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활천 보나요?
2008.01.27 20:43
신년 호 리뷰 원고청탁을 받는 순간, 작년 총회에서 교단의 수장되는 분이 “누가 활천 보나요?”라고 무심코 내뱉던 속말이 생각났다. 신학교 시절 교내 축제 때, 필자는 우연히 성주산 자락을 거닐다가 백일장 대회에 끼어들어 즉흥 시 한편을 읊어댔다. 시제(詩題)가 ‘활천’이었다. 이유인즉슨, 바로 그 성주산 자락 백일장 터에 말라버린 ‘복천(福泉)’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말라버린 ‘복천’더러 ‘활천(活泉)’이 되라는 메시지를 형상화했다. 그런데 바로 그 성주산 자락 선지동산에서 열린 성총회에서 ‘활천’이 공개적으로 무안을 당하고 있었다.
신년 호 활천을 손에 쥐었다. 그러나, 한정된 지면 관계로 이런 저런 전반적 리뷰는 할 수 없다. 그래서 신년 호에 나타 난 우리 신앙의 정체성 회복이라는 편집 방향에 대해서만 짧게 언급하기로 한다.
이상과 같은 관점으로 비교평가를 하기 위해 먼저, 지난 해 2007년도 신년호를 클릭해 봤다. 그 신년 벽두부터 다시, 한 개인의 단편적 신학 이념에 입각하여 길면 잘라 내버리고, 짧으면 늘어뜨려 처단해 버리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처럼 기획 상품 찍어내듯, 그 어떤 이들에게는 복음의 왜곡자라는 위험한 판정을, 또 작위적 콘티에 따라 자기 취향에 맞는 그 어떤 이에게는 낯 붉어지는 면죄부를 부여하는 식의 설교행위의 총체성이 배제된 소위 설교비평이란 이름의 무모한 도발이 교단지(敎團誌) 활천에 까지 무분별하게 연이어지며 한 판 신명을 누렸다. 그리고 그런, 현장목회적 교회론이 올바르게 정립되지도 못한 아류들이 필자연 하며 활천을 휘젓고 다녔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교회는 외면했고, 그런 논객들이 활개를 치던 활천에 침묵하던 다수는 교단 신학(앙) 정체성을 혼란시킨 이해할 수 없는 편집의도에 내심 매우 불안해하고, 불만스러워 했다.
그 메마른 복천(福泉)에 활천(活泉)의 오늘이 있다
그리고 오늘, 2008년도 신년 호 표지에 뽑아 올린 ‘그 순간 - 성결의 은혜가’ 라는 글 제목이 눈에 띄며, 다시 편집주간의 결의에 찬 음성이 귓전을 때린다.
“사중복음의 저변화(底邊化)를 모색해 보고자 합니다.”
난 속으로 답했다.
‘그 저변화(底邊化)가 쉽지 않을 텐데…….’
교계 신앙잡지 중 최대의 발행부수를 자랑하는 ‘신앙계’는 오중복음을 저변화한 잡지다. 이는, 그 잡지가 오중복음의 저변화를 모색한 결과 그 성취를 이루었다는 말이 아니다. ‘신앙계’는 그 살아 있는 오중복음의 복천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그 복된 은혜를 문자화하기가 바쁜 그릇이다. 그 산 샘에서 흘러나오는 오중복음의 체험적 고백들을 ‘신앙계’가 널리 저변화하는 도구가 되었다는 말이다. 이런 관점에서 사중복음의 저변화는 활천 편집자의 모색만으로는 역부족이다. 우리의 복천이 말라 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 성결교단이 사중복음의 신앙화를 억제한 역사적 과오 속에 ‘활천’이라는 매체가 우뚝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선교 초기의 그 신비적 열광을 유교적 메스로 재단하고, 성령의 역사마저 편협하게 다룬 교조주의적 도구가 ‘활천’이 아니었던가? 그래서, 활천은 ‘그 순간-성결의 은혜가’라는 제목에 걸 맞는 필자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단절적 변혁으로서의 성결(령)체험이 구두선에 그친 우리 교단역사에 비추어 봤을 때 말이다.
