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무고하게 당한 배신,에 대한 단상

 

희생양은 무죄다, 라고 르네 지라르는 선언한다. 예수는 희생양이 무죄임을 최초로 증거했다. 희생양이 무죄라면, 그가 당한 배신도 무고하게 당한 배신이다. 

 

허나, 배신자는 자신이 배신한 희생양이 유죄한 자라는 허위 사실을 내뱉는다. 받은 바 온정과 사랑이 크고, 깊을수록 배신자가 희생양을 향해 내뱉은 말이나, 행위는 치밀하고, 거칠고, 간악하고, 잔인하다. 왜냐하면 받은 바 온정과 사랑을 증거 인멸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여, 등 뒤에서 갖은 터무니 없는 음해 공작을 멈추지 않는다.

 

할 만큼 했다,라고 한단다.

받은 바 은혜를 최선 다해 갚았다는 말이란다.

당최 그 무엇으로, 얼마나, 어떻게 할 만큼 했다 라는 말인가?

도시 이해가 되지 않는다. 

 

왜 배신을 때렸는지 이유도 정확히 알 수 없다.

 

무고하게 당한 배신이기 때문이다.

 

무릎을 친다.

그래, 그 할 만큼 했다는 이해 불능 면피성 발언은,

 

(이용)할 만큼 했다,는 말이다.

 

배신이란, 윤리적 개념이다. “윤리란 가족이나 친구처럼 두터운 관계를 규제하는 것”이다. 여기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배신이란, 바로 그 “두터운 관계에 대한 배신”이다.(<<배신>>아비샤이 마갈릿)

 

온정과 사랑에 대한 배신의 아이콘이 예수의 돈궤 맡은 제자였던 가룟 유다다. 돈궤를 맡았으니, 예수께 받은 신뢰와 사랑이 얼마나 깊고, 두터웠겠는가?

 

그 누가 그랬다.

 

인간 신뢰에 대한 회의가 너무 깊어 견디기 어렵다. 십수년 간 쌓아 온 신뢰가 무너져 내렸다. 욕 먹어가면서도, 그 불법적인 행위를 편들어 주고, 변호해 주고, 위기에서 구원해 줬는데, 교권이 뭐라고, 등에...”

 

그래 그 배신에는 명분이 없다. 신앙공동체의 공동선을 위한 배신이라면, 배신의 모호성, 그 양가적 측면에서 논의해 볼 여지가 있겠지만, 그것도 아니다. 

 

신앙공동체를 불법 도가니로 만들어 놓고서도, 신앙 공동체의 온정주의로 그 부당함을 용납 받은 대상이 아니던가? 자숙하고 있어야 할 시기에, 인간 신뢰까지 무너지게 하는 일은, 

 

입맛이 쓰다.

 

자신의 피와 살을 내어주시는, 이밤 최후의 만찬장에서도 배신의 아이콘은 뻔뻔했다.

 

성경은 그 배신의 배후에 마귀/사탄이 있다(요13:2,27)고 밝힌다.

 

과연 말세다.

 

1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4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디모데후서 3:1,4)

 

2019.04.17(수) 고난주간 세째 날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