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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 강력한 평온

2008.11.12 23:12

김성찬 조회 수:3068 추천:41

영혼일기 124: 강력한 평온

2008.11.12(수)



바나바 훈련원.

난 그 신앙공동체를, ‘강력한 평온’이라 명명했다.

'강력'이란 단어는 '부담'이라는 단어와 궁합이 맞다. 그러나 그 공동체에는 '강력한 부담'이란 말이 없다. 그네들은 사람을 윽박지르지 않는다. 강한 것은 항상 부담스럽게, 우리의 심장을 압박하는 것이라는 통념을 깨뜨린, 평온한 강력, 강력한 평온이 그 신앙공동체에는 충만했다.


그 ‘강력한 평온’은 ‘본질에 다가가는’ 강력한 평온이요, ‘겸허하게’ 본질에 다가가는 강력한 평온이었다.


그들은 겸허했다. 겸허히 하나님의 뜻을 받들었다. 그네들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뜻을 겸허하게 받아들인다는 말이 곧, ‘강력’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 앞에서 ‘강력’했다. 내가 사랑했던 모든 것 내려놓는, 그 순명에 ‘강력’했다. 그리고 그 우직한 순명에의 강력은, 그들의 '기도의 강력'에서 우러렀다. 소리 높여 강청하는 강력이 아니라, 그분 앞에서 자신을 티끌 되게 하여, 그분의 의지만을 최대한, 온전히 높이 받드는 겸허한 강력이, 그네들의 기도의 강력이다.       


겸허히 하나님의 뜻을 받드는 그들은 또한 사람들을 겸허히 섬기고 있었다. 자신들의 몸에 익힌 하나님께 대한 순명에의 강력을 그네들은 그 누구에게도 강제하지 않는다. 그네들은 그저 올곧게 앞장 서서 행진할 뿐이다. 목소리를 높이거나, 얼굴을 붉히는 것도 없다. 자신의 의를 드러내지 않는다. 사랑손님을 대하듯 다소곳하고 겸손하다. 그래서 손님네는 고향집에 온 듯 안온하다.

 

메시지는 강력한데, 감촉은 부드럽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네들은 ‘본질’에 대한 관심이 깊다.

본질에 다가가기. 그 강력은 본질에 다가가려는 몸부림으로 강하다. 비 본질이란 화려할 수는 있어도, 결코 강력할  수는 없다. 그 본질은 보편타당하고, 명석 판명하다. 치우침이 없는 진리에 서기. 그것이 홀로서기일지라도, 그래서 광야일지라도, 그 본질에 다가가는 영적 외론 투쟁은 오늘 바나바를 세계화 시켰다. 가장 본질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임을 증거하고 있다.


마르다처럼 비 본질에 분주한, 분주할 뻔 했던 내가, 오늘 마리아 같은 본질에 다가가기로 결단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간섭이라 확신한 연고다.


이런 멋진 말을 이강천 원장님께 들었다. 귀에 쏘옥 들어왔다. 

“파발마처럼 뛰는 것이 아니라, 노닥거리며 하나님과 거니는 삶이 목사의 멋과 여유”라는 멘트였다. 성경에도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이유의 그 첫째가,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막3:14)”려 함이 아니었던가? 교제에 미쁘신 하나님!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고전 1:9).”


그네들은 하나님과의 교제에 능한 기쁨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 기쁨과 멋과 여유를 내 것 삼고 싶다.

그 연서(戀書)의 대상이 되고 싶다.


밤에, 통보를 보냈다.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막10:41-42)


빼앗길 수 없는 좋은 편을 택했노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