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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신학 - 갈라디아서 2장에 대한 명상

2008.01.28 21:15

김성찬 조회 수:2261 추천:134

1872년 미국
남 감리교 피어스(Pierce)감독은 목회자의 신학교육 무용론을 주장 하면서 “내가 들은 가장 위대한 설교의 설교자는 대학을 전혀 가지 않은 자”라고 하면서  “신학교육에 투자되는 모든 돈은 감리교에 해가 될 것이다. 나에게 만약 백만불의 돈이 있다면 신학교육을 위하여는 십센트도 투자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는 “신학교육으로 남 감리교가 덕 볼것이 없고, 오히려 해가 되며, 많은 이단의 원인이 되며, 바람직하지 못한 설교가 나오며, 체험적 신앙을 거부하는 신학교의 형식주의가 교회의 신앙을 파괴 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1992년 서울
기독교대한감리회 서울연회 재판위원회는 지난 5월 7일 오후3시 금란교회 본당에서 열린 재판에서 감신대 변선환학장과 동교 홍정수교수등 2명에게  종교다원주의, 육체의 부활 부인등의 이유로 교단 법상 최고형인 ‘출교’를 선언 했다.

리차드 니버(H.R.Niebuhr)는 “오늘날 여러 신학교에서 일어나고 있는 많은 혼란과 불확실성은 이 공동체 즉 교회에 대한 정확성이 결여 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하면서, 신학교는 ‘학문적 센터’이지만 이 학문은 교회의 현실을 전혀 외면할 수 없다고 말한다.더 나아가 신학교가 ‘학문적 센터’일 뿐만 아니라( 결국 신학교란 그 안에 잠재해 있는 ‘반 교회적’(Anti - Ecclesiastical)인 선입견을 버리는 순간) 신학교는 온 교회의 하나님과 이웃의 사랑에 대한 의미를 지적으로 추구해 가는 ‘교회의 센터’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바로 이런 사실을 신학교가 망각한데서 신학교육과 교회 사이의 깊은 단절이 파생된다고 지적한다.

신학교와 교회의 관계는 뼈와 살의 관계이다. 따라서 신학교육에 의하여 교회의 신학과 신앙의 형태가 형성되어 진다. 이런 인식의 결과로 한국교회는 해방 이후로 ‘신학의 몽매주의’에 대한 비판과 각성을 통해 신학교육의 중요성을 깨닫기 시작했고, 교회의 신학화를 돕는 길은 신학교의 교회화가 아니라 신학교의 책임 있는 학문화에 있음을 인정해 왔던 것이다. 이 결과 목회자의 교육수준이 향상 되었고, 한국교회가 균형잡힌 신앙인을 양성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게 되었음을 부인 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교회는 신학의 학문적 자유, 교회의 모습과 목회방향에 대한 비판과 교정의 자유를 보장하고 지켜 주어야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목회자의 신학교육 수준의 향상이 교회발전과 목회현장에 큰 공헌을 한 것과 함께 부정적인 의미에서도 큰 파문을 일으키고 있음을 부인키 어려울 것이다. 에밀 브룬너의 지적대로 “영원한 신학이란 없다”라는 전제 아래서 보면, 변천하는 사회속에 있는 교회의 그 당면한 문제들에 대해 신학은 거듭 자신의 논리를 비판하고 새로운 문제들을 성경과 신앙고백에 의해 논구(論究) 해야함이 마땅한 일일 것이다. 왜냐하면 신학은 신학이 거룩한 진리를 가리키는 요한의 손가락과 같은 것이지 결코 영원 불변한 것이라고 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현대신학이 발견한 신학적 진실 - 지상의 어느 신학도 일방적이며 잠정적인 나그네의 신학(theologia viatorum)에 불과하다는 견해는 자칫하면 신앙에 대한 진리의 상대화로 빠질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그 단적인 한 예가 오늘의 감리교 사태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이 문제는 신학이 교회의 한 기능이며, 그 궁극적 목적이 교회를 섬기는데 있는 학문이라는 사실을 다소 망각한 발상에서 기인되고 있다고 생각되어진다. 교회가 그 생명을 걸고 지키고자 투쟁해 왔고, 절대시하는 복음의 진리와 그에 대한  순수한 열정을 전적으로 무시해 버린 처사인 것이다. 그동안 어렵사리 교회의 신앙과 신학교육이 서로 인내하면서 조화를 이루어 온 상호 공존의 토대를 한 순간에 무너뜨리고 극한 대치로 치닫게한 감리교 사태는 한국교회를 뜻하지 않는 신앙적 독선과 신학적 허무주의에 빠뜨려 버리고만 것이다. 그래서 흥분과 변명이 난무하고 있다. 서로가 진리안에 서 있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거기에 옳고 그름은 없는가? 아우성과 상호 비방 뿐인가?

