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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교육

2012.02.04 23:13

김성찬 조회 수:2085

참부모되기

^ 참 부모 되기-parenting ^

 

김 성 찬 목사

(상계 중앙 교회/본지방회 교육 부장)

지존파 6명 전격 死刑 구형」

이렇게도 무지하게끔 100호 활자로나 때려 박아 시커먼 먹물된, 신문 지면이 파르르 떨고 있는 가을입니다. 결코 속죄할 한치의 틈도 주지 않겠다는 사법부의 다부진 결의 표명인 「집중심리제」로 지존파 일당은, 이 글 마당의 먹물 자국이 채 바래기도 전에 세상 밖으로 내팽개쳐져 버리게 될 것만 같습니다. 언젠가 기억조차도 아스라한, 17명씩이나 죽인 김대두. 그에게도 속죄할 시간과 여건을 마련해 줬다는데 말입니다. 전설 같은 이야기이지만, 그 김대두가 옥중 전도자가 되어 숱한 이들에게 영적 감화를 끼쳤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도 있습니다. “한 명의 변화된 사형수는 100명의 목사보다 더 낫다”라는. 행여, 그들 중 하나라도 진정한 복음 전도자가 될 시간과 여유를 우리 모두가 넓은 아량으로 베풀었더라면 어찌되었을까, 이런 상념으로 가득한 가을밤입니다.

“아니, 김목사 당신 지금 무슨 헛소리하고 있는 거요?!” 이렇게 역정을 내실 분이 계실 것입니다. “본때를 보여 줘야지, 죽일 놈들은 죽여야 해! 일벌백계라는 말도 몰라!!”

못 죽여서 한이 된 엄마

지존파 그 애들은 한결 같이 가정이 없던 녀석들이었습니다. ‘못 죽여서 한이 된 엄마’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이 끔찍한 일이 일어난 후, 사람들은 한결같이 이 땅의 부모와 가정에 대해 염려해 마지않았던 것입니다. 가정이 없습니다. 엄마가 있긴 있는데, 가정이 없었다고 말합니다. 박한상 군 사건에서도 우리는 부모는 있는데 부모가 없는, 분명 가정이 있는데 가정이 없는 이 시대의 슬픈 자화상을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모 됨’에 대한 새론 이해나 자기 반성을 서로가 아끼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왜냐하면 일련의 패륜적 사건과 발언들이 결코 자신들과 무관하다고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부모 되기(parenting)

데이비드 스튜워드(David S. Steward)는 “교사로서의 부모”(Parents as Teachers)라는 논문에서 ‘부모’에 대한 정의를 새롭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에 의하면 “부모란 단지 생리적 혹은 생산적 관계로서의 아버지나 어머니가 아니라, 부모란 자신이 책임지고 있는 자녀들을 돌보고 교육하는 인격적 상호작용 안에서만 참부모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런 참부모되는 일을 부모의 부모화(parenting)라는 용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부모(parenthood)는 부모화의 책임과 과정을 동반해야 하는 새로운 의미로 정의될 수 있다는 말인 것입니다. 어머니란 양육과 돌봄이라는 어머니 됨(mothering one)을 의미하며, 아버지란 가정의 구조와 결정을 책임지는 아버지 됨(fathering one)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구체적으로 나아가서 부모의 부모화(교사됨)를 위해서 부모가 해야 할 일에 대해 스튜워드는 다음 두 가지를 이야기합니다.

첫째로, 부모의 부모 되기란 자기 자녀의 능력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아는 일에 있다고 말합니다. 부모의 능력과 자녀의 능력은 다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자녀의 목표와 부모의 목표가 다를 수 있습니다. 명문대 출신 부모의 자녀들일지라도 그 자녀는 상급학교에 진학조차 못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고시에 실패한 이를 부모로 둔 자녀는 불행해질 수도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자신이 못다 이룬 한을 자녀를 통해 무리하게 이루려 할는지도 모른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부모들이 부모와 자녀간의 이런 능력이나 목표의 차이를 이해하고 인정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녀에 대한 부모의 기대나 지나친 욕심이 너무 앞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자기 자녀를 남의 자식 바라보듯, 객관적이고 냉정한 안목으로 바라 볼 수만 있다면 우리는 부모 됨의 올바른 역할을 행하는데 큰 도움을 얻게 될 것입니다.

