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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전야

당신들의 안식 - 하나님 없는 그 절망의 깊음(Depths)에 대하여

 

그들이 경비병과 함께 가서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지키니라(마27:66)

 

계시와 기적을 가둔 무덤을, 시지포스의 돌로 인봉하고, 창검을 치켜든 경비병들이 눈을 부라리며, 굳게 지키고 있다. 자신들이 인봉한 계시와 기적이 언약대로 부활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랬다. 역설적으로 십자가의 원수들이 그 부활의 언약을 사수하려 들었다.

 

그 이튿날은 준비일 다음 날이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모여 이르되 /63  주여 저 속이던 자가 살아 있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64  그러므로 명령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둑질하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속임이 전보다 더 클까 하나이다 하니 /65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에게 경비병이 있으니 가서 힘대로 굳게 지키라 하거늘(마27:62~65)

 

죽은 자의 부활은 아이러니하게도, 십자가의 원수들이 먼저 굳게 믿었음에 틀림 없다. 그 언약을 믿는 믿음이 있었기에 자신들의 믿음을 스스로 봉쇄하려 들었던 거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약2:19)

 

사탄도 부활의 계시와 기적을 믿고 떠는데, 정작 예수의 제자들은 그 신실하신 하나님의 언약을 까맣게 망각한 채, 하나님 없는 절망의 깊음(Depths)에 빠져 잠들어 있지 않았던가? 

 

당연한 결과였다. 예수의 제자들의 관심과 욕망은 누가 더 크냐에만 고착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엇을 원하느냐 이르되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마20:20,21)

 

더 이상의 계시나 기적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신론(理神論)과 무덤에 갇힌 예수 안에서는 하나님의 언약이 더 이상 역사하지 않는다 여기는 기독교 무신론은, 이천 년 전 그날 골고다 언덕에서만 힘을 발휘했던 것은 아니다. 작금 누가 더 크냐,라는 맘모니즘과 계시와 기적이 이성과 지식의 폭력에 짓눌린 오늘의 한국 교회에도 여전한 것 아닌가? 

 

그랬다. 예수의 제자들, 그 당신들의 안식은 하나님 없는 깊은 절망의 안식이었다.

 

안식 후 첫날이 오기 전까지.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더니 /8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빨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달음질할새(마28:1,8).

 

절망의 깊음에 빠져 있던 당신들의 칠흑같이 어둔 안식은, 사망 권세를 깨뜨리신 부활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만 참된 안식이 되리니.

 

안식 후 첫날을 고대하며.

 

2019.04.20(고난주간 여섯째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