그런데, 해체주의적인 386세대들이 물러가는 지금 2008년 신년 호는, 우리의 본디 신앙적 정체성을 회복하려는 방향으로 물꼬를 틀고 있다. 고무적인 일이다. 중생 · 성결 · 신유 · 재림. 이 ‘사중복음의 저변화’라는 신년 호 편집 목적과 방향은 ‘영원성이 내재된 과거적 미래의 회복’이라는 관점에서 매우 적절하다. 우리의 프락시스(Praxis)는 고등 신학적 우월논쟁에서가 아니라, 바닥에서 그 신비를 맛 본 이들의 성령 체험 고백이어야 한다. 활천은 죽은 문자의 저장고가 아니라 성령이 살아 역사하는 말씀체험 산실이어야만 한다.
우리의 복천을 일과성 허섭스레기들로 봉해 버리지 말라. 그 성주산 복천을 활천 되게 하라. ‘사중복음의 저변화’는 활천 편집진의 몫이 아니다. 바로 활천 구독자들인 우리 현장의 신학자인 목회자들과 체험적 평신도들의 몫이다. 이 일을 위해서는 우리 교회들이 먼저 사중복음을 육화해야 하고, 그 체험들을 문자화하여 ‘사중복음의 저변화(底邊化)’에 기여해야만 한다. 제발 고상한, 신학적 운운하는 이들에게 주눅 들지 말고 당당하게, 서슴없이 그 체험을 토해 내라. 그 성령충만의 감격적 체험이 강물을 이루게 하라. 작품 없이 평론이 있을 수 없듯, 현장 없는 이론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현장에 활천이 늘 자리해야 한다. 발로 뛰는 편집. 이 일을 위해 인적 지원도 아끼지 말라. 더 이상 사변적 사중복음 논쟁이 아닌 신앙화 되고, 생활화 된 사중복음의 저변화(底邊化)를 위하여.
신년 호 활천을 손에 쥐었다. 그러나, 한정된 지면 관계로 이런 저런 전반적 리뷰는 할 수 없다. 그래서 신년 호에 나타 난 우리 신앙의 정체성 회복이라는 편집 방향에 대해서만 짧게 언급하기로 한다.
이상과 같은 관점으로 비교평가를 하기 위해 먼저, 지난 해 2007년도 신년호를 클릭해 봤다. 그 신년 벽두부터 다시, 한 개인의 단편적 신학 이념에 입각하여 길면 잘라 내버리고, 짧으면 늘어뜨려 처단해 버리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처럼 기획 상품 찍어내듯, 그 어떤 이들에게는 복음의 왜곡자라는 위험한 판정을, 또 작위적 콘티에 따라 자기 취향에 맞는 그 어떤 이에게는 낯 붉어지는 면죄부를 부여하는 식의 설교행위의 총체성이 배제된 소위 설교비평이란 이름의 무모한 도발이 교단지(敎團誌) 활천에 까지 무분별하게 연이어지며 한 판 신명을 누렸다. 그리고 그런, 현장목회적 교회론이 올바르게 정립되지도 못한 아류들이 필자연 하며 활천을 휘젓고 다녔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교회는 외면했고, 그런 논객들이 활개를 치던 활천에 침묵하던 다수는 교단 신학(앙) 정체성을 혼란시킨 이해할 수 없는 편집의도에 내심 매우 불안해하고, 불만스러워 했다.
그 메마른 복천(福泉)에 활천(活泉)의 오늘이 있다
그리고 오늘, 2008년도 신년 호 표지에 뽑아 올린 ‘그 순간 - 성결의 은혜가’ 라는 글 제목이 눈에 띄며, 다시 편집주간의 결의에 찬 음성이 귓전을 때린다.
“사중복음의 저변화(底邊化)를 모색해 보고자 합니다.”
난 속으로 답했다.
‘그 저변화(底邊化)가 쉽지 않을 텐데…….’
