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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유도아이들

2012.02.27 00:54

그루터기 조회 수:1487 추천:93

선유도아이들

         -섬, 그 복음의 사각지대로 가다

          고군산군도의 한 알의 밀알 추명순 전도사

 

빚진 자 된 우리가

 한 사람의 생을 기록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그분과 같은 시대를 살지 않았으면 더 어렵다.

그분의 삶이 세상적인 기준으로 보면 박복하고 기구한 삶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분의 생애가 담고 있는 영원한 가치는 그 어떤 말로도, 그 어떤 수식어로도 다 표현할 수가 없다.

그분의 아픔과 고통을, 그리고 외로움을 다 헤아릴 수 없다.

아흔 네 해의 그분의 생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고

또 평범하지도 않았다.

모욕과 수치, 그리고 죽음의 고비들을 넘기면서 결국에는 유배지와도 같은 섬의 맨 끝자락까지

그분은 자원해서 왔다.

젊은 새댁일 때 남편으로부터 내동댕이쳐졌고

역사의 칼날도 그분을 비껴가지 않았다.

어떻게 그분의 삶의 질곡들을, 고통의 깊이들을 다 기록할 수 있을까?

그분만이 간직한 주님과의 그 비밀한 일들을 세세하게 기록할 수 있을까?

어렵고도 조심스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꺼운 마음으로 추명순 전도사의 삶을 기록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그분의 눈물의 기도와 땀과 헌신으로

지금 우리 섬 교회들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군산군도의 모든 교회들은

그분에게 갚을 수 없는 빚을 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분이 고군산군도의 맨 끝 섬인 末島에 들어오신 것이 1959년이라니 내가 태어나기도 전의 일이다.

 

결혼과 입교

 추명순은 1908년 3월에 충남 보령군 웅천면 서정리에서 엄격한 유교 집안의 무남독녀로 태어났다.

배우고 싶은 열망이 컸었지만 전통적인 유교 집안의 부모는 추명순을 서당이나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어깨너머로 한글과 쉬운 한자를 익혔다.

15세 때에 서천읍 조씨 집안으로 시집가서

19세에 첫 아들을 낳았다.

시집살이는 고되고도 엄했고

그 고달픈 시기에 남편은 첩을 얻어 딴 살림을 차리고 집안을 돌보지 않았다.

井華水를 떠놓고 기도하던 어느 날 꿈을 꾸었다.

꿈 속에서 하늘의 무지개 사다리가 집 안마당에 닿아있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보니

파란 유리 바다가 있고

인도자의 손을 잡고 유리 바다를 걸어가는데

좌우에 죄인들이 기름 가마의 고통을 참지 못하고 내는 비명소리를 들으면서 진주문을 지나서

그곳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만났는데

아직 올 때가 아니니 내려가라는 말씀을 듣고 깨어났다.

꿈 속에서의 일을 생각하는 날들이 많아졌다.

25세 때에 예수 믿는 집안 할머니로부터 전도를 받아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교회에 나가서 애통한 눈물의 회개기도를 하고

마음에 평안을 누리게 되었다.

남편의 마음을 훔쳐간 그 여자도 용서했다.

 

전도인

 이성봉 목사의 부흥회에 참석하여 뜨거운 은혜를 받고나서

그 해에 김응조 목사에게 세례를 받고

이듬해에는 집사 직분을 받아 봉사하게 되었다.

비인에서 자신의 체험과 은혜를 나누며 열심히 전도하는 추명순 집사에게 남편이 찾아와

온갖 협박을 해도 예수를 버리지 않겠다고 하자

산으로 끌고 가서 땅을 파고 그녀를 산 채로 묻었다.

생매장 당한 채로 기도하고 힘을 얻어

죽을 고비를 넘기고 살아나오다.

설상가상으로 아들이 병을 얻어 죽자

남편은 예수 믿는 아내 때문이라고 그녀를 조씨 가문에서 내쫓았다.

이제 그녀에게는 아무도 없다.

아니 이제 그녀에게는 오직 예수만 있다.

