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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패널토의 /진행 김성찬

2015.01.28 22:24

김성찬 조회 수:2999 추천:50

패널토의 /진행 김성찬

시작 멘트

내가 진행을 맡게 된 배경

크게 3 가지

1. 지난 회기 총회 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으로 3년간 봉사

2012.11.22. 한국성결교회 초기역사의 배경에 대한 심포지움

루터,칼빈 넘어 완성된 계시 속에서 중생성결신유재림 온전한 복음이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에 참석자들이 자긍심으로 들 뜬 사건

2. 지난학기 성결고전읽기 강의하면서, 내가 성결교회 목사가 아니었다는 사실 확인, 반성

3. 이 시대의 희망이 무엇인가? 라는 물음을 줄기차게 묻고 있던 양동춘 교육부장님의 고뇌를 배덕만, 박찬희 목사교수와 함께 나눌 기회를 얻게 되면서, 자연스레 이 자리에 서게 되었음.

진행

1부 패널 토의 – 오후 7시-8시~8시20

두 분 목사교수님들에게 묻고 싶은 것, 더 듣고 싶은 것 듣는 시간

2부 그룹토의 – 오후 8시 10분~9시 30분

8인 1조로 그룹토의 주제에 맞는, 참여 학습을 통한 토의와 결단의 시간

남녀 구분

마지막 조별 발표

1부 패널토의 (회중석의 질문 내용 받기/ 직접 묻기)

박찬희/배덕만 목사교수 패널리스트 김홍찬 이용수 김석기 목사 외

MY 멘트

세월호, 성결행동의 리더 박찬희 박사는, 사회적 성결의 첨병

배덕만 성결의 생활화를 위해 교회현장에서 몸부림치는 현장의 신학자. 리얼한 프락시스.

詩낭독/단어를 찾아서-단어가 없다 그러나 있다. 희망이 없다. 희망이 있다. 성결이 희마잉다.

패널들의 강의에 대한 느낌 한 마디 씩 –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는 메시지

회중석의 한, 두 분 느낌(소감) 받기

묻고 답하기

우리에게 성결은 구호일 뿐인가? 현실진단 질문 –김홍찬

-웨슬리가 지나치게 낭만적인 인사가 아닌가?

-진정한 회심이 있는가? -웨슬리의 네 번의 회심

웨슬리가 그리스도의 완전에 이르기까지 그에게 네 번의 중요한 회심이 있었다. 종교적 회심, 신앙적 회심, 성령의 사람으로서의 회심 그리고 영혼구원에 눈 뜬 사명의 회심이 바로 그거다.

성결 교회 목사로서의 성결교회에 대한 자긍심이 없다. 교회 간판에 성결 이라는 교단 명칭을 빼고 싶어한다.

성결이 능력 되어야 하는 이유-이용수

-성령의 은사 강조 시기를 지난 정결로 승화 되기

성결 복음의 생활화/ 행동화 - 김석기

박찬희 교수에게/낯설고, 위험한 세월호 사태로 촉발 된 ‘성결행동’을 해오면서 느낀 보람과 아픔에 대하여

배덕만 교수에게 /

-영성이란 단어에서 혼합주의적인 냄새가 난다. 대체 용어가 없는가?

-성결교회의 성화론이란, 수도사들에게나 가능한 Life goal로써는 가능할 뿐이다.

-통합적 영성에 대해 짧게 한마디

-웨슬리를 알면 알수록 귀한 분, 오늘에 절대로 필요한 분

이런 지식과 의식이 성결교회 목사들에게 없다. 장로교 2중대로 족해 한다.

성결교회 강단의 ‘온전한 복음’ 회복을 위한 조언 – 회복 책- 읽을 책, 아니

-기립박수 마더 테레사 -하버드대

이인복 연대 의대 채플 – 이 땅에 창녀가 사라질 때까지 얼굴에 분칠 안한다.

-사랑을 실천/행동화하는 차원에서

북한에 쌀 보내는 일에 대한 입장은

-왜 교회가 존재해야 하는지?

마지막 멘트

조지 왓슨은 그의 저서『성결』에서 '거룩한 증언'이 성화(聖化)에 이르는 지름길이라고 말한다.

