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389: 그분 편에 서서

2009.10.03 23:51

김성찬 조회 수:3220 추천:74

영혼일기 389: 그분 편에 서서

2009.10.03(토)

오늘은 추석명절이다. 사람들이 오갔다. 나도 어제부터 오늘 밤 늦은 시간까지 그 어딘가를 오갔다. 명절은 그래서 보름달처럼 밝은 가 보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란 선을 행함과 이웃과 나누는 것이라 하지 않았던가? 그 말씀의 장력이 유럽 연수 이후 더 확장된 건지 난 내 안에서 늘 감사가 넘친 분들에게, 그리고 그동안 내 무사한 맘과는 별개로 내게 대해 스스로 옹이 박혔다 여긴 이들에게도, 나는 그 말씀의 진정성을 구현해 보고자 작은 물질로 사랑을 전했다. 내가 뜻밖이었으니, 그네들은 더 그리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상생의 의지표출이 뜻밖일 수 없다. 뜻이 있었으니 몸이 움직이지 않았겠는가?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행정을 넘어 인정을 나누는 리더의 가슴이 한 공동체를 하나 되게 하고, 하나님의 뜻을 함께 이루는 관솔이라 여겨진다.

이 세상에서는 볼 수 없었던 환상과 신비를 맛보다가 하산했던 변화산의 제자들의 경우처럼, 융프라우 그 순백의 청정 산정에서 하산해 보니, 가슴 아픈 일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먼저 가장 가슴 아픈 사연은 천 년 만에 스올을 탈출하게 되었다고 기뻐했던, 윤집사네가 임대아파트 당첨이 취소됐다는 비보였다. 지금도 가슴이 아리다. 그 깊은 김 권사는 “하나님께서 교횔 더 지키라고 그리하셨는가 보다” 너털웃음으로 넘겼지만, 나는 그 하나님의 깊은 뜻을 알 수가 없다. 임대 아파트 입주 조건에 비해 그 4인 가족의 월 소득이 쬐끔 많다는 이유였단다. 많으면 얼마나 많다고 그 시린 가슴에 대못을 친 걸까? 세상사 별의별 일도 많다. 정말. 무슨 행정이 그 모양인지? 미리 잘 알아보고 통보를 할 것이지, 사람 흥분시켜 놓고 일순 찬물을 끼얹어 버릴 수 있는 건지. 그래도 되는 건지 정말 속상하다. 그들이나 그 누구나, 과연 언제까지 그 스올 속에 묶여있어야 하는 건지? 그 깊이가 얼마나 되는 건지? 이 광속을 운운하는 시대에도 아직도 먼 광명. 끝 간 데 없는 무저갱이 아닐 진데, 설혹 그 품으신 날개 아래일지라도 이젠 숨 막혀 올 그네들의 뒤척이는 밤이 가슴을 저미게 한다. 주여 그들을 구원하소서!

그렇다. 그 혹독한 시련을 어떻게 견뎌냈느냐고 그 주치의가 고(故) 김대중 대통령에게 물었었단다. 그분은 대답했다고 한다. “그 어떤 문제, 어떤 환경일지라도 반드시 양면이 있다. 안 좋은 점과 좋은 점,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 그런데 나는 항상 그 어떤 형편과 처지에서도 좋은 점과 긍정적인 면을 내 것 삼았다.” 그래 그래야지. 그래야 살지. 살아남지. 이 모든 괴로움을 또 다시, 라고 부조리한 삶의 떨고 놓기를 곱씹었던 전혜린은 견디느니, 차라리 모든 관계를 정갈하게 스스로 정리해 버리고 말았지만, 우린 그럴 수가 없고, 그래서도 안 되는 것 아닌가? 알면서도 부아가 치민다.

말씀을 편다.
욥기 1장 13-19절이다. 동방의 의인으로 하늘의 신령한 복과 아들 일곱, 딸 셋에다가 양이 칠천 마리, 낙타 삼천 마리, 소가 오백 겨리, 암나귀 오백 마리에다가 종도 많은, 땅의 기름 진 복까지 누리던 욥이 한 순간에 몰락한 사태를 기록한 말씀이다.