그렇지 않다. 신앙의 눈으로 살펴 보면 거기에는 분명히 이 사태를 통해서 말씀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메시지가 있음을 발견할 수가 있을 것이다. 시한부 종말론자들이 우리에게 재림신앙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던 것처럼, 이번 감리교 사태 또한 모든것  길된 절망의 시대에 우리가 결코 망각해선 아니될 복음의 진리와 복음의 진리를 지키는 신앙인의 자세가 어떠 해야 하는지를 다시 상기 시켜 주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바울이 갈라디아교회에 보낸 편지는 그 적절한 해답을 제시 한다.  메릴 테니(Merrill Tenney)박사는 “갈라디아서가 기술되지 않았더라면 기독교란 단지 또 하나의 유대교 분파에 불과했을지도 모르며, 서구의 사상은 전적으로 이교적인 것이 되어 버렸을지도 모른다”라고 말한다. 이런 관점에서 갈라디아서는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복음의 진리를 지키는 자들의 신앙하는 태도들을 여러 각도에서 잘 보여 주고 있다.“신앙은 태도(attitude)다”라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하나, 베드로의 어정쩡함과  바울의 단호함(2:11-12)

유대교의 영향으로 아직 유대인으로 살고 있던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들은 이방인들이 크리스찬이 되려면 우선 할례를 받음으로써 먼저 유대인부터 되어야 한다는 사고 방식에 젖어 있었다. 그러나 베드로는 고넬료와 가졌던 경험(행 10:)으로 이방인도 개종하여 성령의 능력을 받을 수 있음을 확신케 되었다. 이 일 후에 베드로는 이방 기독교인들과 교제를 나누기 시작했고,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를 나누었다. 그후 베드로가 안디옥을 방문했을 때에도 그는 바울이 세운 전례를 따라 이방인들과 더불어 식사를 나누므로(습관적으로),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인 사랑의 축제에 연합하는 뜨거운 형제애를 나타내 보였던 것이다. 그러던 그가 유대에서 훨씬 엄격한 강경파 유대인들이 도착하자 바나바까지 설득하여 이방인들과 함께 나누던 자리에서 슬그머니 떠나 물러나고 말았던 것이다. 구차한 이유를 대면서 작전상 후퇴를 하고 만 것이다.

그래서 두 사도가 정면으로 충돌한 것이다.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할 일이 있기로 내가 저를 면책하였노라 ”(갈2:11). 베드로와 바울은 둘 다 기독교인들이었고, 사도들이었고, 교회의 존경을 받았으며,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권위를 부여 받은 자들이었다. 그런데 바울은 베드로가 그의 ‘어정쩡한’ 행동으로 은혜의 복음을 파기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 ‘어정쩡한 행동’이 바울을 흥분 시켰던 것이다. 11절의 “면책하였다”는 단어는 누구를 대항하여 반대 입장을 취했다는 뜻이다. 이 단어는 다른 쪽이 먼저 공격을 가해올 때 이에 대해 방어의 입장에 서는 것을 가리킨다. 복음의 진리에 대한 ‘어정쩡함.’ 이것이 베드로의 도발이었다. 은혜의 복음에 대한 공격이었던 것이다.

