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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타와 아마존의 눈물

2010.03.09 10:35

김성찬 조회 수:2221

고미숙의 行설水설(2010.3.9화 경향신문 35면

아바타>와 <아마존의 눈물>의 공통점은? 둘 다 에콜로지, 곧 인간과 자연의 공생을 주제로 삼았다는 것. 맞다. 그럼, 차이점은? 하나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고 다른 하나는 TV 다큐멘터리라는 것. 틀렸다. 사실이 아니라는 게 아니라, 그런 뻔한 사항은 굳이 차이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럼? 그게 아니라도, 차이점은 꽤 많다. 무엇보다 에콜로지에 대한 시각 자체가 완전히 다르다. 먼저, 아바타에 나오는 판도라의 행성은 자연이 아니다. 자연은 그렇게 신비하지도, 아름답지도 않다. 자연이란 무엇인가? ‘스스로 그러함’이다.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음, 그것을 일러 자연이라 한다.

인간·자연 이분법에 빠진 아바타

자연을 아주 특별한 환경으로 규정하게 된 건 ‘Nature’를 번역하면서부터다. 그 저변에 인간과 자연의 날카로운 단절과 소외가 자리하고 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므로 아바타는 자연이 아니라, 자연에 대한 인간의 판타지를 극대화한 작품이다. 하여, 아무도 아바타를 보고 에콜로지를 사유하지 않는다. 다만 영화기술의 눈부신 진화에 대해 감탄할 따름이다. 그리고 이제 꿈꿀 것이다. 판도라의 행성 같은 곳이 있다면 좋겠다고. 인간/자연, 지구/별, 문명/원시 - 이런 식의 이분법을 심화시킨 것이야말로 아바타가 ‘에콜로지에 반하는’ 작품이라는 결정적 증거다. 에콜로지란 그런 특별한 시공간을 갈망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자기’가 서있는 곳을 청정하게 만드는 것이다.

아마존의 눈물에도 아마존의 대자연이 펼쳐진다. 거기엔 어떤 그래픽도, 특수효과도 없다. 하지만 아마존은 그 자체로 충분히 경이롭다. 그리고 그때 인간과 자연은 구별되지 않는다. 원시부족의 삶과 아마존이라는 시공간은 그 자체로 하나다. 아마존이 그렇듯이, 그들의 삶 역시 그 자체로 충만하다.

가장 인상깊은 장면. 아마존 최후의 원시부족 조에족의 얼짱 ‘모닌’. 그가 카리스마 넘치는 기술로 야생동물을 사냥해온다. 사냥에 참여하는 건 자유지만, 분배에는 부족 전체가 다 참여한다. 모닌은 고기를 분배하기 위해 장고에 장고를 거듭한다. 하지만, 어디서건 불평분자는 있는 법. 한 사람이 단단히 삐쳤다. 그때 그들이 하는 유화책은 떼로 몰려가 간지럼태우기. 오홋! 증여와 유머의 경제학이라고나 할까. 어떤 제도나 시스템보다도 지혜롭지 않은가. 그래서인가. 담당 PD에 따르면, 그들처럼 많이 웃는 부족은 처음이라고 한다. 절대로 필요 이상을 취하지 않고, 능력에 따라 사냥을 하되 그 성과는 다 함께 나누는 삶. 이것이 곧 자연이다. 여기선 인간과 자연의 공생이라는 말도 불필요하다. 생명 그 자체의 유동성이 있을 뿐! 아바타가 인간/자연의 지독한 이분법에 빠져 있다면, 아마존의 눈물에는 인간과 아마존의 경계 자체가 지워져 있다. 이것이 둘의 결정적 차이점이다.

아마존, 그 자체가 경이의 대자연

물론 뚜렷한 공통점이 하나 있다. 문명은 지금 심각한 질병상태에 있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판도라에서건 아마존에서건 문명은 폭력과 질병, 분쟁만을 이식한다. 대체 왜? 잉여에 대한 갈망 때문이다. 문명의 척도는 오직 가시적인 물질에 있다. 존재와 세계를 온통 이 척도 하나로 뒤덮어버릴 때 발생하는 것이 잉여다. 잉여는 결핍을 낳고 결핍은 망상을 낳고, 망상은 더 큰 잉여를 향해 질주한다. 그 결과가 폭력과 질병, 그리고 소통부재다. 그렇다면, 우리가 ‘판도라를 꿈꾸고’ ‘아마존을 걱정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지금 당장, 이 문명의 한가운데서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한 실험에 돌입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존재를 참을 수 없는 무거움으로 인도하는, 저 끔찍한 잉여들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치열한 실험 말이다. 에콜로지의 ‘청정함’이란 이 과정 속에서만 비로소 가능할 터이다. 왜냐하면, 인간, 아니 우리 자신이 곧 자연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