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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16: 모래시계

2019.05.24 09:17

관리자 조회 수:23

현대의 문제 기독교적 해답(월간 활천 1995년 3월호)

모래 시계 - 그 신화 벗기기 - 김성찬 목사  

 

함께 티비 드라마 ‘모래 시계’를 보다가,  

느닷없이 딸아이가 이렇게 물어왔습니다.

 

  “아빤-, 그 때 뭐했어?”

  “.................”

  

  모래 시계 

 

그것은, “희생된 자들이 유죄(有罪)다” 라고 공포한, 가해자들의 ‘왜곡된 선언’에 대한, ‘작은 반란’이었습니다.  한마디로 “그 희생자들은 죄가 없다”라는 선언이었습니다.  신화가 깨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구석구석의 악을 제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마저, 이렇게 기도로, 종교 의식을 통해 정당화시켜 주었던, 그 새역사 창조자들(?)의 건국 신화가 비신화화 되어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건국(?) 신화 즉 “정의 사회 구현을 위한 살인은 정당하며, 우리는 이 살인에서 깨끗하고,떳떳하다”며 당연시하던 그들의 기원적 폭력이, 과연 정당한 것이었는가를 되묻고 있었던 것입니다. 

 

폭력의 신화(神話)-신화 만들기

 

문예이론가이며 인류학자인 르네 지라르는 새 질서를 세우려는 자들은 여러 경쟁자를 만나게 되며, 그 경쟁자들을 제거해야 새질서가 이룩되는데, 그때 발생하는 폭력을 기원적 폭력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창건자를 정당화시키는 종교의식은 그 기원적 폭력을 신화의 형태로 숨기고 있는데, 그 신화는 창건자가 저지른 박해를 긍정적으로 묘사한다는 것입니다. 즉 신화(神話)란 ‘희생된 자들의 유죄성(有罪性)을 믿도록 하는 사형 집행인들이 왜곡하여 쓴 텍스트’인 것입니다.

 

그런데 신화는 이런 박해 기제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지라르는 박해의 텍스트(교본)에는 4가지의 정해진 틀(상투형(常套型))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상투형들은 1) 폭력은 실재하며  2) 위기도 실재하며 3) 희생물은 죄 때문에 선택되는 것이 아니라, 표지(標識) 때문에 선택되며  4) 희생물이 이 위기의 책임을 떠맡고 그 공동체에서 쫓겨난다는 것을, 확인하게 해준다는 것입니다. 이 도식은 보편적이며, 어느 사회에서나 찾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도식을 교묘하게 간직하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신화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소위 ‘정의 사회 구현의 신화’도 이 도식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나사렛 사람 

 

그들, 사형 집행인들은 ‘건국(?) 신화’를 만들기 위해 희생양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희생양은 ‘희생양의 표지(標識)’가 있어야만 했습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요1:46).” 

 

  ‘나사렛 사람’ 

 

그것은 양질(良質)의 ‘희생양 표지’였습니다. 그들 사형 집행인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죄(罪)’가 아니라 ‘어느 동네 사람이냐’라는 ‘표지’였기 때문입니다.

 

  "Off with him! Off with him! Crucify him!!"  

  “없애버리시오! 없애버리시오! 그를 십자가에 못박으시오!!”(요19:15) 

 

일정한 상황(무차별화, 혼돈) 아래서, 일정한 조건에 들어맞는(나사렛 사람), 구체적인 말(죽여 마땅해)은 때때로 사람들의 정열에 불을 붙이고, 특수한 혁명적 상황 아래서 대중을 자극하여 행동하게 하는, 무섭고 위험한 힘을 갖고 있음이 백일하에 증명된 것입니다. 그것은 광란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땅의 사람들은 왜곡된 말의 폭력 앞에 우매한 민중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형집행인들이 왜곡하여 쓴 말의 폭력. 그 충성된 시녀는 신문, 방송 매체였습니다. 아니 불행하게도 그 당시 KBS 9시 뉴스와 동일한 일부 강단의 설교들이었습니다. 그것은 ‘힘이 곧 정의’라는 텍스트를 굳게 믿는 이들이, 사형 집행인의 왜곡된 텍스트를 토씨하나 놓치지 않고 충실하게 읽어 내려 간 본문 설교였습니다. ‘희생된 자는 죽여 마땅한 존재’라고 강요하는 신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해서, 이 땅에서 영생복락을 누리길 원한 이들의, 지원 사격이었습니다. 비명에 간 저들의 외마디 절규에 귀막고, 차마 죽지 못해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조롱이나 하듯 우리는 그렇게 그 신화에 충실했었는지도 모릅니다.

 

누가 무죄(無罪)인가

 

지라르는 텍스트 중의 텍스트인 성경은 ‘희생된 자가 무죄(無罪)’임을 선언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대부분의 신화들이 몇몇 예를 제외하고는 사회 건설적 살인을 정당화하고, 그 살인의 흔적을 지워, 사회 건설적 살인이란 없다고 사람들에게 믿게 하려고 애를 쓰지만, 그래서 ‘인류는 이 살인에서 깨끗하다’고 설복하지만, 성서에서는 그 반대로 행한다고 말합니다.  

