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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 언어로 말하라

2007.11.03 11:44

김성찬 조회 수:3779 추천:124

  성서언어로 말하라

  요즘 세상에 봉이 김선달을 욕하고 나설 만한 사람 별로 없을 것이다. 그 시절 대동강 물 팔아 먹었다는 이야기는 그래도 낭만이고, 사람 사는 재미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전쟁 아닌 전쟁을 치추며 산다. 거기엔 낭만이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름하여, 생수전쟁. 하나님이 주신 이 소중한 자연을 끝없는 탐욕으로 마구 훼손한 인간들에게 그 자연이 철저한 보복을 감행한 것이다. 이제 인간들은 더 이상 팔아 먹을 대동강도 없다. 그래서 페놀이 어쩌구 저쩌구. 그래도 뱀처럼 지혜로운 인간은 지구의 심장에다 가이 없는 작살을 꽂아서, 마지막 남은 습기를 빨아 올린다. 꺼져가는 심지의 가녀린 심연에서. 이래서 오위 나만은 살아 있다고 자부하는 '생수(生水)'가 돈도 되고, 생명도 되고, 이 시대의 기적도 되는가 싶다.

  짧은 목회를 통해 늘 송구스럽고, 감격해 마지 않는 것이 하나 있다면 사실 한없이 부족한 사람을 소위 '주의 종'이라고 받들면서, 무엇 작은 것 하나라도 대접해야 성도의 할 일을 다 한 것으로 생각하시는 분들의 과분한 대접을 받을 때이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약 2년 전 초여름 어느 날, 식사이었다. 집사람이 괜히 싱겁게 웃으면서, 이 물 한번 마셔보라고 맹물(?) 한 잔을 들이 밀었다 "아니, 이게 무슨 물인데?",의아해 하는 나에게 "그런 것은 알 필요 없구요. 물 맛 어때요? 물 맛 좋죠?"라고 되려 반문했다. 연유야 어찌되었건 간에 그 물은 확실히 달랐다. 늘 텁텁하게만 여겨지는 보리차 물에 비하면, 이런 일이 간헐적으로 몇 차례 계속 되던 어느 날 나는 그 물의 출처를 알게 되었다.
  
  그 사연은 이러했다. 우리 교회에 지금까지도 변함없이 충성하시는 여자 성도인 류집사님이라는 분이 계시는데, 그분께서 포천에 있는 'g'기도원엘 자주 가셔서 은혜도 받고 그 기도원의 간증거리인 '능력의 생수'를 한 두 통씩 떠오시는데 바로 그 물을 혼자 드시기 미안해 우리 집에 절반씩 보내시곤 했다는 것이다. 그 사실을 나에게만은 비밀로 해달라고 ! 부탁하시면서. 왜냐하면 행여 이 김목사가 그런 기도원엘 신자들이 다니는 것을 만에 하나 싫어 하면, 괜히 목사님 마음 상하실지 모르기 때문에 그 사실만은 비밀로 해달라고 신신 당부하셨다는 것이다. 그 사실을 알고나자 왠지 가슴이 뭉클해져왔다. 매 주일 그 먼 곳에서 차량도 없이 맨몸으로 반말짜리 통으로 두어개씩을 이고지고 오신다고 생각하니 한편으로는 퍽 마음이 아팠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론, 그 분이 뭔가를 매우 착각하고 계신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나는 늘 한국 성령운동의 기수 이성봉목사님의 신앙전통을 우리 어머님의 뱃 속에서부터 이어받은 사람이고, 이래뵈도 권능과 정열의 부흥운동의 일꾼이 되어 보고자 하는 소망의 사람인데, "허, 우리 류집사님 성경 잘못 보셨구먼,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내가 아무리 삐쩍말랐다고 그래 냉냉한 사변가로만 보신 것인가? 사실 겉다르고 속 다른 사람인데"라고 농반진반 투덜거리며. 그렇게 해서 나는 내 신앙의 진심(?)을 보여주고자 아니, 그 애처러운 헌신에 보답코자 'g'기도원에 발을 들여 놓기 시작했다.