이 행동이 바울의 ‘단호한’ 대응을 촉발 시켰던 것이다. 만일 바울에게 복음의 진리를 사수함에 있어서의 이 ‘단호함’이 없었더라면 갈라디아서도 없었을 것이고, 기독교란 단지 또 하나의 유대교 분파에 불과 했을지도 모르며, 서구의 사상은 전적으로 이교적인 것이 되어 버렸을지도 모른다. 바울은  사도중의 우두머리인 베드로 선생에게 조차도 우리의 상식을 초월한 ‘단호함’을 나타내 보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공개적으로 많은 사람들 앞에서 신랄하게 베드로를 비난하고 책망 했던 것이다. 장소도 적절치 않았고 태도도 공손치 못했음을 볼 수 있다. 절차상에도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요즘 우리의 신앙을 혼란케 하는 감리교 사태에 대해 일반 신문은 물론이고 교계신문과 잡지들 조차도 그 판결의 절차상의 하자(?)를 들먹이면서 교회 지도자들이 지나치게 흥분하고 감정적인 대처를 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있다.본질에 대해서는 침묵하면서, 변명만 장황하게 늘어 놓으면서.

둘, 솔직한 수용 - 베드로가 위대한 사도인 까닭(2:11-21; 벧후3:15)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라. 그렇게 신랄하게 공개적으로 모욕을 당한 베드로선생 조차도 우리가 아는한  바울의 그 면책을 말없이 받아들였던 것이다. 어찌 그 우두머리 사도 베드로가 바울을 배격할 수 있는 어떤 ‘모임’을 결성할 힘이 없었겠는가? 굳이 하고자 한다면 왜 자기 입장을 변명할 수 없었겠는가? 더군다나 그 강경한 유대주의자들이 전에 바울이 디모데를 데려다가 할례를 베풀어준 사건(행16:1-3)을 물고 늘어 지면서, 바울도 이방인의 할례를 인정한 것 아니냐(바울은 의와 구원을 얻는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유대인들에게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하려고 할례를 베풀었다/그러나 본질에 충실치 못하고 상황에 치우친 행위의 결과로 그가 곤혹스런 비방을 받게된 빌미를 제공한 것임)고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말하면서 그들을 설득(유혹)했던 것을 기억 하면서도, 말씀 앞에 정직하게 선 베드로 사도는 바울의 약점과 무례함과 절차와 방법상의 하자를 결코 나무라지 않았던 것이다.

스스로 반성을 했고(그는 자신의 잘못을 쉽게 뉘우칠줄 아는 이였음을 예수 부인 사건을 통해서도 볼 수 있다) 바울이 그럴 수 밖에 없었음을 인정 했다. 왜냐하면 그 사안의 중대함을 곧 바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의 행위에 대한 바울의 공개적 면책을 바로 자신이 어떻게 받아 들이는가의 여부가 이제 막 일어서려는 초대 교회의 존립 여부를 가름하는 한 시금석이었음을 성령의 책망하시는 은총속에서 발견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 감리교 사태를 보면 도데체 어느편이 ‘복음의 진리’를 말하고 있는 편인지를 알 수 없도록 혼란만을 조성하고 있는 듯하다. 그들이 진정한 신앙고백이 있다면 도저히 그렇게 말해서는 안될 사안을 함부로 발설해 놓고도, 목사들이 무식해서 그렇다고 매도해 버리고 있다. 그러나 사실 그들이 우리의 용기 있는 믿음에 분노하고 있는 것이다.

