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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유도아이들

2013.01.16 12:54

그루터기 조회 수:1056 추천:82

山行

 

눈여겨 보기

 선유봉을 오르는 길엔 가을이 익어가고 있습니다.

보라색 구절초가 바람에 흔들립니다.

알싸한 구절초 향이 바람 속에 흩어집니다.

보라색 구절초를 보니 애잔한 기억이 살아납니다.

구절초 한 묶음을 들고 아비의 시신을 실은 리어카 뒤를 따라가던 작은 아이가 생각납니다.

그 아이의 반듯한 이마도 기억이 납니다.

산 도라지도 무리지어 피어 있습니다.

흰색과 보라색이 반반씩 섞여 있습니다.

꽃 봉우리를 하나 터뜨려 봅니다.

"폭" 바람이 빠지면서 쌉쌀한 도라지 내음이 나는 듯도 합니다.

하얀색 개망초 꽃도 지천입니다.

여름내 키가 자란 개망초가 멀쑥한 꽃대를 바람에 내맡기고 있습니다.

간간히 꽃잎이 바람 속에 흩날립니다.

어두컴컴한 나무 그늘 아래

종 모양의 보라색 초롱꽃이 줄기에 조롱조롱 피었습니다.

어둑신한 산길을 밝혀주는 등불 같습니다.

가만히 줄기를 흔들어 봅니다.

종 같기도 하고 등불 같기도 한 초롱꽃이 소리를 낸다면

높고 맑은 종소리가 날 것만 같습니다.

실로폰 소리를 닮은 종소리가 날 것 같습니다.

궁궁이도 꽃대마다 자잘자잘한 하얀 꽃을 맘껏 피웠습니다.

산비둘기 한 마리가 궁궁이 꽃밭 속에서 푸드득 날아오릅니다.

가을 산에도 이렇게 꽃들이 피어나고 있습니다.

나이가 든다는 건, 허리를 숙여야만 보이는 들꽃들에게도 시선을 주는 것인가 봅니다.

계속 산을 오르면서 보니

이미 나뭇잎들은 여름의 그 나뭇잎이 아닙니다.

윤기는 다 사라지고 하루가 다르게 말라가고 있습니다.

지난 여름에는 세 번의 큰 태풍이 선유도를 훑고 지나가서 소나무를 제외한 활엽수들은 나뭇잎을 거의 다 떨구고 빈 가지로 서 있습니다.

뿌리째 뽑혀서 넘어져 있는 나무들도 꽤 많습니다.

산 벚꽃나무에 분홍색 벚꽃이 다닥다닥 피었습니다.

태풍에 나뭇잎이 다 떨어지고 나서 다시 따신 햇살을 받은 나무가 봄인 줄 착각한 모양입니다.

올 가을엔 이렇게 꽃을 피운 벚나무들을 선유도 구석구석에서 심심치 않게 보게 되는데 선유봉을 오르는 산길에서도 만났습니다.

선유봉을 오르는 길은 바위투성이 좁은 오솔길 입니다.

우리들은 서로 밀어주고 잡아주면서 선유봉을 오르는 중입니다.

활짝 핀 고사리 군락지를 지나면서 내년 봄에 여기로 고사리 끊으러 와야겠다고 누군가가 말합니다.

오르는 길섶에 동글동글 까만 염소 똥이 소복소복 모여 있습니다.

누구 네가 염소를 방목하는 모양입니다.

'아주 공갈 염소 똥 십원에 열 두 개'하는 노랫말이 생각나서 웃었습니다.

염소는 보지 못하고 염소 똥만 봤습니다.

그러고 보니 어릴 때 먹던 염소 똥 같은 소화제가 또 생각납니다.

제 남동생은 어찌나 약 먹는 것을 좋아하는지

잘 체해서 제가 소화제를 먹을 때마다 꾀병 배앓이를 하곤 했습니다.

그러면 어머니는 모르는 척 소화제 두 알을 주시곤 합니다.

그러면 그 소화제가 입 안에 들어가자마자 동생의 배앓이는 씻은 듯이 사라지고

어머니가 속아준 자기의 연극에 만족해서 신나하곤 했지요.

약간 달작지근하고 박하 맛이 나는 까만 염소 똥같은 소화제가 옛날에는 있었습니다.

가파른 곳에 다다랐습니다.

숨을 돌리고 잠깐 쉬었다가 오릅니다.

정상 가까이 오를수록 바람이 점점 더 거세어집니다.

나뭇가지들이 쉴 새 없이 흔들립니다.

 

천천히 보기

 7부 능선 쯤 오르자

우리들이 사는 동네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저 아래로 사람 사는 동네가 보입니다.

무시꾸미 임미라 집사님 네 밭에 김장 배추가 한창 자라고 있습니다.

순금이네 배가 동네에서 후미진 무시꾸미에 홀로 떠 있습니다.

동네 앞에 정겹게 몸을 맞댄 바다 위의 배들도 보입니다.

잎을 다 떨군 감나무에 감들이 익어가고 있습니다.

이제 저녁 빛이 된 석양이 태풍을 온몸으로 견딘 감들에게 단물을 부어주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뒷장불에 널어놓은 고추를 거둬들이고 있습니다.

