 음미되지 못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 사회나 문명이 살아 남을 수 있을 지는 의문입니다.” 이는 곧 이 시대의 위기(언어현실)는 성서언어의 퇴조 현상에서 연유한다는 말입니다. 이 시대가 잃어 버린 것 중 주요 상실 품목은 성서언어라는 말입니다. 성경책이 없다거나 성경지식이 부족하다는 말이 아니라 우리가 성경의 신선하고 생명에 찬 부활의 언어를 잊었거나 사용하지 않고 있다는 지적입니다. 이같은 지적은 단지 저 서쪽 동네의 일만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의 문제도 된다고 생각되어집니다. 왜냐하면 오늘 우리 한국교회가 누구랄 것 없이 성경언어를 다시 배우려고 하지 않는다는 점이고, 다시 배우기보다는 망각하는 것이 현재의 주요 흐름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2. 성서언어의 퇴조-그 현상은 어디서 기인하는가?

  첫째는, 근세초에 강조되기 시작한 과학적 사유가 언어보다 사실에 더 강조를 두었다는 것입니다. “먼저 사물(事物)을! 그리고 나서 그 사물(事物)에 대한 표현을!” 근대 교수학의 창시자 라트케(Ratke)는 이렇게 말해습니다. 그후 직관교육(直觀敎育)은 이 사상을 그 기본 원리로 받아들였습니다. 이는 언어를 통해서만 얻은 알찬 지식이///중한 것이며, 언어를 통해 얻은 빈 지식때문에 우리의 영혼은 마치 말의 전시장이나 말의 노점(露店)처럼 되어 버렸다는 ㄱㅅ입니다. “행동이 인간을 가르치고 행동이 인간을 구원한다. 말은 다 치워버려라”라고 페스탈로찌는 말합니다. 물론 이렇게 언어에 붙들리기 싫어한 언어적대관계(言語敵對關係)가 새로운 언어철학의 발전과 언어에 대한 새로운 관심의 결과로 제기된 질문 ‘언어 이전의 그리고 언어와는 상관없이 존립하는 현실이 어떤 것인지?’라는 물음에 답할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한 문제점들이 분명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와같은 반언어적(反言語的)인 주장들은 오늘날까지 큰 영향력을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신앙현실을 예로 들어 살펴보면, 형식적인 언어나 ‘빈 말’현상으로 성경언어를 화석화(化石化)시키고 성경언어를 경화(硬化)시킨 교조주의적 신앙관에 반(反)하여, 감성적인 직관 즉 체험을 통하여 얻은 확신에 굳게 서는 것을 보다 소중히 여기는 신앙운동이 오늘 한 시대를 풍미하고 있습니다.

  둘째는, 성경언어의 부정확성에 대한 회의의 결과입니다. 그러나 성경언어를 이해함에 있어 어느 정도 부정확함은 감수해야 합니다. 성경의 언어와 개념들의 부정확함은 일생동안 성경연구에 몰두한 학자들에게는 짜증나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현시대의 학자들이거나 과거 어떤 시대의 학자들이든지 누구나 인정하는 정확성과 상세함과 완전성의 기준에 맞게끔 기록된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인간의 눈은 순수하게 광학적으로 관찰하면 아주 부정확하고 불완전한 기계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눈은 구체적인 삶의 상황 안에서 여러가지 복잡한 기능을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삶의 기능을 위해서는 그의 광학적인 불완전성이 오히려 큰 장점이라는 것입니다. 성서언어는 구체적이고 다채롭습니다. 그러나 추상적이거나 과학적이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성경언어가 명백한 어떤 정의보다 더 깊은 인상을 우리에게 새겨놓는다. 오히려 우리가 그러한 부정확성을 무리하게 배제하려고 하면 성경언어의 본질을 파괴하게 될 것이다.