무슨 이야기인고 하니,  키어케고어(Soren Aabye Kierkegaard)는 그의 저서 ‘죽음에 이르는 병(病)’에서 “사람이 기독교에 대하여 분노를 갖게 되는 것은, 기독교가 너무 고상하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목표가 인간의 목표는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면서, 이런 예화를 사용하고 있다. “한 빈한한 날품팔이 일꾼에게 한 황제가 심부름꾼을 보내어 그를 사위로 삼겠다고 했을 때, 황제의 분에 넘치는 호의를 그의 두뇌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때, 그에게 필요한 것은 그 약속을 믿고 신뢰할 수 있는 겸허한 용기인데, 이럴 경우 이런 용기를 갖고 있는 날품팔이 일꾼이 얼마나 있을까?”라고 물으면서 “그러나 이런 용기를 갖고 있지 않는 자는 분노하게 되며, 그것은 너무 고상하며,이해할 수 없고 그러므로 그런 약속을 믿는다는 것은 자신에게는 바보짓으로 여겨진다라고  말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 복음의 진리는 세상 초등학문에 근거한 유.무식의 일이 아니다. 너무 값싸고, 단순하고, 고상해서 오히려 이해할 수 없는 그래서 그 약속을 믿고 신뢰할 수 있는 ‘겸허한 용기’만을 요청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가말리엘 문하생이었던 사도 바울도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 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3:8-9)라고 말씀하지 않았던가?  성경이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지를 믿음의 눈으로 살펴 보라.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잠1:7). 조직신학의 대가이긴 하지만, 성서신학의 세계적 권위자이긴 하지만 예수는 안 믿어! 어찌 이런 말이 떠도는가 말이다. 겸허한 모국어를 배우라! 이 위대한 사도 베드로가 ‘복음의 진리’ 앞에 적라라하게 선 모습을 상상해보라! 거기 한점도 없던 변명. 그래서 ‘말씀이 말씀되는 역사’를 이룬 것이다.

셋, 무너지는 도미노패 - 바나바(2:13)

그런데 여기서 놓칠수 없는 또 하나의 문제는 이 사태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이 사건에 대한 태도이다. “남은 유대인들도 저와 같이 외식 하므로 바나바도 저희의 외식에 유혹 되었느니라”(2:13). 마치 연쇄적으로 무너지는 도미노패처럼 베드로의 실수는 남은 유대인들의 실수를 유발했고 마침내 바나바도 넘어지게 만들었다. 바나바는 이방의 중심지인 구브로 출신이었고,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는 선교 프로그램에 바울과 함께 가담하고 있었으므로 그를 넘어뜨리려는 외압이 매우 컸을 것이다. 문제의 심각성이 여기에 있다. 진리를 왜곡하고, 진리에서는 벗어난 감리교 신학교 두 교수의 신앙고백(?)이 베드로의 ‘어정쩡한’ 행동에 동조한 바나바 같은 이들을 이 땅에 양산 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이 일에 제일 먼저 자진해서 앞장 서는 집단이 언론매체를 주무르고 있는 집단들이다. 일부 언론매체들은 이 사건을 ‘종교재판(?)’ 운운하면서 마치 그들의 주장이 ‘진리’이고, 성경적인 것 처럼 여론을 오도하고 있다.  한마디로 교권에 핍박 당하고 있는 진리(?)연 하고 홍보하고 있다. 물론 교권 운운 할 수도 있다. 교권조차도 때때로 비진리에 서기도 했기 떄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 교권이 이 사건에서 만큼은 ‘성경적인 입장’에 굳게 서 있다고 생각하며, 그래서 무척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또한 일부 신학교(수)들도 예외는 아니다. 얼마전에 한국 신학계의 보수주의 신학의 맹장이라고 이름할 수 있는 모교수(우리 교단 신학자가 아님)와 이런 문제에 대해 이야기 하다가  “저렇게 교계 언론에서 조차도 뭐가뭔지 모를 혼란만 조성하고 있는데, 왜 교수님께서는 목사들이 공부를 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면서도 이런 문제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공개적으로 제시하시지 않습니까?”라고 여쭈었더니 “같은 동료 교수의 입장에서,학문의 자유 수호라는 이유 때문에”라고 대답했다. 동료애를 나무랄 사람은 없다. ‘학문의 자유’를 무시하자는 것도 결코 아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안에 거하는 ‘진정한 자유자’는 그 학문의 자유에 대한 책임과 한계를 분명히 알고 있을 것이다.