둘째는, 부모는 자기 자녀의 능력 이해와 동시에 그 능력이 성장하고 또 발달하도록 돕는 환경과 분위기 조성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환경과 분위기 조성이라는 말은 스튜워드의 학문적 스승이 되는, 호레스 부쉬넬(Horace Bushnell)이 말하는 ‘신앙과 사랑의 분위기 조성’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호레스 부쉬넬이 말하는 신앙과 사랑의 분위기란, 부모가 자기 자녀를 교인(敎人)이 되도록 강요하거나 가르친다는 의미가 아니라, 부모 자신이 먼저 참 그리스도인이 되는 ‘신앙의 생활화’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 그리스도인인 부모에 의해 실현되는 사랑, 부드러움,참음과 인내, 신적인 성실성이 산 교육의 방법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쉬넬은 이러한 교육 방법을 “성령의 은총으로 이루어진 기독교화(基督敎化)의 방법”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이러한 진정한 배움(learning)은 암기나 모방, 강제에 의해서 일어 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보는데서’,‘음성을 듣는데서’,‘움직임 가운데서’ 아이들의 눈은 의미 있는 인상을 얻게 되며 이를 통해 진정한 학습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학습은 “어머니의 말이 아니라,어머니의 인내와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분위기”로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말이 아니라 실천입니다. 말로는 성실 하라고 말하면서,행동은 불성실한 부모에게서 그들이 무엇을 배울 수 있겠는가 묻고 있는 것입니다.

영적 부모

이는 비단 가정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교회도 넓은 의미에서 가정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말에 동의한다면, 교회 학교 교사는 이 ‘교회 가정’의 ‘영적 부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가정’의 영적 건강은 ‘영적 부모’ 되는 교사들의 해박한 지성과 진실한 신앙고백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아이들에게는 절대로 결석해서는 안된다고 소리 질러 대면서, 교사 자신은 무단 결석을 밥먹듯이 하는데 에는 결코 신실한 생명이 성장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아이들의 작은 잘못에는 신속하고, 추상같은 징벌을 가차없이 행하면서도, 자신의 큰 잘못은 적당히 넘겨 버리는 이중 윤리로는 결코 건전한 가정, 교회,사회를 이룩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 불타는 가을, 건강한 가정,교회,사회를 이룩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믿는 신앙인인 우리 자신의 참된 신앙화에 대한 깊은 관심과 염려를 아끼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생동하는 공동체를 위한 교회의 의식 개선

 

한 충격적인 사건이 방영되었습니다.‘선생님 수난시대’

이런 제목으로 방영된 MBC T.V P.D수첩의 기획 취재 내용이 바로 그것입니다.그 취재된 내용들은, 충남 태안의 서남중학교에서 소위 의식화(?) 교사들에 대한 학부모들의 집단 폭행및 강제 축출 사건이 그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서남중학교 사건에 연이어 터진 수원 매탄 국민학교 한 여교사에 대한 감금,폭행 사건이었습니다. 그 사건들의 시말을 추적한 내용이었습니다.