  셋째는, 성서언어의 퇴조는 상호배타적 관점을 앞세운 신앙인들의 언어상의 괴리에서 파생된 현상이기도 합니다. 동지가 아니면 모두가 적(適)이라는 세속 흑백논리에 교회마저 물들어 합리적 논증의 조용하고 작은 목소리도, 더 나아가서는 진정한 신앙고백조차도 깊이 있게 음미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오늘날 신앙공동체는 그 스스로를 표현할 공동의 언어를 알지도 못하고 이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논증이 불가능합니다. 찬성도 반대도 깊이 있게 음미되지 못한다. 단지 어떤 깃털의 새인지, 그 말의 억양이 어떠한지만이 소중할 뿐, 그 메시지의 내용과는 전혀 무관한 편견만이 난무할 뿐이다. 예수를 죽이던 자들이 베드로에게 “너도 진실로 그 당이라 네 말소리(your accent)가 너를 표명한다. 하거늘(마 26:73b)"이라고 지적했던 것처럼 우리는 편가르기 세속언어의 포로가 되어 화해와 공존의 성서언어를 상실해버린 것입니다.

  3. 성서언어를 배우라.

  린드벡은 “미래의 교회는 아마도 점점 게토(ghetto)화된 존재가 되어 자그마한 요새와 친구 하나 없는 집단들로 변할 것이다. 그러므로 시온의 언어를 다시 배우는 일은 교회의 시급한 일이다. 그리고 우리는 단순히 하나님께 찬양을 더 잘 드리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 대한 관심에서 이 언어를 배우도록 해야 할 것이다.”라고 경고한다. 비트겐시타인(Wittgenstein)은 “나의 언어의 한계는 나의 세계의 한계”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의 성경언어의 한계는 바로 우리의 신앙의 한계인 것입니다. 우리의 언어 한계는 또한 우리 메시지의 한계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외침이 공허한 메아리 되어 공중에 떠도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것은 그 이유가 바로 성경 언어의 빈곤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신앙인들이 성경언어를 사용하여 성경 자신이 말하는 것처럼 하는 것이 바로 새롭게 발견된 메신져(messenger)인 우리 신앙인의 과제인 것입니다.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그 거주(居住) 속에서 인간은 산다.”라고 말하면서, 말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 모른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18세기를 자연과학의 시대라고 한다면 19세기를 여가학의 시대라고 부를 수 있고, 인문사회과학 뿐만 아니라 자연과학까지도 언어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 20세기 후반을 언어학의 시대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언어란 단순한 표현 수단이 아니고, 인간성의 본질적인 핵심깢 언어의 힘이 관계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가 인간은 언어를 배움으로써 인간이 된다는 정의에 대해 동의한다면 우리는 성경언어를 배우는 일을 결코 외면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 언어를 배우는 일의 소중함을 인정한다 할지라도, 성경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 그 이유는 이상에서 제시한 요인들이 우리의 의식구조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너무도 깊이 세속 언어에 물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마이카 족이 되고 나서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 욕을 하고 사는 줄 몰랐다.”라고 푸념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저는 이 말에 동감합니다. 하루에도 몇 차례씩 봉고차를 몰아야만 목회가 되는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이 문제는 자못 심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어느 하루, 이 감정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까 궁리하다가 한 묘안을 생각해 냈습니다. 순간적으로 솟구친즌 감정을 육두문자 대신 기호로 표현키로 한 것입니다. 이를테면 가장 괘씸한 상대를 만났을 때는 속으로 “너! 1번!”하고 소리치고, 좀 정도가 덜한 상대인 경우는 “너, 2번!” “너, 3번!” 등으로 구분해서 부르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정해 놓고도 그 규칙이 잘 지켜지지 않을뿐더러, 가끔 그렇게 나만 아는 기호를 사용해도 상대편이 알아듣지 못한 방언을 지껄인 까닭에, 별로 속이 시원해지지 않고 때로는 입만 간지러워 견딜 수 없는 지경에 도달하곤 했습니다. 그 시원하고 걸쭉한 육두문자의 유혹 때문에, 그러나 정작 더 큰 문제는 이런 세속 언어에 찌든 봉고차 기사(?)의 한심한 신앙 고백이 여기서만 그치지 않는다는 데에 있습니다. 로마서 1장에 무려 세차례나 하나님께서 ‘내어 버려 두신’ 사형에 해당할 만한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자랑, 비방, 교만 등(롬 1:29~31)을 내 언어의 심연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괴로움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육으로 난 것은 육” (요 3:6a)인 연약한 자신의 모습에 스스로 연민의 정을 느끼기도 하고, 어서속히 이 육신의 장막(벧후1:14b)을 벗어나기를 소망도 해보지만, 이것이 살아서 하는 순교의 일 중 하나라 생각되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고자 소망의 인내를 경주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를 아는 지식에게 자라가라