교계 신앙잡지 중 최대의 발행부수를 자랑하는 ‘신앙계’는 오중복음을 저변화한 잡지다. 이는, 그 잡지가 오중복음의 저변화를 모색한 결과 그 성취를 이루었다는 말이 아니다. ‘신앙계’는 그 살아 있는 오중복음의 복천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그 복된 은혜를 문자화하기가 바쁜 그릇이다. 그 산 샘에서 흘러나오는 오중복음의 체험적 고백들을 ‘신앙계’가 널리 저변화하는 도구가 되었다는 말이다. 이런 관점에서 사중복음의 저변화는 활천 편집자의 모색만으로는 역부족이다. 우리의 복천이 말라 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 성결교단이 사중복음의 신앙화를 억제한 역사적 과오 속에 ‘활천’이라는 매체가 우뚝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선교 초기의 그 신비적 열광을 유교적 메스로 재단하고, 성령의 역사마저 편협하게 다룬 교조주의적 도구가 ‘활천’이 아니었던가? 그래서, 활천은 ‘그 순간-성결의 은혜가’라는 제목에 걸 맞는 필자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단절적 변혁으로서의 성결(령)체험이 구두선에 그친 우리 교단역사에 비추어 봤을 때 말이다.
그런데, 해체주의적인 386세대들이 물러가는 지금 2008년 신년 호는, 우리의 본디 신앙적 정체성을 회복하려는 방향으로 물꼬를 틀고 있다. 고무적인 일이다. 중생 · 성결 · 신유 · 재림. 이 ‘사중복음의 저변화’라는 신년 호 편집 목적과 방향은 ‘영원성이 내재된 과거적 미래의 회복’이라는 관점에서 매우 적절하다. 우리의 프락시스(Praxis)는 고등 신학적 우월논쟁에서가 아니라, 바닥에서 그 신비를 맛 본 이들의 성령 체험 고백이어야 한다. 활천은 죽은 문자의 저장고가 아니라 성령이 살아 역사하는 말씀체험 산실이어야만 한다.
우리의 복천을 일과성 허섭스레기들로 봉해 버리지 말라. 그 성주산 복천을 활천 되게 하라. ‘사중복음의 저변화’는 활천 편집진의 몫이 아니다. 바로 활천 구독자들인 우리 현장의 신학자인 목회자들과 체험적 평신도들의 몫이다. 이 일을 위해서는 우리 교회들이 먼저 사중복음을 육화해야 하고, 그 체험들을 문자화하여 ‘사중복음의 저변화(底邊化)’에 기여해야만 한다. 제발 고상한, 신학적 운운하는 이들에게 주눅 들지 말고 당당하게, 서슴없이 그 체험을 토해 내라. 그 성령충만의 감격적 체험이 강물을 이루게 하라. 작품 없이 평론이 있을 수 없듯, 현장 없는 이론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현장에 활천이 늘 자리해야 한다. 발로 뛰는 편집. 이 일을 위해 인적 지원도 아끼지 말라. 더 이상 사변적 사중복음 논쟁이 아닌 신앙화 되고, 생활화 된 사중복음의 저변화(底邊化)를 위하여.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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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우
2008.01.28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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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나눔
2008.01.28 14:21
퇴임하는 지도자에게하는 고언도 아니고,
부임하는 지도자에게 하는 고언도 아니고
맘대로 자르고 붙이고하는 엿장수에게 하는 고언도 아니고
다같이 모두 잘 해보자는 님의 고언
귀가 있고 눈이 있는자는 제대로 듣고 보았으면 하네요
그리고
총체적인 새로운 변혁만이 활천이 활천이 되리라
믿어집니다. -
김성찬
2008.01.28 21:22
어제 활천 주간과 긴, 시린 통화를 했습니다.
이상의 2008년 2월호 활천에 게재된 제 글에, 그들이 가필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년 호에 나타 난 우리 신앙의 정체성 회복이라는 편집 방향에 대해서만 짧게 언급하기로 한다.