그 끔찍한 사태는 이렇다.

주인이시여, 스바 사람이 갑자기 이르러 소와 나귀를 모조리 강탈해 갔습니다.

그가 아직 말하는 동안에,

하나님의 불이 하늘에서 떨어져 양과 종들을 살라 버렸나이다.

그가 아직 말하는 동안에,

갈대아 사람이 세 무리를 지어 갑자기 낙타에게 달려들어 그것을 빼앗으며 칼로 종들을 죽였나이다.

그가 아직 말하는 동안에,

주인의 자녀들이 그들의 맏아들의 집에서 음식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시는데 거친 들에서 큰 바람이 와서 집 네 모퉁이를 치매 그 청년들 위해 무너지므로 그들이 전멸했나이다.

'그가 아직 말하는 동안에.’×3=0

큰 물결 일어나 나 쉬지 못, 한 아픔 마른하늘의 날 벼락 같은 삼연타석 비보 속에서 욥은,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으로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욥기 1:20-21 라고 말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치 아니하고 하나님을 원망하지 아니하 22절, 였다고 성경은 전한다. 오늘 나에게. 줬다가 다시 뺏는 당신은 뭐하시는 분이냐고 원망과 시비를 일삼고 있는 나에게. 욥의 아내처럼 주둥이가 댓자나 부풀어 있는 나에게.

그와 나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관점의 차이다. 그래 관점이 다르다. 고(故) 김대중 대통령은 매사 긍정적인 1%를 바라봤고, 욥은 ‘하나님의 편에 서서’ 그 끔찍한 사태를 바라봤다. 그런데 나는 안타까운 인간 편에 서서 이 사태들을 대하고 있다. 가난한 자 편에만 서서 향유를 대접받는 예수께 시비를 붙이던 가룟 유다처럼, 내 연민은 그 가련한 인생들 아니 그들의 형편과 처지에 투사한 내 자신에 대한 연민만을 앞세워, 난 그분께 대한 원망과 시비에서 며칠째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다 잡았다가 놓친 물고기 정도에는 비견할 수 없는, 막장 인생들에게 황홀경 자체였을 양지(陽地) 아파트를 허망하게 빼앗겨 버린 인생들의 애통함과 절통함에 난 지금 매몰되어 있다.

근데, 어렴풋한 기억 속에, 그 깊은 기도의 김 권사가 아파트 당첨되었다던 그 주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욥기 1:21” 라는 성구를 감사헌금 봉투 겉봉에 그 달필로 써 넣었던 것 같은 기억이 가물거린다. 그녀는 이미 맘 정리가 됐는데, 제 설움에 우는 조문객처럼, 내 설움에 내가 취해 있단 말인가? 꼭 그렇지 만은 않다. 그 자녀들의 섭섭함을 어떻게 달래야 하나. 하여 안타깝기 그지없다. 그 장문의 감동일기는 또 어떡하라고. 한날, 한날의 일지란 것도 결국 그 한날에 만족할 일지임을 새삼 깨닫는다. 내일을 알 수 없는 눈 먼 인생! ‘그가 아직 말하는 동안에.’ 이 무서운 문구가 삼 연속 연이어지는 일은 정녕 우리 안에선 일지 않기를. 그리고 부디 매사에, 그 어떤 경우에라도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 길.

큰 물결 일어나 나 쉬지 못하나 이 풍랑 인연하여서 더 빨리 갑니다 ♫

이 걷잡을 길 없는 풍랑 속에 뭐가 빨리 가고 있다는 건지?
제발, ‘그분 편에 서서’ 이 모든 것을 바라볼 수 있는 영안이 열리길,
간절히, 간절히, 간절히 기원한다.

------
또, 고소장이 접수됐다. 배부른 놈들! 등 따시고 배부르니 쌈박질만 일삼으려 들지.
얼마나 힘들까? 그는, 그 목자는.
하늘의 가호가 그에게 가득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