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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 멘토(mentor)-거룩한 믿음의 유산

2010.02.14 20:48

김성찬 조회 수:3477 추천:78

영혼일기 500: 멘토(mentor)-거룩한 믿음의 유산
2010.02.14(주일)

멘토 [ Mentor ]


현명하고 신뢰할 수 있는 상담 상대, 지도자, 스승, 선생의 의미로 쓰이는 말.

'멘토'라는 단어는 〈오디세이아 Odyssey〉에 나오는 오디세우스의 충실한 조언자의 이름에서 유래한다. 오딧세이가 트로이 전쟁에 출정하면서 집안 일과 아들 텔레마코스의 교육을 그의 친구인 멘토에게 맡긴다. 오딧세이가 전쟁에서 돌아오기까지 무려 10여 년 동안 멘토는 왕자의 친구, 선생, 상담자, 때로는 아버지가 되어 그를 잘 돌보아 주었다. 이후로 멘토라는 그의 이름은 지혜와 신뢰로 한 사람의 인생을 이끌어 주는 지도자의 동의어로 사용되었다.


즉, 멘토는 현명하고 신뢰할 수 있는 상담 상대, 지도자, 스승, 선생의 의미이다.

멘토의 상대자를 맨티(mantee) 또는 멘토리(mentoree), 프로테제(Protege)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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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실패는 ‘멘토 없음’에 있다. 나는 영육 간에 멘토를 모신 적이 없다. 나는 직립인간답게, 그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이지 않는 자존심을 곧추 세우며, 한 바퀴 생을 독야청청 살아왔다. 나에게 영육간의 멘토가 없음은 운명적일 수도 있으나, 그보다 더 큰 연유는 내 스스로 그 누구도 스승삼지 않는 내 알량한 자존심에 기인한다. 그리고 그 알량한 내 자존심의 근인(近因)은 청소년 시절 적기(適期) 고교진학 실패에 있다.

난 한 해 어린 아이들과 고교생활을 해 왔었다. 난 그 한 해 어린 아이들을 심정적으로 동기로 삼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내 동기생인 한 해 선배 된 친구들을 난 선배로 모실 수 없었다. 허니 그 누구도 내 동기일 수도, 받들어 모셔야 할 선배일 수 없었다. 그 모진 자존심은 화석처럼 내 심사에서 굳어 갔고, 난 그 누구의 권위도 거부하는 특히, 윗권세를 거부하는 제2의 본능을 켜켜이 키워왔다. 그러다가 뒤늦게, 한참이나 뒤늦게 제자들만 한 아이들과 한 교실에서 공부해야 하는 늦깎이 신학생이 되었다. 그랬으니, 내가 그 누구를 멘토로 모실 수 있었겠는가? 그 악순환은 숙명 되어 날 압박해 들어왔고, 그럴수록 더더욱 나는 역린(逆鱗)처럼 제 속살을 파고들기만 했다. 적어도 나보다 더 한 이는 없다. 이런 자기 선언만이 나의 구호였다.

책 속의 위인들은 한 지침이 될 수 있었어도, 삶이 될 수 없었다.
몸에 밴 습관이 될 수 없었다. 능력이 될 수 없었다.

남다른 신앙의 어머니가 계셨으나 어머니는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품는 자였다. 그분의 품안의 자식으로서의 나는 행복했다. 그러나 세상이란, 그 품 안의 안주(安住)만을 허하지 않았다. 집에서 매 한 번 안 맞아 본 나는, 밖에서도 매 맞는 걸 거부했다. 매를 벌 수 밖에 없는 인생이 매 맞는 일에 적절한 응전을 해내지 못한다면, 어찌 직립할 수 있겠는가? 토인비의 역사의 연구까지 인용할 것도 없이 그 매에 효과적인 응전만이 문명을 창출해 낼 수 있다는 경험칙을 난 이제 말할 수 있다.난 불행하게도 아버지를 일찍 여위었다. 난 거세할 아비가 없었다. 거세할 아비 없이 웃자란 나는 마디 없는 대나무처럼 단단할 수 없었다.

아비는 아들의 스파링 파트너다. 아비를 죽이고 아들은 성장한다. 그러나 나는 스파링 파트너를 거치지 않고 곧 바로 사각의 정글로 뛰어든 복서였다. 그러니 얻어터질 수밖에. 대책 없이 얻어터지다 보니 적개심만 더 할 수밖에 없었을 터. 하여 내 눈에 뵈는 모든 사람, 사물이 내 적개심을 유발하는 거세 대상일 뿐이었다. 난 결코 남자와 친할 수가 없었다. 그 어떤 남자도 내 멘토일 수 없었다. 하여 난 멘토가 없다. 그래서 난 실패했다.

멘토가 없었으니, 난 멘토가 될 수도 없다.

삼대(三代)가 잘 먹어야 건강한 후손을 보고, 손자가 할아버지 책에다 똥을 누며 자라야 학자가 나온다는 말이 있다. 멘토 없이 멘토가 될 수 없다는 말이다.

