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분노를 다스리는 지혜

2012.11.20 09:51

김성찬 조회 수:2086

분노를 다스리는 지혜
 

 
 
 
 

▲ 사형수 묄러와 피해자의 어머니 티나. (인터넷 블로그 갈무리)

 
 
지난 10월 30일, 미국 사우스 다코다 주도 슈폴스(Sioux Falls) 감옥에서는 참관인들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하얀 시트가 덮인 침대 위에서 백발이 성성한 묄러(Donald Moeller)의 사형 집행이 시작되었습니다. 일곱 개의 갈색 가죽 끈에 묶여 침대에 누워있는 묄러에게 독극물이 주사기를 타고 몸속으로 흘러들어 갔고, 이어 묄러는 숨을 여덟 번 가쁘게 몰아쉰 후에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의 눈꺼풀은 열려 있었고, 피부는 옅은 핑크색에서 잿빛으로, 그리고 다시 보라색으로 변해갔습니다. 이윽고 22분 뒤인 밤 10시 24분, 검시관은 묄러의 죽음을 확인했습니다.

묄러는 1990년 5월 8일, 슈폴스(Sioux Falls)에서 당시 4학년이자 아홉 살이었던 베키(Becky O'Connell)를 살해하는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날 베키는 학교에서 돌아온 후 집에서 불과 한 블록 떨어진 편의점에 설탕을 사기 위해 달려갔습니다. 엄마 티나(Tina Curl)는 딸이 혼자 가는 게 다소 염려되기는 했지만 불과 200m도 되지 않는 거리이기에 다녀오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티나가 딸을 본 마지막이었습니다. 베키는 편의점 근처에서 묄러라는 38세 남자에게 납치당했고, 이어 성폭행 당하고 예리한 흉기로 잔인하게 살해된 것입니다.

다음날 아침 베키는 인근 호숫가 숲속에서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되었습니다. 이후 범인 묄러는 체포되었고, 사법당국은 여러 차례 재판을 거친 후 지난 9월 최종적으로 그에게 사형을 확정했습니다. 그리고 10월 30일 티나가 지켜보는 가운데 묄러는 범행 22년 만에 드디어 사형을 당했습니다. 티나는 사형 집행 전 최후 진술을 할 때 혹이라도 묄러가 자신의 범행에 대해 사죄의 말을 하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기대를 가졌지만 그는 "(할 말이)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사형을 지켜보는 창밖의 참관인들을 흘끔 보고는 "저 사람들은 제 팬클럽 사람들인가요?"라는 말만 남겼습니다.

티나는 묄러의 형이 집행되는 동안 참관인용 의자에 앉지도 않은 채 꼿꼿이 서서 창문을 통해 두 눈을 부릅뜨고 이 모든 장면을 지켜봤습니다. 그리고 참관을 마치고 교도소 밖으로 나온 티나는 딸의 어릴 때 사진과 살아 있었다면 서른두 살이 됐을 현재의 모습을 상상해서 그린 초상화를 함께 담은 액자를 들고 "그의 죽음을 최대한 가까이서 보고 싶어서 창문에 붙어 있었다"고 했습니다. 딸이 살해당한 후 티나는 사우스 다코다를 떠나 지금은 뉴욕에 살고 있지만 딸을 죽인 범인의 죽음을 보기 위해 먼 거리를 달려온 것입니다. 정부 보조금으로 살아가는 빠듯한 살림 때문에 이번 여행에 필요한 교통비와 숙박비를 모금해서 왔다고 했습니다. 티나는 살인자의 죽음을 가능한 한 더 가까이서 보고 싶었다고 했습니다.