그 길로 추명순 집사는 비인으로 가서 전도하다가

당시 신학교 3학년인 조종영 전도사와 함께 비인 성결교회를 개척하다.

비인을 중심으로 전도하면서 인근에 있는 감리교회와 장로교회의 설립을 돕기도 하고

안면도 장로교회 개척자와 힘을 합해 천막교회를 거쳐 교회를 설립하기도 하다.

 

환난과 핍박 중에도

 1943년 일제가 교회를 박해하고 교회 문을 닫아 모든 예배를 멈추게 하였는데

몰래 예배를 드리다가 발각되어 유치장에 갇혀 온갖 수모와 폭행을 당했다.

비인 성결교회가 폐쇄되자 추명순 집사는 장로교회로 가서 계속 전도하다.

해방이 될 때까지 원두리 교회와 김제 용진에 교회를 개척하다.

해방 후에는 다시 셩결교회로 돌아왔는데 이번에는 6.25전쟁으로 또 다시 핍박을 받게 되었다.

공산당들이 교회를 내놓으라는 협박에도 굴하지 않자 추명순 집사를 죽이려 하였는데

어느 성도의 도움으로 다시 한 번 죽음을 면하게 되었다.

비인 성결교회 시절 군산중동 교회의 김용은 목사가 부흥회를 인도하러 오셨는데

열심이 특심한 추명순 집사에게 '섬에 가서 전도할 마음이 있느냐?' 고 묻자

'어디든지 하나님의 명령이면 순종하겠다.'고 대답했다.

성경연구와 공부는 30세 때에 이리에서 성경학교를 수학한 것이 그녀의 신학공부 전부이다.

 

섬, 그 복음의 사각지대로 가다

 1959년 중동교회 김용은 목사의 후원으로 고군산군도에 入島하다. 

처음에는 신시도에서 2개월간 전도하다가

선유도로 건너오게 되었다.

그 당시 선유도에는 천주교 공소가 있었는데 천주교 공소 옆에 있는 소금 창고를 빌려

3개월 동안 예배 드리고 전도하였다.

선유도에 있는 望主峰에 올라가 금식하며 교회 짓기를 기도하다.

당시 도서 지역에 보급된 구호물자를 팔아 교회 건축비를 조성해 놓고 함께 들어와서 전도하던

최홍국 전도사에게 교회당 건축을 맡기고 옆 섬 무녀도로 건너가다.

무녀도에서 조씨 성을 가진 사람 집에서 전도한 사람들을 모아 예배를 드리다.

무녀도에서는 특히 기사와 이적이 많이 일어났다.

벌꾸미에 사는 열세 살 난 아이가 사탄에 눌려 있어 제정신이 아니었었는데

추명순 전도사의 호통에 사탄이 벌벌 떨다가 소리를 지르고 나가기도 하고

폐병 앓는 이가 치유되는 역사도 있었다.

조씨네 집은 다행이 넓은 방이 있어 한꺼번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예배드릴 수 있었다.

무녀도에서 한 달 가량 복음의 역사를 보이다가

고군산군도의 맨 끝 섬인 말도로 들어가다.

말도에는 이미 신학생들이 들어와 전도하다가 나갔는데

김수철 학생이 1개월 반, 박영철 학생이 9개월 간 복음을 전하고 간 후였다.

처음에는 학교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개인 집을 월 200원씩 주고 세내어 예배 드리다.

동네 청년들과 상의하여 교회를 짓기로 하고

산에서 소나무를 베어다가 10개월 만에 예배당을 완공하였다.

이렇게 지어진 예배당에서 8년 동안 예배를 드리다가

1969년도에 모래를 퍼 날라 벽돌을 찍고, 소나무를 베어다가 성전을 신축하였다.

추명순 전도사의 여장부다운 면모를 볼 수 있다.

 

기도대장

 고군산군도의 섬마다 추명순 전도사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기도의 숨결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다.