  그 기도원은 놀라운 역사를 나타내 보여주고 있었다. 그 역사에 ? 淪?교계의 시각이 다소 차이가 있으므로, 나는 여기서 그런 부분에 대해선 말을 절제하려고 한다. 다만 그 충격적인 사건은 나에게 굉장한 자극으로 다가왔었다. 그때만 해도 기관목회를 청산한 지 얼마되지 않은 때라서, 목양적 심령을 거의 회복하지 못한 때였었는데, 그 첫 날 그 기도원의 한 광경은 나의 목양적 심령을 서서히 회복시키는 결정적 분수령이 되었다. 입추에 여지없이 꽉 들어 찬 열기 속에서, 방청객 마냥 강단으로부터 한참이나 떨어진 출입구 쪽에 서서 팔짱낀 채 물끄러미 신유의 현장을 쳐다보던 나는,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흘러 내리는 폭포수와 같은 눈물로 뒤범벅이 되어갔다. 그러나 그 눈물은 결코 감격의 눈물이 아니었다. 그 눈물은 회한의 눈물이었다. 사경을 헤메는 자기 남편의 병 낫기를 절규하듯 간구하는 한 여인의 모습을 보면서,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외치는 소위 주의 종이라는 나는 그들에게 아무 것도 줄 수 없는 무기력한 존재라는 사실이 너무도 처절해 난 하염없이 흐느껴 울었던 것이다. 이렇게 나의 무기력함을 처절하게 자인한 후, 예배는 끝났다. 모두들 환한 얼굴로 떼를 지어 식사도 하고 생수? ?긷느라고 분주해 했다. 그 때 문득 한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렇다! 바로 그거다. 그날부터 나는 매 주일 'ㅎ'기도원의 단골 멤버가 되었다. 생수를 길러 오기 위해서였다. 무능한 목사, 서툰 목사인 내가 우리 성도들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몸으로 때우는 일, 즉 맛좋고, 능력 있다는 생수를 공급해 주는 것 밖에는 달리 할만 한 일이 없을 것같아 그 일을 몸으로 실천키로 결심한 것이다. 그런데 그 일도 그리 쉽진 않았다. 처음엔 병약한 성도 몇 가정으로부터 시작했는데 점차 이 가정도 저 가정도 빼놀 수 없는 마음이 되자, 자꾸만 불어나 나중에는 한 말들이 통 서른 개씩을 들어 아파트 15층까지 날라줘야만 했다. 그런 날 밤이 되면 나의 육신은 어김없이 고통을 호소해 왔으나, 나는 그때마다 마음으로 간절히 이 고통을 감사함으로 받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빌곤 했다. 저들에게 아무 것도 줄 것이 없는 목자가 생수라도 공급해 줄 수 있다는 사실을 기뻐하면서. 한 동안을 속죄하는 마음으로 물 배달에 여념없던 어느 하루, 나는 정작 저들에게 필요한 것을 지하수일 뿐인 생수가 아니라, 그들의 심령을 사로잡을 '확신의 언어! '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확신의 언어

  나는 그 무렵 성경말씀 중 4복음서를 집중적으로 다시 읽기 시작하고 있었다. 특히 신유와 기적에 관한 예수님의 능력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이것은 어쩌면 육신적으로 영 죽을 자리에서 구원함을 받은 나의 신앙체험이 기반된, 육신적으로 연약한 자들에 대한 영적 연민의 발로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무엇보다 더 시급한 듯 여겨진 현세적 육신의 구원이 우리 안에서도 가능함을 만 천하에 보여줌으로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널리 증거 되기를 간절히 기원하는 심정으로 말씀 속의 확신을 얻고자 한 것이다.

  그런데 생수목회(?)를 하고 있던 시절이라서인지 몰라도, 왠지 자꾸 물에 관한 기사에만 더 큰 관심이 일어났다. '물이 변하여 포도주 된 갈릴리 가나의 사건', '바다의 큰 놀을 잔잔케 하신 일', '물 위를 걷던 베드로', '베데스다 못', '생수되신 주님과 사마리아 여인'등.

  그런데 하루는 요한복음 4장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 관한 기사를 읽다가, 28절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라는 말씀이 눈길에 머물게 되었다. 물을 길르러 왔다가 물도 긷지 않고 그냥 동네로 뛰어 간 여인. 물뜨러 기도원에 갔다가 물 긷는 ! 것 조차 잊어 버리고 돌아온 신도. 본말이 전도된 듯한 이 일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뙤악볕에 물길르러 온 여인에게 물보다 더 소중한 것을 무엇이었을까? 눈에 뵈고, 손으로 붙잡아 볼 수 있는 그것보다 더 소중한 것이 무엇이었을까? 물질보다, 한 통의 생수보다 더 소중한 것은? 나는 그 무렵 다시 목 마를 이 물로는 결코 충족되지 아니한 그들의 영적 기갈을 어렴풋이 감지하고 있었다. 그들이 나의 목양적 순정에 감사해 하는 누 빛 속에서도. 목자인 내가 그들에게 줘야할 가장 소중한 것은 한 통의 지하수가 아니었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그녀의 영적 실상을 깨달아 알게 해 주고, "내가 주는 물을 먹는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소망의 확신을 말해 주신 예수의 말씀 속에 그 비밀이 감추어져 있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확신의 언어'-이성적 사고의 비늘을 벗고 나자 성경은 온통 이 '확신의 언어'로 가득 차 있음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저 유명한 요한복음서의 7대(大) "에고에이미"말씀-"나는~이다" 라는 자기계시 양식(樣式)은 '확신을 주는자'의 정언(定言)적 선언이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다" (요 6:35.48.51), "나는 세상의 빛이다" (요 8:12), "나는 선한 목자다" (요 10:11),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요 11:25,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요 14:6), "나는 참 포도나무다" (요 15:1). 그리고 성서에 나타난 신앙행위는 단순히 주관적이거나 정서적인 감정의 표현행위가 아닌 '확신을 주는 자 '에게 압도당하여 우리 전체를 그에게 위탁하는 전인적 응답행위였던 것이다.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아구까지 채우니", "네 아들이 살았다-그 사람이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나를 따라 오너라-저희가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인간은 확신을 가질 때 그의 모든 삶에서 변화를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막 9:23). 우리 기독교의 신앙언어는 인간 삶의 전 영역에 있어서의 궁극적인 확신을 다루고 있으며, 그 확신의 여부가 영생과 영벌, 기적과 파멸, 승리와 패배를 결정 짓는 독특한 양상을 띠고 있음을 나타내 보? ㈐斂?있다. 그러므로 모든 신앙의 언어는 확신에 대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오늘 우리 교회나 성도들은 과연 어떤 언어를 사용 하는가? T.V에서 방영하는 무슨 퀴즈게임을 시청하다 보면 가끔 난해한 질문에 대해 '...인 것 같은데요'라고 대답하는 경우를 대하게 된다. 그럴 경우 어김없이 사회자는 난색을 표명하면서 "확실히 답하십시오. ...인 것 같습니까? ...입니까?"라고 재차 반문한다.