 

《구속의 은총에 대한 구두적 증언의 필요성, 특권 그리고 권능에 대해서 성경은 매우 분명하고 또 풍성하게 말씀하고 있다. /……/ 말 못하는 그리스도인은 죽은 그리스도인이다. 소리가 나지 않는 교회는 영이 없는 교회다. 소리가 들리지 않는 성결은 공허한 성결이다. 대제사장이 방울을 울리지 않으면, 그는 살아서 밖으로 나와 석류 열매를 보여주지 못할 것이다. /……/ 과학적이고 웅변적인 설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 안에서 행하신 것을 말하는 바로 그것이 그 당시 사람들을 각성시켰고, 지금도 그럴 것이다.》

 

왓슨의 이런 경구를 더 새겨 본다.

"수많은 사람들이 마음의 정결을 분명하고도 지속적으로 '고백'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을 잃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 피가 우리의 죄를 이기었고, 그것에 대해 증거 하는 말은 세상을 이기었다."

배덕만 교수에게 질문

배덕만 교수는, 기독교 주류세력들의 이런 공세가 만만치 않다고 했다.

“순간적인 성화? 그렇다면 성화 된 증거를 지금 보여 주라.”

 

즉각적 순간적 성화의 증거를 그네들은 성결교회,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추구하는 이들에게 요구하고 있다.

 

그 누가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이 땅에서 완전한 성결이 가능하단 말이냐?

자범죄를 넘어 인간 본성의 부패성인 원죄를 다 해결했단 말이냐?

당신이 성화 되었단 말이냐?

 

이렇게 따져 묻고 있지만, 정작 성결교회 목회자나 성도들 중 그 누구도, 당당하게 나는 성화를 이룬 존재라고 말하고 나설 이들이 거의 없다는 말이다.

 

감리교는 점진적 성화를 말하고, 오순절은 방언 등 은사로 성령 체험을 보여줬지만, 아침 안개처럼 미국 교회사에서 반짝이다 사라진 웨슬리안 복음주의는, 그 한계로 역사에서 자취를 감췄다는 말이다.

 

그래서 성결교회의 성화론이란, 수도사들에게나 가능한 Life goal로써는 가능할 뿐이다. 너무 이상적이어서 결국 회중들의 동의를 얻을 수 없었다. 한국 성결교회도 사중복음의 마틴 랩, 조지 왓슨 그리고 이명직 이후로, 조종남의 웨슬리 신학으로 넘어가 버렸다. 그런데 이제 다시 꺼진 불씨 살려내듯, 사중복음을 재론하고 있다. 다시 성결 신학은 사중복음과 웨슬리 신학 사이의 논쟁의 한 복판에 섰다.

 

그러나 우리는 당신이 성화 된 존재임을 보여 달라고 말하는 이들에게, 대답할 말이 궁하다고, 우리 신앙의 전통을 버릴 수 없다. 그래 지금 여기서 우리가 당당하게 성화 된 증거를 보여 주기가 어렵다. 그 누가 감히 내가 성화 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어렵다. 우리가 말하는 성화가.

 

러나 그래도 인간 본성에 대한 비관론에 동의하는 것은 당연한 복음적 입장이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비관론에 까지 동의할 수는 없지 않은가. 하나님의 은총이 대한 낙관론에 서서, 이 땅에서도 죄를 이기는 성결한 삶을 살아 보려는 관점과 목표에 믿음의 쟁투가 필요한 것 아닐까?

 

그것이 시대가 요구하는 시의 적절한 복음적 입장이다. 이제 오순절의 은사 시대를 넘어 사랑으로 성화를 보여 줘야 하는 시기가 도래했다. 이것이 이 시대의 요구다. 그래서 이 시대는 성결교회의 시대다. 성결 복음은 한마디로 사랑이다. 온전한 성결은 사랑이다. 이 시대는 은사 중심의 고린도전서 12장을 넘어 고린도전서 13장 사랑장으로 교회가 넘어가야 한다고 말한다.

 

오늘의 성결 신학을 체계화 하는데 학문적 기여를 해 온, 조종남 전 서울신대 총장은 지난 2011년 서울신학대학교(총장 유석성 박사) 개교 100주년을 기념해 열린 성결신학 학술대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국 성결교의 교리가 영국의 종교개혁자 존 웨슬리(1703∼1791)의 성결론에서 시작됐으며, 그것을 사회적 성결로 확대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성결이 성경의 도리이자 온전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의 교리, 하나님 나라 백성의 기초요 자격”이라면서 “웨슬리의 위대한 유산은 교회부흥과 사회봉사의 원동력이 됐으며, 오늘 우리에게도 강력한 도전을 주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렇다. 사회적 성결의 성서적 기초는 ‘사랑’이다. 우리는 성경 신구약에서 공히 사랑의 명령을 받는다. 다음은 구약에 나타 난 두 가지 사랑의 명령이다. 첫째, 하나님 사랑이다. 신명기6:5에서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명령하셨다. 둘째, 사람사랑이다. 레위기19:18에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고 명령하셨다. 구약의 이 두 계명을 예수님께서는 하나의 “큰 계명”으로 묶으셨다. 마태복음 22:37-40(막 12:28-34; 눅 10:25-28)이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온전한 성결(Entire Sanctification)’은 사랑이다.