나는 오늘 설날이기도 한 주일 ‘거룩한 믿음의 유산’이라는 제하의 설교를 했다. 본문은 야고보서 3장 13-18절이다.난 예화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오늘 설교는 한 예화에서 본문을 설교의 주제를 이끌어 냈다.

내가 엊그제 영혼일기(498)에 소개한 김태구 원로목사의 삶과 그 자녀손들의 목사 할아버지의 신앙에 대한 증언을 그 예로 삼았다. 믿음의 선포로 현대의학이 포기한 어린 손녀딸을 살려내고, 그 기적을 눈으로 본 그 사위가 학자의 길을 가다가 중도에 목회자의 길로 들어선 진정한 영적 멘토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 딸들에게 NOBLE MAN으로 칭송받고, 그 아내에게 존댓말로 일평생을 대해 온 그 노블한 믿음의 유산을 난 말씀에 비춰 설파했다.

그분은 위에서 난 지혜의 사람이었다. 야고보서는 한 결 같이 기도가 역사하는 힘이 많다고 말하지 않고, 의인의 기도만이 역사하는 힘이 많다(약5:16b)고 강조한다. 의인이란 땅 위의 것(3:15)이 아니라, 위로부터 난 지혜(3:17a)로 사는 자다. 위로부터(from above). 이런 지혜의 시원(始原)인 용어를 우린 쉽게 대하나, 세상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나는 미학인가 그런 과목을 수강한 적이 있었다. 그 강사는 서울대 철학과를 나온 Ph.D였다. 그는 40도 훨씬 나이인데도 독신이었다. 그 독신으로 그는 온갖 사상사를 독파해낸 듯 했다. 박학다식하고, 깊었다. 나는 그 세미나 시간에 어떤 주제로 글을 발표했었다. 그 리포트의 결론에 이르러 나는 ‘위로부터(from above)’란 용어를 자연스레 차용했었다. 그런데 그 탁월한 인문학자이자, 문학평론가인 그가 ‘위로부터(from above)’라는 용어를 매우 신기해했다. 그는 그런 관점을 학문적으로 처음대하는 듯했다. 오히려 내가 더 의아해 했다. 그랬다. 그는 그 위로부터 난 지혜에 대해 무지한 것이 틀림없었다. 내 앞에서 성경을 학문적으로 수차례 인용했던 그가 그 성경이 말하고 있는 ‘위로부터(from above)’나는 구원과 지혜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그 용어를 학문적 호기심으로 대하며, 매우 신선해 했다. 그리고 그는 그 이후 그 ‘위로부터(from above) 남’에 대한 영적 호기심을 반드시 충족시키려 노력할 것이라는 생각을 나는 하게 됐다. 이는 나의 바람이기도 하지만, 그의 바람일 것이기에.

이야기가 좀 옆으로 샜다. 야고보 선생은 말한다. 믿음의 기도에 응답이 있는 것이 아니라, ‘순결한’ 믿음의 기도에 응답이 있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그 순결함이란 위로부터 오는 지혜의 산물이라고 부연한다. 그러나 위에서 오는 지혜는 우선 순결하고 다음으로 평화스럽고, 친절하고, 온순하고, 자비와 선한 열매가 풍성하고, 편견과 위선이 없습니다(3:17).

한 마디로 NOBLE하다는 말이다. 그 아내와 자녀 손들에게 ‘NOBLE’하다는 칭송을 받는 목사 할아버지이기에, 그 자녀 손들은 그 언뜻 동의하기 어려운, “이 아이는 기도로 낳을 것이다.” 선포 한마디에 즉각적으로 순종했고, 기적을 맛보았던 것이다. 그 귀한 영육간의 멘토를 할아버지로 모신 그 가정은 ‘선한 열매가 풍성’함을 만천하게 증언하고 있다.

이것이 ‘거룩한 믿음의 유산’이다.

그 거룩한 믿음의 유산을 자녀 손들에게 몸소 적립해 놓고 계시는, 목사 할아버지는 오늘도 그 자녀 손들에게 필요에 따라, 적기에 적절한 한 마디 성구를 선물하심으로, 그 거룩한 믿음의 유산을 그 자녀 손들의 심비에 새겨 놓고 계신다. 자신의 생명을 거룩한 믿음의 기도로 건져주신 영적 멘토 목사 할아버지의 삶과 모범을 전수받는 그녀의 손녀딸은, 그녀 역시 그 어떤 이의 영적 멘토가 되어있음을 본다.
“철없던 어린 시절가 반항하던 사춘기, 성년이 된 21세의 저를 돌아보면, 할아버지께서 저에게 물려 주셨던 신유의 역사를 이제야 제가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할 때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믿음과 기도는 저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제가 기도하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주어지는 것을 봅니다. 신유의 역사는 믿음으로만 나타납니다. 진실 되게 밤낮으로 드리는 기도가 실제적인 삶에 적용되는 것이 나의 존재의 이유입니다.”-강수정(외손녀) University of California, Riverside, 철학과 4학년-


그렇다. 멘토는 멘토를 낳는다.

거룩한 믿음의 유산이 그 유산을 낳고, 낳았다.
성결한 믿음의 양육으로 순결한 믿음의 화답을 얻는 이 복락!