베키는 티나의 유일한 아이였습니다. 불과 9년의 길지 않은 삶을 살았지만 티나는 딸의 해맑은 웃음소리를 잊을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저는 제 딸을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아직까지 날마다 제 딸에게 얘기합니다"라고 했습니다. 범인의 사형을 지켜본 티나는 "저는 여러 해 동안 이 날을 기다렸습니다. 드디어 오늘 베키에게 정의가 실현되었습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티나는 그의 죽음이 그나마 위안이 됐지만 그렇다고 딸을 잃은 고통이 없어진 것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저는 텔레비전을 통해 귀여운 베키의 사진을 보면서 저렇게 착하고 천진한 아이에게 어떻게 이런 비극적인 일이 발생했는지 마음이 아팠습니다. 사고나 병으로 자녀를 잃은 부모의 마음도 헤아릴 수 없는데 하물며 자녀가 다른 사람들에 의해 잔인하게 죽임을 당한 부모의 마음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이번 사건에 대한 충격이 가시면서 천천히 제게 떠오르는 것은 분노에 찬 티나의 인생이었습니다. 어린 딸이 잔인하게 살해된, 이 가슴 찢는 아픔에 더하여 22년이라는 긴 세월을 분노 속에 살아온 티나의 삶에 대한 안타까움이었습니다. 티나는 금년에 50세이고, 베키가 살해된 것이 22년 전이라고 하니 그 때 티나의 나이는 28세였을 것입니다. 인생의 한 가운데 토막을 분노에 찌들려 살아온 한 맺힌 엄마의 22년의 세월은 누가 보상합니까? 그리고 지금까지 지내온 고통의 세월 뿐 아니라 앞으로 남은 인생은 또 어떻게 합니까? 범인이 처형된 것은 잃어버린 엄마의 인생을 보상해 줄 수도, 분노를 사라지게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분노. 이것은 누구나 피하고 싶은 감정이지만 인생을 살면서 불가피하게 맞닥뜨리지 않을 수 없는 감정입니다. 지난 수년 동안 저 역시 티나와는 비교할 수 없지만 창조론 책과 부부생활에 대한 책으로 인해 몇몇 사람들로부터 많은 비난과 공격을 받으면서 분노를 경험했습니다. 이단으로부터 돈을 받고 공격을 기획한 사람들, 책을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고 이들의 주장에 동조하여 맹목적으로 돌을 던진 사람들, 그 책들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일에서조차 방해하고 비난하는 사람들에 대해 처음에는 안타까움과 섭섭함이, 시간이 지나면서 분노가 끓어오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난 수년 동안 분노에 대한 묵상을 많이 하면서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첫째, 분노는 우리의 죄성을 먹고 자라는 생명체와 같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일에 대해서는 세월이 지나면 분노가 다소 누그러지기도 하지만 어떤 일에 대해서는 세월이 지날수록 도리어 분노가 더 강렬해질 수 있습니다. 이들은 끝없이 자라서 결국에는 우리를 파멸로 이끕니다. 그러므로 분노는 의도적으로, 의지를 동원해서 다스려야 할 감정입니다. 가만히 두어서는 절대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둘째, 분노는 분노의 대상이 되는 사람보다 분노하는 당사자를 더 망가뜨린다는 사실입니다. 분노를 갖는 사람이 더 큰 손해를 본다는 말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불가피하게 이런 저런 부담을 안고 가지 않을 수 없지만 이 세상에 분노의 짐만큼 무거운 것도 없습니다. 분노는 창살 없는 감옥처럼 우리를 가둡니다. 무거운 짐을 지고 분노의 감옥 속에서 인생을 살아가게 되면 우리의 영성과 때로는 육체까지 망가지게 됩니다.

셋째, 분노를 극복하려는 노력은 우리를 성숙하게 만든다는 사실입니다. 분노는 극복하기가 어려운 만큼 그것을 극복하려는 노력은 좋은 영적 훈련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용서하신 손양원 목사님의 얘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손 목사님은 그 사건을 통해 온 세상과도 바꿀 수 없는 두 아들을 잃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분이 원수를 사랑하게 되기까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분노를 다스렸던 과정은 잘 생각하지 않습니다. 목사님은 자식들을 죽인 원수에 대한 분노를 극복하고 도리어 그를 용서함으로써 어느 누구도 경험하지 못했던 십자가의 사랑을 경험하셨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면 도대체 우리를 분노하게 만든 사람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을까요? 저는 두 가지가 용서의 출발점이라고 믿습니다. 우선 자신도 용서 받은 사람이라는 점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속적인 죽음을 통해 자신도 용서 받아야 할 사람, 나아가 용서 받은 사람임을 알게 될 때 자신에게 잘못한 사람들에 대해 마음을 열 수 있게 됩니다. 저의 경험으로 미루어 볼 때 자신에게 고통을 안겨준 사람의 잘못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자신의 부족한 점, 잘못했던 점을 살펴보기 시작할 때 비로소 우리는 용서의 첫 걸음을 뗐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것도 저절로 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될 것이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돕는 은혜를 받기 위해 때로 이를 악물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다음에는 고통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비록 지금은 고통스러울지라도 이를 통해 하나님이 이루시려는 좋은 계획이 있음을 받아들일 때 우리에게 고통을 준 사람들에 대한 분노를 처리할 수 있습니다. 당장 자신의 고통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을 때도 있지만 오랜 세월이 지나면 요셉처럼 자신의 고통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게 됩니다. 때로는 죽을 때까지 자신의 고통에 대한 뚜렷한 이유를 알 수 없는 경우도 있지만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내가 다 이해하지 못하는 일에서조차 하나님이 의로우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과 스데반처럼 될 수는 없어도, 일흔 번 씩 일곱 번을 용서하지는 못해도,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내 모든 억울한 사정을 다 아시고 신원하여 주신다는 믿음을 갖는다면 힘들지만 분노를 넘어설 수 있습니다.

분노에 대한 생각을 하면서 저는 양심이 화인 맞은 뻔뻔한 묄러의 모습도 기가 막히지만 오랜 분노로 일그러진 티나의 모습이 더 안타까웠습니다. 범죄자는 죽음으로 자신의 삶을 마쳤지만 티나는 사정이 달랐습니다. 귀여운 딸을 가슴에 묻은 것만도 너무나 억울하고 가슴이 아픈데 이에 더하여 한 평생을 분노 가운데 살아간다는 것은 딸을 잃은 슬픔 못잖은 또 다른 불행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분노의 특성을 잘 아셨기 때문에 성경은 예물을 드리기 전에(마5:24), 해가 지기 전에(엡4:26) 빨리 분노의 문제를 해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가인의 마음 속에 동생 아벨을 미워하고 죽이려는 마음이 생겼을 때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4:7)고 말씀하셨습니다. 분노를 다스리기 위해 발버둥 쳤던 지난 몇 년을 돌아보면서 저는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사랑과 대속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생각해 봅니다.
미주 뉴스앤조이 기사인용

양승훈 / 벤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VIEW)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