화해와 공존의 시대에, 반공 이데올로기로 맞서는 지서장의 강연에 반발한 교사들에 대해 일단의 학부모들이, 그 교사들의 교육내용과 방법에 의문을 제기하고 시비를 걸어, 집단 폭행과 강제 축출이라는 방법으로 실력행사를 한 것입니다. 이유야 어떻든, 그 극단적인 학부모들의 비합법적 행위는 오늘 우리 교육의 현 주소를 잘 나타내 보여 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더욱이 교권수호에 앞장 서야 할 일선 교육행정기관 종사자들의 편파적이고 경직된 사고의식은, 우리교육의 내일이 심히 염려될 만큼 위험한 것이었음을 새삼스레 느끼게 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열악한 교육여건과 황금만능주의에 철저히 농락당하는 교권이, 이제는 교실안에까지 뻗힌 감시의 눈으로 그 설자리를 자꾸만 잃어가는 것만 같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건은, 인간화(人間化)에 초점을 둔 일부교사들의 교육(학습)현장의 개혁에 대한 의지가, 현실답보적 교육현실과 학부모들의 무지를 반공이데올로기적 입장에서 부추긴듯한 그 어떤 분위기와 맞부딪히면서 발생한 불상사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1960년대까지 거의 절대시해오던 인격적 만남의 학습 이론이 70년대에 접어 들면서 그 제한성을 드러내게 된데서, 이러한 사건이 일어나게된 단초가 제공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즉 교실에서의 인격적 만남을 통한 자아의 변화가 사회라는 조직 구조 속에서는 실제로 아무런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는 무기력과 좌절을 경험하게 되자, 개인의 심리적 차원을 넘어 사회-정치적 차원으로 교육적 관심을 두는 학습 이론이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이 사회적-정치적 학습 이론은 개인의 심리적 측면보다 사회적 측면에서 공동체(조직체)의 영향력을 주시하면서,개인이 몸담고 있는 사회 조직과 구조를 비판하는 입장에서 사회 제문제들을(issues) 관찰 분석하고 인간화에 촛점을 두어 공동 의식 개발에 강조점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이론에 의하면 교육이란 한 선생이 교실 속에서 이룩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이 속한 공동체(분위기)가 교육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교육이란 공동체 전체가 행하는 활동인 것입니다. 이러한 학습 이론에 기초한 교사의 사회-정치에 대한 현실 인식이 체제 수호적 입장에 선 기득권자들에게는 불건전한 사고로 받아 들여진 것입니다.

 

죽은 학교,죽은 교회

 

‘학교는 죽었다’라는 탄식이 여기 저기서 들려 옵니다. 스승마저도 지식 전수의 부품으로 전락 시킨 산업 사회가, 단지 기술적 인간만을 요청하여 기계화된 인간의 대량 생산에 혈안이 된 일반 교육의 현실은, 이제 교육이 인간과 사회를 변화 시킬 힘을 이미 잃어 버렸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오늘 우리의 현실은 기술의 메카니즘이 갖는 기계적 성격,비인격적 성격,조정적 성격이 현대인을 소외 시켰고, 이러한 과정에서 Clark Moustakas가 지적한대로 “인간은 독특하고 진정한 자아가 파괴 되었을 뿐 아니라 알게 모르게 자신을 거부하는 과정에 스스로 참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은 억압과 통제로 부품화되어 인간 본래의 고유한 삶의 양식이 훼손 되었고 그 결과 자신,이웃,자연,하나님과의 부조화한 관계를 이룰 수 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이러한 인간 소외의 현상이 편만해진 오늘, 우리의 진정한 문제는 인간을 바람직한 변화로 인도해야 할 교육이 앞서 지적한대로 깨지고 텅빈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문제가 교육계 자체만이 안고 있는 문제의 결과라기 보다는 우리의 정치-사회의 구조가 교육의 인간화를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반교육의 여파는 교회교육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쳐서 이미 1970년대초에 기독교 교육학자 웨스터호프 3세는 ‘주일학교는 죽었다’ 라고 선언했던 것입니다. 그 근거를 들자면,

첫째, 학교형 교회교육의 문제입니다.