이상과 같은 관점으로 비교평가를 하기 위해 먼저, 지난 해 2007년도 신년호를 클릭해 봤다. 그 신년 벽두부터 다시, 한 개인의 단편적 신학 이념에 입각하여 길면 잘라 내버리고, 짧으면 늘어뜨려 처단해 버리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처럼 기획 상품 찍어내듯, 그 어떤 이들에게는 복음의 왜곡자라는 위험한 판정을, 또 작위적 콘티에 따라 자기 취향에 맞는 그 어떤 이에게는 낯 붉어지는 면죄부를 부여하는 식의 설교행위의 총체성이 배제된 소위 설교비평이란 이름의 무모한 도발이 교단지(敎團誌) 활천에 까지 무분별하게 연이어지며 한 판 신명을 누렸다. 그리고 그런, 현장목회적 교회론이 올바르게 정립되지도 못한 아류들이 필자연 하며 활천을 휘젓고 다녔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교회는 외면했고, 그런 논객들이 활개를 치던 활천에 침묵하던 다수는 교단 신학(앙) 정체성을 혼란시킨 이해할 수 없는 편집의도에 내심 매우 불안해하고, 불만스러워 했다." 라는 문단 뒤에
"(용서하시라. 이는 단지 내 느낌일 뿐이다.)" 라는 굴욕적인(?) 사족을 임의로 달아 놓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덧칠이 우리 교단신학(앙)의 정체성이 뭐냐라고 물으며, 교단신학의 정체성을 바로 확립하라는 권고를 모호하게, 희화화시켜 버린 것입니다.
저는 그 문단에서 말하고자 하는 깊은 뜻을 편집진들이 몰라서 그랬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밝혀 둘 것은, 편집 주간의 해명대로 '인신공격성' 운운 하는 것에 저는 전혀 동의하지 않습니다.
저는 공익적 입장에서 2007년 신년호 '설교비평' 그 대상들과 글을 평가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적어도 우리 교단잡지인 '활천'의 편집방향이 자유주의적이고, 혼합주의적이며, 현장목회적 교회관에 바로 서 있지 못한 이들에 의해 유린 당하는 것을 결코 참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저는 제가 쓴 바로 이상의 문단의 내용과 자구, 한자 한자에 대한 객관적 평가 기준과 합당한 근거 자료를 가지고 있습니다.(제시할 수 있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써 내려 간 글이 아닙니다.
-저의 교회와 신학에 대한 입장과 성경적 견해를 알고 싶으시다면,
이 홈피 신학연구 란에
이 글을 계기로 올린
'교회와 신학 - 갈라디아서 2장 명상'을 한번 꼭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
그리고, 더 나아가 이 글의 말미에, "이 글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음을 밝혀 둡니다.-편집자주." 라는 꼬릿말을 편집진은 덧붙여 놓았습니다. 절 두번 죽이는 거예요. 이런 유행어가 생각났습니다.
마감 사흘 앞두고 청탁받은 원고였지만, 문서보내기를 클릭하기 전에 몇차례나 퇴고를 거듭했었는데.
교단 잡지 편집 실무자들의 고충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편집 방향이 이 글의 논조와 같지 않는다면, 사중복음의 저변화를 어떻게 일구어 낼 것인지가 궁금(?)해 집니다. 제 글에 대해 제가 자평한다는 것은 온당치 않을지 몰라도, 저는 우리 교단이 바로 이 글에서 제가 제시하는 실천적 방향으로 나아가야만 한다고 굳게 믿습니다. 그러니까, 활천은 바로 이 글이 강조하는 바에 활천의 편집 방점이 찍혀야 된다는 말입니다.
섭섭해서가 아니라, 이 길이 교단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살리는 길이기에 이렇게
다시, 심심한 권면을 활천 편집진에게 드립니다.
활천 주간 홍목사님
수고에 늘 감사드립니다.
섭섭해 하지 마시고, 활천과 교단을 극렬히 아끼는 사람의 애정표현으로 셈해 주십시오.
샬롬. -
글과 저자에 대한
2008.01.28 21:43
활천이 아니라 할(割)천이로세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젊은 얘들 글도 아니고 평생을 글써온 중년 목회자의 글에다 이따위 문구를 넣어서 소신없고 자신없는 경박한 글로 만들다니... 이건 정말 사과해야할 일입니다.
요즘은 하도 신문이나 인터넷 잡지에 글싣고 교회행사나 자랑거리를 실어서 미리 전정을 준비하는 재빠른 피알목회자가 많아서 그런지 활천도 글이 넘쳐나나봅니다. 활천이 아니라 할천이 되고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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