또 그들이 이 재판이 충분한 학문적 토론을 거치지 않았다고 불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이 주장하는 신학이란 이미 서구의 낡은 신학이요, 그 신학으로는 진리가 살아 숨쉴수 없고, 교회의 생명력을 약화 시켜 구라파의 교회를 문닫게 했고 미국의 교회를 문닫게 했던, 그래서 이미 검증이 다 끝난 신학임을 만천하가 다 알고 있다. 그리고 신학이 형성 발전된 역사적, 교회적 동기가 이단논박과 세례고백과 성경연구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단논박을 해야할 신학이 오히려 이단성발언을 서슴치 않고 있으며, 마땅히 성경에 기초해야할 신학이 오히려 비성경적이라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말씀에 기초하지 않고 몇몇 신학자의 저술에나 근거를 두는,‘신학을 위한 신학’을 가지고 토론하고 논쟁한다는 것이 도대체 우리 교회의 신앙을 위해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감신대 사태는 시한부종말론 보다 훨씬 더 큰 문제를 안고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시한부종말론은 거칠고 투박하며 일시적이어서 쉽게 그 폐해와 이단성이 두드러지지만, 학문적 권위로 포장한 거짓 교리는 좀처럼 그 속살을 들어내 보이지 않고 학문이라는 미명 아래 나름대로 자기방어 능력을 갖추고 있기에 쉽게 그 문제점이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종국엔 누룩처럼 교회 전체를 부패 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의 지도자를 양육해야할 교단 신학자의 신학적 입장과 신학하는 자세가 중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신학한다는 것이 어떤 학문적 발전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어떤 입장에서 배워온 신학이건간에 그 신학과  분명히 살아 있는 이땅의 교회의 신앙이 복음적 진리안에서 일치를 모색하는 겸허하고 진지한 연구가 선행 되어야할 것이다.

또 어떤 이들은 목회자들의 이런 성경적 입장을 반박 하면서, 목회자들이 단지 교회확장에만 혈안이 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비난한다. 그렇다. 목회자들의 관심은 교회의 부흥과 확장에도 있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오늘은 바로 이 복음 ‘오직 예수’의 신앙, ‘성경무오설, 동정녀 탄생,대속의 죽음, 육체의 부활, 임박한 재림’이라는 ‘복음의 진리’를 생명 걸고 지킨 결과이지, 교회의 성장을 위해 이 복음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생명은 진리의 복음안에서만 자랄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내버려둬도 그냥 쑥쑥 자라는 것이 아니다. 한 생명을 양육하고 성장 시킨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인지 모른다. 고난과 무릎으로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이 피와 땀을 흘린 헌신의 열매인 것이다. 갈라디아교회를 어떻게 개척했고, 그 척박한 땅에 복음의 씨가 싹트도록 얼마나 최선 다했는데 그래서 지금까지는 “너희가 달음질을 잘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치 않게 하더냐”(5:7). 바울은 피가 역류하는 분노를 억누를 수 없었을 것이다.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그 방해꾼중의 하나가 사도 베드로였다는 사실 앞에 어찌 분노 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마찬가지로 피와 땀으로 오늘의 부흥을 이룬 목회자들이 복음의 진리를 송두리 채 뿌리에서 부터 말살해 버리려는 자가 목회자를 양성해야 하는 신학교 교수라는 사실에 어찌 흥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펜이 칼보다 강하다’는 속담이 있는데, 섣부른 한 두 신학자의 펜놀림으로 신앙의 최전선에 있는 병사들의 무장을 까닭없이 해제해 버린다면 과연 한국교회의 내일은 어떻게 될까?  이 사태는 매우 심각한 결과를 파생할른지도 모른다.

교회는 이일에 대해 보다 단호하게 대처 해야한다. 바울처럼. 그가 누구인가? 은혜를 알기전에 율법주의자였던 자신을 가리켜 율법으로는 완전한 자라고 자부 했던 사람이 아니었던가? 그런 사람이었기에 이 혼합주의를 결코 간과할수 없었던 것이다. 그럴바에는 무엇하러 예수께서 이땅에 오셔야했고,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셔야 했겠는가?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2:21).  사실 이런 설득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와 다른 복음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의 죽음이 “진정한 타살”이고 “생의 미완결”이며, 예수의 부활이 “평안히 죽지 못하여 한을 품고 떠도는 망령”이며, “모든 종교가 구원의 길이어서 예수만이 구원의 유일한 길일수 없다”는 식의 논리가 그들의 신념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