 

사랑으로 살라.

사랑으로 살 수밖에 없는 성화,

단순한 믿음으로 이룬 온전한 성결을 살라.

어렵지만, 증거가 확실하지는 않지만,

낭만주의자 웨슬리

웨슬리 낭만적

그러나 웨슬리는 매우 낭만적이다. 원죄나 내적인 죄는 타락 이후에 첨가 된 ‘죄성’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의 죄성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고, 덧붙은 것이기에 인간 본성으로부터 제거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인간 본성의 전적 타락과 하나님의 은총에 의한 온전한 성화를 웨슬리는 믿었다. 이는 인간 본성에 대해서는 비관적이나 하나님의 은총에 대해서는 낙관적인 견해다. 하나님의 은총에 의한 타락의 극복 즉 현재적 삶 속에서 완전한 성화를 웨슬리는 강조했다. 정리해 보자면 웨슬리는 1)모든 사람은 구원받을 필요가 있다. 2)모든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다. 3)모든 사람이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다. 4)모든 사람이 완전 성화를 얻을 수 있다(웨슬리안 전통주의(Wesleyan Oethodoxy)의 4대 교리(Methodist Four Alls))고 말한다.

모든 사람이 완전 성화를 얻을 수 있다.”

얼마나 낭만적이고, 당당한 신앙 목표며, 고백인가. 그는 규칙장이(Methodist)답게, 성경에 계시 된 완전 교리를 발견하고, 그 완전 성화를 이루기 위해 규칙적인 성경적 탐구와 신앙적 고뇌 그리고 열정을 쏟는 데 게으르지 않았다. 그는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이룬 자로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완전에 이를 성경적 근거와 확증 그리고 그 확증에 기반한 성결한 삶을 살도록 가르치는 일에, 그 일생을 바쳤다. 그는 그 사명을 위해 일생을 바친 노작(勞作)『그리스도인의 완전』을 가리켜 “내가 1725년부터 1765년에 이르는 40년 간 믿고 가르쳐 온 완전의 전체요, 총체다”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쉽게 동의가 안 될 뿐만 아니라, 따라가지니 숨이 막힌다. 그가 오른 산을 정말 높다. 등정할 엄두도 나지 않는다. 나는 여전히 그냥 죄 가운데 살다가, 마지막 순간에 그 사죄의 은총을 빌며 갈 수밖에 없다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게 내 한계를 아는, 당신 앞에 솔직한 존재로 서는 것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결백증적인 자기 한계 선언이다. 그 완전이 절대적인 완전도 무죄적 완전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잘못을 넘어 고의적인 죄를 범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서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나에게 웨슬리는 그의 책, 『그리스도인의 완전』에서 책망하며, 권면한다.

“사람들의 영적 생활에 발전이 없는 하나의 원인은 그들 자신이 냉담하고 등한하고 믿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은 실로 여러 해 전부터 나의 견해였습니다. 이것이 다름 아닌 믿는 자에 대한 얘기니 딱한 노릇입니다.”

 

“그리스도의 영께서 모든 일에 우리에게 바른 판단을 허락하시고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우리를 가득히 채우사(엡3:19)" 우리로 "온전히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약1:4)"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웨슬리가 그리스도의 완전에 이르기까지 그에게 네 번의 중요한 회심이 있었다.

종교적 회심, 신앙적 회심, 성령의 사람으로서의 회심 그리고 영혼구원에 눈 뜬 사명의 회심이 바로 그거다. 그는 완전에 이르기 위해 복음적 고뇌와 열망을 한 순간도 포기해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온전한 성화를 위해 부단한 영적 분투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외로웠고, 높고, 깊었다.

당당한, 오만해 보이기까지 한 완전에의 욕망.

그 맹렬한 실천이 이 시간, 내 심령을 울린다.

완전에 이르는 거룩한 야망을 이루라.

성령이 촉구하시는 말씀이다.

내키지도 않고, 어찌할 바도 알지 못하는

나 같이 부패한 실존에게.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