나의 아버지 거세의 본능이 순적한 절차를 거치지 못해 왜곡 된 결과, 나는 세상과 그 세상의 중심인 수컷들과 늘 불화했다. 그 상처는 덧나고, 덧났다. 멘토 없이 웃자란 난 분봉왕 노릇만 하려고 했다.

지난 한 회기 나는 그 분봉왕 노릇을 할 수 있었다. 신나고 즐거웠다. 어떤 이해력 없는 이들은 목회적 낭비라고 비아냥댔겠지만, 난 나를 치유하는, 회복하는 반전의 기회로 삼았다. 일정하게 성공했다. 성취도 이뤘다. 왕이 되거나, 칩거하거나. 둘 중 하나여야만 존재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내 DNA가 활발하게 작동했었다. 난 그렇게 날 치유했고, 일정한 회복을 거뒀다. 그리고 홀로 독야청청하면서 남달리 살아야 하는, 내면화 된 내 도덕적 자긍심이 일정부분 그 실천을 통해 보상되기도 했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멘토가 없다.

한 회기를 마치고 돌아 선 엊그제, 후배가 ‘형님이라고 불러도 괜찮냐’고 문자로 물어왔다. 난 ‘네’라고 답했다. 그러나 엄밀히 noyes다. 왜냐하면 나는 형님노릇이 뭔지를 모른다. 그 ‘형님’이라는 용어 속에 함축 된, 전천후(全天候), 전방위적 멘토라는 말이 내겐 여전히 낯설기 때문이다.

형님으로 살아 본적도, 형님을 모셔 본 적도 없다.
멘토가 없으니, 멘토될 수도 없다.

난 여전히 땅에 속하고, 육신에 속하고, 악마에 속한 지혜(3:15)에 매몰되어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한 치도 안 되는 이 내 마음속에 지독한 시기심과 경쟁심과 자기자랑과 진리를 거슬러 속이는 궤변(3:14)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그분도 그랬을까?김태구 원로목사님은 그의 설교집 『온전한 구원과 거룩한 생활』중, 제2장 거룩한 생활 그 첫머리에,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훌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야고보서 3:17-, 말씀을 소개하고 있다.

그분은 구순이 다되어가는 나이에도, 그분은 위에서 난 지혜를 구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그 후배들에게 그 지혜를 구하라고 당부하고 있다.

거룩한 믿음의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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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산에 올라갈 자,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이 성결한 자이며, 성결한 자는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아니하는 자라고 하나님께서 말씀 하시기에, 오늘도 이 귀한 성결의 복음 앞에 옷깃을 여미며 고개를 숙입니다.

인생을 살며 또 목회를 하며 시행착오도 여러 번 있었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외로이 서 있었을 때에도 아버지는 “ 나는 너의 남편이 기도하는 사람이기에 걱정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기도 하는 자의 하나님이시다 ” 하시며 주위 사람들의 걱정, 우려가 있을 지라도 홀로 독야청청 믿어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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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요한 믿음의 대선배이신 목사님이신 아버지께서 신학과 교리를 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진정 겸손한 모습으로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애를 구하시는 모습에서 참으로 아버지의 겸손함과 순수함을 유산으로 받길 갈망하여 기도하였습니다. 성결한 삶을 사시고 하나님과 친밀함 관계를 가지신 아버지를 저는 감히 예수님을 닮았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김성희(Lynn Kim, 다섯째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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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께서 주신 큰 교훈은 할아버지께서는 매일의 삶을 통하여 모든 면에 저에게 본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열다섯 명이나 되는 많은 손자 손녀들에게도 늘 한 명 한 명에게 관심을 가지시고, 이해하시고, 사랑하십니다. 매해 성탄절마다 각 손자 손녀에게 성탄 카드를 주셨는데, 각 카드마다 다 다른 성경말씀을 적어 주셨습니다.

정말 놀랍고 감탄스러운 것은 매 성탄절마다 그 많은 손자 손녀들에게 각자에게 맞는 카드에 또 각자에게 적절한 성경 구절을 손수 뽑으셔서 정성껏 적어서 주시곤 하십니다.


2006년 겨울, 제가 결혼하기 3개월 전의 성탄절에는 할아버지에게서 ‘아가서’ 가 담긴 성구의 카드를 받았고, 그 다음 해 성탄절에는 창세기1장 28절의 “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 는 말씀을 써 주셨습니다.

이런 돌보심과 관심은 기도해 주실 때도 한결같으십니다. 할아버지께서는 저희를 위해서 기도를 많이 해주셨습니다. 우리가 할아버지 댁을 방문할 때마다 우리들이 떠날 때 꼭 시간을 내시어 우리 손을 붙잡고 간절한 기도를 해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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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유산은 곧 우리 할아버지는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고 정직하게 사신 참 하나님의 사람이시며 참 신앙인이셨다는 것을 우리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확신합니다. 우리 할아버지와 함께 우리는 모두 한 하나님의 가족이며, 그리스도의 지체임을...


권동희(외손녀)

University of California, Berkeley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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