  저는 늘 성격이 급했고 허물이 많았던 신앙의 선배, 베드로 선생이 우리에게 주신 마지막 말씀을 기억하며 삽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게 자라 가라”(벧후 3:17~18).
  베드로의 신앙의 여정은 곧 성서 언어를 배워가는 신앙인의 여정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베드로가 부활의 예수를 만나기 전 육에 속한 사람, 시몬의 언어를 사용했을 때의 일은 논외로 치더라도, 부활의 언어를 회복한 후에도 사도 바울로 인해 겪게된 고통스런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르우엘 L. 하우는 “사람은 누구나 잠재적인 대립 감정을 가지고 있다. 심지어는 사랑하는 사람들끼리도 이러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라고 말힙니다. 예를 들면, 한때는 자신과 교회를 핍박하는 데 앞장섰던, 원래 열두 제자 가운데 속하지 않았던 한 젊은이-바울의 등장으로 베드로는 한 순간에 사람들의 관심에서 벗어나야만 했고, 또한 갈라디아서 2장이 증거하는 대로 율법과 은혜의 행위에 관한 자신의 태도에 대하여, 젊은 바울에게서 공개 적인 비난을 들어야 했습니다. 그 오순절의 위대한 설교자가 말입니다.
  이에 대해 M. R. 디한은 베드로후서 3장 15절에 나오는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라는 구절을 인용하면서 “이것은 베드로의 생애에서 극히 작은 사건인 것 같지만 오늘날 나는 그 교훈이 얼마나 절실한가를 알고 있다. 육식적인 사람에게는 낮은 자리에 앉은 채 수년 간을 섬기다가 겨우 빛을 좀 보려는 순간, 다른 사람은 위하여 자리를 비켜주는 일이 쉽지 않다. 당신은, 처한 위치에 앉아야만 하고 당신이 앉아야 할 자리에서 젊은이가, 하나님께 쓰임을 받고 잘 해 나가는 것을 보는 것은, 분명 육신적인 사람에게 기쁜 일이 될 수 없다. 그러나 베드로는 겸손의 교훈을 배웠으며 그의 생애의 마지막에서 시기심이나 어떤 상처를 주는 자만심, 분노, 빈정거림을 절대로 나타내지 않고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이라고 말하고 있다.”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이성(理性)으로는 용납할 수 있으나 감정으로는 어쩔 수 없다.”라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제 베드로는 말고의 귀를 자르던 충동적인 모습을 억누르고 용서와 자비의 성경 언어를 배워 익힌 것입니다. 이러한 겸손한 성경 언어는 그가 결코 하루 아침에 터득한 것이 아님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압니다. 파란만장한 그 신앙의 여정- ‘호산나의 열광’,  ‘우리도 함께 죽으러 가자던 의분’, ‘닭 울기 전의 철저한 배신’, ‘결코 정죄치 않는 십자가의 용서’, ‘부활의 감격’, ‘오순절의 권능’, ‘이제 남은 영광스런 순교와 소망의 마라나타’-그 신앙이 고비고비마다 붙잡아 일으켜 주시던 그분의 은혜의 결과임을 그는 고백합니다. 한때 그렇게도 사납고 충동적이며 성급했던 시몬의 이 놀라운 변화는, 세속 언어에 물든 우리에게 한 줄기 소망의 빛임에 틀림 없습니다.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라는 말씀은 자신도 그 은혜 안에서 자라왔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그렇다고 그가 그리스도의 완전한 이르렀다고 자만하는 말씀은 아닙니다. 이 말씀은 아직도 ‘육신의 장막’에 거하고 있는 자신에게도 해당되는 것임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라갑시다. 성서 언어를 배웁시다.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합시다.

  칠전팔기(七顚八起)할지라도 제 십자가를 바로 지고
  골고다의 높은 고개 나도 가게 하옵소서
  
  이런 간절한 기원으로 인내하면서……. 왜냐하면 불신과 증오가 가득한 이 절망의 시대에 시온의 언어만이 소망의 빛이 될 것이며, 그 노래는 우리만 부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기억해야 할 것은 기독교 세계(교회의 문화적 영향력)라는 것은 초대교회가 그들 자신의 공동체 생활과 성서 언어에 충실한 데서 얻어진, 의도하지 않았던 결과였다는 사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