싱싱하던 고추가 뒤장불 자갈 위에 누워 태양초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또 누군가는 그 옆에서 작대기로 무언가를 털고 있습니다.

조심스러운 손놀림인 걸 보니 아마도 참깨인 듯합니다.

오소소 깨알 같은 재미가 쏟아지고 있을 겁니다.

현미네 집 앞 너럭바위 끝자락에 바닷물에 무언가를 씻으러 나온 사람이 보입니다.

바다가 많이 빠져나가 한 발을 바닷물에 담갔군요.

집안 마당 한 켠으로 가을걷이 알곡들이 널려 있습니다.

그 옆엔 여름 三伏을 무사히 난(?) 누렁이가 긴 잠에 빠져 있습니다.

햇볕은 따갑습니다.

길이가 짧은 가을볕은 따갑습니다.

부지런한 사람들은 볕을 따라 가지와 호박오가리들을 펴 널어 말립니다.

빨랫줄에는 빨래 대신

잔챙이 우럭이나 놀래미, 바닷장어들이 꾸덕꾸덕 말라가고 있습니다.

홍어 비스므리 한 간제미도 그 특유의 꼬릿한 냄새를 풍기며 처마 밑에 매달려 있습니다.

겨울을 위해 여퉈 둘 찬거리입니다.

유모차를 지팡이 삼아 밀고 가는 허리 굽은 할머니의 걸음걸이가 가을빛을 닮았습니다.

수훈이 네 집 비탈진 골목길을 리어카를 끌고, 밀고 올라오는 사람들은 같이 늙어가는 내외인가봅니다.

깊이 숙였던 허리를 펴 두드려줍니다.

아까부터 바다를 바라보며 앉아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지는 해를 보고 있는 것일까요?

 

높은 곳에서 바라보기

 드디어 선유봉 정상에 올랐습니다. 

아, 시야가 확 넓어졌습니다.

눈앞이 시원해졌습니다.

바람이 덜 타는 곳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신선들이 내려와 바둑을 두었다는 선유(仙遊)봉 정상 평평한 곳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가지고 올라온 사과를 통째로 단숨에 먹어치웠습니다.

허기와 목마름이 한 번에 해결됩니다.

오영이 집사님이 어렸을 적에는 이 선유봉이 놀이터였답니다.

가끔은 아이들과 어울려 솥단지까지 들고 와 천렵도 했다는군요.

바위도 험하고 오르는 길도 가파른데 아이들은 염소처럼 날렵했다는군요.

바위와 바위 사이를 팔짝 건너뛰고 비탈길도 쭈루룩 잘도 내리 달렸다네요.

아마도 그 때의 아이들은 군더더기 하나 없는 찰진 근육을 가지고있었을 것 같습니다.

선유봉에서 보니 비안도와 위도가 바로 코앞입니다.

구불구불한 변산반도의 아름다운 산맥이 바다 쪽으로 내달리고 있습니다.

아직도 물이 지고 있습니다.

단정하게 휘어진 해수욕장 모래밭에 물발자국으로 무늬가 생겼습니다.

망주봉 너머로 밭너머(田越里) 해우발(김 양식장)이 보입니다.

이맘때의 바다는 꽃밭 같습니다.

꽃밭 같은 바다와 우리들이 사는 동네가 한 눈에 보입니다.

변산반도의 산맥들이 遠近이 지워진 한 폭의 수묵화 같습니다.

크고 작은 섬들로 징검다리를 놓았네요.

비안도와 위도가 징검다리를 건너면 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 멀리 쌍둥이처럼 왕등도(상, 하왕등도)가 나란히 붙어 있습니다.

방축도와 말도는 병풍으로 둘러 서 있습니다.

그 안에 장자도가 오밀조밀 살림을 품고 있습니다.

강한 오렌지 빛 저녁 해가 바다를 붉게 물들이며 반쯤 잠겨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이 해를 바다 속으로 숨기십니다.

산 위에서 보니

우리가 사는 세상이 한 눈에 내려다보입니다.

크고 작은 일상사들이 뭐 그리 대단해보이지 않습니다.

한 발짝 양보해도 그리 손해가 날 것 같지 않습니다.

이기려고 다른 사람보다 더 빨리 뛰어도 수훈이네 담장 모퉁이를 돌면 거기 순길이네 대문 앞에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살아남기 위해 다른 이를 밟아도 그 머리통도 저 아래 있습니다.

내 눈높이에서 볼 때는 싸워야 할 일도 이렇게 내려다보니 목숨을 걸 만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입니다.

마음이 넓어진 걸까요?

수평으로 열린 길을 가다가 어쩌다 한 번쯤 이렇게 수직으로 열린 길을 오르는 일도 꽤 괜찮습니다.

 

산 위에 올라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가르치셨던 주님에게서(마5:1)

 오늘 제자훈련 모임을 산 위에서 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한 발 물러나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바라보며 주님처럼 기도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누리고 싶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복 있는 사람으로 살고 싶습니다.

산 위에 올라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가르치셨던 주님에게서 배우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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