20세기 일반교육학의 대두와 발전과 그 영향으로, 교회교육이 일반교육학의 학교형 구조를 그대로 신앙 교육 현장에 받아들인데 그 이유가 있습니다. 즉 교육의 주체는 인간공동체 그 자체여서, 자연스럽고 비조직적인 힘이 움직여 사람을 감화시키는 교육이 본래적 의미의 교육인데, 오늘의 교회교육은 학교형 교육의 형태로 협소화되고 고정화되어 지식전달에만 머무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종교는 가르칠 수 있을지라도 신앙은 가르쳐질 수 없다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교회교육에 학교형 교육범례가 성행하여 종교로서 기독교에 ‘관하여(about)’ 가르쳐주는 일을 능사로 여기는 풍조가 강하다는 점입니다. 분명히 알 것은 신앙이란 생생하게 맥박치는 공동체안에서 자연스레 불러 일으켜지고 자각되는 것이지 결코 가르쳐지거나 전수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웨스터호프 3세(Westerhoff III)의 지적도 그 입장은 다소 다르지만, 그 방향에 있어 공동체성의 회복에 있음을 살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공동체교육의 중요성

 

지금까지 지적한 일반교육과 교회교육의 문제는, 결국 이 공동체성에 대한 올바른 이해없는 전체주의적 권위나 전통 또는 기술의 메카니즘에 젖은 기계적 비인격적 특성의 산물이라 생각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인간을 바람직한 변화로 인도하는 교육, 인간 상호간의 신뢰회복을 위해 마틴 부버(M.Buber)의 말처럼 “인간 실존의 기본적인 사실은 인간과 인간이 함께 있는 것” 이라는 교훈에 보다 충실해야 할 것입니다. 이 일을 힘쓰는 것을 가리켜 우리는 ‘공동체교육’이라고 말합니다. 공동체교육이란 즉 ‘인간을 경제적인 동물이나 기술 인간으로 취급하는 현대사회에 있어서, 인간 자신에게 관심을 두어 서로의 공동 감정을 통하여 신뢰와 사랑을 체득하게 하여, 전인(全人)으로 생활하는 인간존중운동’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신앙공동체로서의 교회

 

우리는 교회를 신앙공동체라고 부릅니다. 신앙공동체는 하나님과 예수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공동체입니다. 이 공동체의 상호역학적 관계의 특이성과 중심은, 하나님과 예수그리스도 그리고 그를 믿고 따르는 행위로써의 신앙이기 때문에, 이 공동체를 신앙공동체라고 부릅니다. 이 신앙공동체는 교회교육의 위기적 요소들이 교회안에서 생명적으로 표현되기 위한 산실인 것입니다.웨스터호프 3세 “신앙공동체의 형성, 그 충실화야말로 앞으로의 기독교 교육이 감당하고 나아가야만하는 도전적 과제이며 우리도, 어린이도 다른 사람과 함께 손에 손을 잡고 함께 예배하며 배우고 증거하는 크리스찬 신앙 공동체에 참가함으로써 신앙이 부여되고 이것을 계승할 수 있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푸르름이 더해가는 태양의 계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전인으로 창조 하셨으며 전인으로 성장할 수 있는 능력과 가능성을 주셨습니다. 현대교육은(교회교육조차도) 감정과 분리된 지적 교육으로써, 전인교육의 이념 지.정.의의 조화로운 성장을 방해해 왔습니다. 정의 교육의 특성은 참여와 경험의 학습을 통해 길러집니다. 믿음과 신뢰의 관계성을 회복하는 정의 교육은 신앙공동체의 형성을 위한 바람직한 대안입니다. 우리는 이 여름 공동체 캠프를 통해 정의적 차원의 학습 경험은 물론이고 신앙공동체의 형성을 위한 노력을 경주해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공동체 교육으로서의 기독교 교육은, 개인이나 그룹들을 기독교적인 삶의 스타일로 발전시키기 위한 신앙 공동체의 계획적이고 조직적이며 지속적인 노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