섬의 복음화를 위해 망주봉, 선유봉, 무녀봉, 장자봉 등, 각 섬의 높은 봉우리들마다 올라가서

철야하고 금식하고 부르짖어 기도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통일을 위해서 그리고

고군산군도의 복음화를 위해서.

고군산의 섬들을 돌아다니며 전도하고 기도했던 기도대장.

말도에는 추명순 전도사가 매일 다니며 기도하던 기도처가 있었고

새벽 제단에 무릎을 꿇으면 서너 시간씩 기도하시던 기도대장이셨던 그분.

지금도 그분 기도의 자양분으로 고군산의 교회들이 성장하고 있다.

 

 기억의 편린들

 열정적이고 끈질긴 그분의 기도는 열매가 참 많다.

섬에 전화가 없던 시절

말도와 군산을 오가던 여객선의 결항 여부를 영으로 분별하였고

환자에게 믿음으로 손을 얹어 치유한 일들은 부지기수다.

심지어는 죽어가는 아이도 살린 적이 있다.

겨울바람이 탱탱 부는 날 군산 여객선 터미널에서

고군산중앙 교회에서 시무하던 이관수 전도사가 추명순 전도사와 여객선을 함께 타게 되었다.

선유도까지는 같은 배를 타고, 말도를 가려면 선유도에서 종선 새마을 19호로 갈아타야 한다.

그날따라 바람은 심하게 불었고 배는 흔들림이 심해서 배에 탄 사람들이 배멀미로 고생을 하고 있었다.

대부분이 객실에서 꼼짝 못하고 누워서 가는데, 

추명순 전도사는 한사코 추운 객실 밖에서 옹송거리고 서 있다.

선유도에 다가 올 무렵

'추 전도사님, 오늘은 바람이 많이 부니 무녀도에서 쉬시고 말도에는 바람이 자면 가시지요.'하고

권했는데 뜻 밖의 대답을 들었다.

말도까지는 조그만 새마을 19호로 한 시간이나 더 가야 하는데

'아니야, 오면서 계속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 오늘 분명히 말도까지 들어 갈 수  있대.'

바람이 심하게 부는 날이면 명도와 말도는 아주 흔하게 여객선이 접안을 못하고

되돌아 나오기 일쑤인 것을 감안하면

추명순 전도사의 믿음은 너무나도 확고한 것이었다.

그날 그분은 믿음대로 말도에 들어가셨다.

 

기도하는 일에 은퇴는 없다

 작은 체구에 거친 얼굴

쏘아보는 듯 한 눈매

백발이 성성하신 그분에 대한 처음 인상이다.

말도에서 고군산 교역자 모임이 있어서 갔더니

마침 그분이 와 계셨다.

손자뻘 되는 이덕성 전도사가 할머니 시중을 들고 있었다.

후임자가 없어서, 말도에 들어오겠다는 전도사가 없어서

70세에 은퇴를 하시고도 76세가 되도록 말도를 떠나지 못하고 계시다가

1개월 동안 전도하러 왔던 이덕성 전도사가 한 달이 3년이 되어가고 있었다.

사람 좋은 이덕성 전도사 할머니에게 붙들려 노총각이 되어가고 있었다.

젊은 종이 와서 말도 교회를 섬기게 된 것이

그분의 20년 기도응답이라고 어린아이처럼 기뻐하신다.

어리디 어린 손녀 같은 사모들을 일일이 기도해주시고

'기도 많이 해라' 하시던 그분의 당부를 잊지 않고 있다.

어느 해 가을, 거동이 불편해진 그분을 뵈러 우리들이 성락원엘 갔었다.

어린 손주들을 만난 듯 흡족하게 웃으시며

지금도 섬 교회들을 위해서 기도하신다고 한다.

기도하기를 쉬지 않고 계시다고 성락원 원장이 넌즈시 일러준다.

말도에서 24년, 그분은 인생의 마지막을 섬 사역에 바쳤다.

섬, 그 복음의 사각지대에서

그분은 인생의 마지막 불꽃을 태웠다.

아낌없이.

그리고 94세를 사시다가 1994.11.28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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