  "예수가 당신의 구주인 것 같습니까? 아니면 예수가 당신의 구주이십니까?" "당신은 성도인 것 같습니까? 아니면 확실히 성도입니까?" "예수는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인 것 같습니까? 예수는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입니까?" 성경은 예수의 진리되심은 물론이고, 윤리-도덕적 명령도 "서로 사랑하라" (요 13:34) "가서 너도 이와같이 하라" (눅 10:37)는 정언적 명령을 사용하고 있다. 성경은 이렇게 확신의 언어로 가득하다.

  확신의 언어로 말하라

  모르간(Morgan)은, 행동은 유동적이어서 구속력이 없지만 그러나 말은 감옥과 같아서 사람을 붙든다고 했다. 무게 있고 책임있는 구체적인 말은 곧 결단을 의미하고 결단은 하나의 현실을 이룩한다. 일정한 상황 아래서 일정한 조건에 들어 맞는 구체적인 말은 때때로 사람들의 정열에 불을 붙이고 특수한 역명적 상황 아래서 대중을 자극하여 행동하게 하는 무섭고 위험한 힘을 갖고 있다.

  "그를 십자가에 처형하라! !"
  "Crucify Him !, Crucify!. Crucify!."

  그날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하기를 요구했던 우매한 민중의 말의 폭력이 오늘도 난무하고 있다. 회의와 불신, 분석과 해체, 허무와 공허의 언어로. "성서의 언어와 개념들을 현대인들에게 적합한 언어로 바꾸라!"는 비신화화의 구호가 우리의 확신의 언어를 봉쇄 하고 있다. 구라파를 정복하고, 아메리카를 정복하고, 이제는 서서히 '촌놈종교'인 우리의 순수한 신앙까지 상당 부분 잠식해 들어 왔다. 학문이라는 그럴듯한 가면을 쓰고 상아탑을 통해서.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성서언어는 부정확하나, 이러한 성서언어가 명백한 어떤 정의보다 더 싶은 감화를 준다는 점이다. 강철 같! 은 확신을 주며, 만물을 소생케하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죽었던 땅에서 라일락을 피워 내는 4월의 언어인 것이다.

  확신의 언어로 말하라! 한 때는 한 비자(婢子) 앞에서도 우물쭈물 진리되신 예수를 부인하던 베드로가 확신의 언어를 구사하여 생명을 살렸던 광경을 상상해 보라. 사도행정 3장은 제 구시 기도 시간에 성전으로 기도하러 올라 가던 두 제자의 등장으로 시작된다. 곧 이어 장면이 바뀌면서 한 거렁뱅이가 등장한다. 이 두 부류의 사람은 그들의 겉모습에서도 차이를 느낄 수 있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언어였다. '체념의 언어와 학신의 언어.'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3절)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자의 언어는 체념의 언어였다. 나 같은 병신이, 그에게 정작 필요한 것(일어나 걷는 것)이 이젠 무엇인지도 모를 만큼된 절망의 만성화-거기엔 묵시론적 비전이 없었다. 그러나 부활의 증인 베드로의 언어는 그것과는 확실히 달랐다. 십자가 상의 예수 앞에서 우물거렸던 회색언어가 아니었다. 명백하고 힘찬 확신의 언어였다.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6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 손으로 만져보았고, 내 눈으로 보았고, 내 귀로 들은 바 된 것을 확신있게 표현한 것이다. "뛰기도 하고 걷기도 하며 하나님을 참미하니" (8절) 확신의 언어는 기적의 언어였던 것이다. 기적을 이루자. 성경 언어로 말하자. 우리를 확신시키신 그분의 언어-그 확신의 언어로,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불신의 사람들에게,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나니"(롬 10: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