 

성경은 ‘희생된 자가 무죄’하다는 것을 소리 높여 외침으로써 가해자들의 폭력의 신화를 날카롭게 고발한다는 것입니다. 성서에 대한 지라르의 관심은 성서가 희생양에 대해서 계시적인 텍스트라는 것만이 아니라, 성서에 의해서야 ‘희생양이 무죄라는 것을 감추려는 텍스트들’의 진짜 모습이 드러나는 것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신약성서의 핵심 부분이랄 수 있는 예수의 수난 기록의 구조는 박해자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피해자의 입장에서이며, 그래서 사형집행인들의 박해 체계가 어쩔 수 없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편들기

 

그런데 우리 교회는 그 동안 어느 편에 서 있었던가?  한번 냉정히 돌이켜 봐야 할 것입니다. 예언자적 삶을 살려다 한때 투옥 당하는 등 숱한 고초를 겪으셨던 어느 목사님께서는 “내가 받은 시련 중 제일 컸던 것은 외부 사람들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동역자들의 백안시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마저, 의를 위하여 핍박당하는 자를 경원시함으로, 그리고는 힘을 가진 자와의 자기 동일시로, 이 땅에서 세도를 부리고 싶어하는 속물적 가치관에, 너무도 깊이 물들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바로 교회의 이 세속적인 힘과의 자기 동일시함이, 성(聖)과 속(俗), 시(是)와 비(非)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들고 말았던 것입니다. 세상 권력자의 눈으로 사람보기. 그래서 사형집행인의 왜곡된 텍스트(신문, 방송이 전해준 말)와 텍스트 중의 텍스트인 성경이 말하는 진리를, 혼동하며 사는 무차별 현상이 한국교회에 만연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 무렵 어떤 목사님께서 이런 불평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자기 교회 한 신자가 교회를 떠났다는 겁니다. “목사님 성경 말씀만 전해 주십시오”라는 요청을 하면서. 그 목사님은 이렇게 항변했습니다. ‘나는 신문에 나온 대로만 이야기했는데....’ 그렇습니다. 그 목사님은, 의도적이었건 아니었건 간에 ‘신문에 나온 대로만 말하는 것이 곧 바른 텍스트 읽기의 실패’라는 것을 간과(看過)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를 위해 극히 제한적으로, 일방적으로, 아전인수(我田引水)격으로 쏘아 대는 사형집행인의 텍스트에는 시(是)와 비(非)도, 성(聖)과속(俗)도, 정의와 불의도, 순수와 비순수의 구분도 있을 수 없습니다. 

 

진리도 하나, 선택도 하나

 

성도(聖徒)란 누구입니까? 이 성도(聖徒)라는 단어의 문자적 의미를 한번 살펴봅시다. 이는 구분이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이 있으며, 참과 거짓이 있다는 말입니다. 진리와 비진리가 있다는 말입니다. 빛과 어두움이 있듯이,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이 있는 것입니다. 편들어 줘야 할 사람과 질책하고 나무라야 할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가서는 안 될 자리가 있고, 무슨 일이 있더라도 가야할 자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에게는 바로 이런 선택적 결단의 삶이 요청되고 있다는 말입니다.  

 

“어느 민족 누구 게나 결단할 때 있나니/ 참과 거짓 싸울 때에 어느 편에 설 건가/ 주가 주신 새 목표가 우리 앞에 보이니/ 빛과 어둠 사이에서 선택하며 살리라.” 우리는 이렇게 찬송하지 않습니까?  

 

성경은 양비양시론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너도 옳고 너도 옳다거나, 너도 나쁘고 너도 나쁘다 라는 식의 중재는 엄밀하게 말하면 가해자 편에, 사형 집행인의 편에 선 것입니다. 이 같은 사실을 우리의 짧은 왜곡된 역사가 실증적으로 증명해 주고 있는 것 아닙니까?   

 

진리가 하나이듯, 선택도 하나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 성도는 둘중 하나를 택하며 사는 사람인 것입니다. 성도는 텍스트 중의 텍스트인 성경 말씀의 교훈을 따라 선택하며 살아야할 고결한 존재인 것입니다. 이 시대의 어둠은 어쩌면 진리에 대한 변별력을 상실한 신앙인들의 편벽(偏僻)된 신앙고백이, 자초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다시 예수

 

한번 묻고 싶습니다. 당신들의 예수는 어떤 분입니까? 사탄이 무죄(無罪)한 사람을 유죄(有罪)라고 규탄하는 검사라면, 예수는 모든 박해와 싸움에 있어서 성령-변호사이십니다. 사탄은 모든 거짓 질서의 시원(始原)에 있는 왕자이며, 사탄의 질서에서는, 살인 이외의 다른 질서가 없으며, 이 살인이 곧 거짓인 것입니다. 사탄은 박해의 원천이며, 속죄양을 만드는 왕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속죄양의 수난은 이유 없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유 없는, 죄 없는 수난도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것입니다. 희생된 자들은 유죄라는 사형집행인들의 신화 만들기는 거짓임을 몸으로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예루살렘’이 경멸하는 ‘나사렛’ 사람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결단코 ‘나사렛 사람’이 유죄 일 수 없음을 실천적 삶을 통해 극명하게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분은 흠 없고 티 없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셨습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사형 집행인인 백부장도, 그분의 무죄(無罪)를 선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분의 거룩한 피가, 남편을 찾으러 길 나섰다가 뱃속의 아이와 함께 총 맞아 죽어, 잔인한 5월의 상징이 된 한 여인의 희생이, 어떤 이들의 신앙고백처럼 ‘구석구석의 악의 제거’가 아니라, 정녕 무죄한 피임을 증거해 주신 것입니다.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는 주 예수를 깊이 아는 것입니다. 그 예수는 어떤 분이십니까? 신령한 찬송은 우리에게 예수님은 누구신가를 아주 쉽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신가, 우는 자의 위로요, 없는 자의 풍성이며, 천한 자의 높음과 잡힌 자의 놓임이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이 우리의 진정한 기쁨이 되실 수 있는 것입니다. 만일 이 땅의 교회가 이러한 원초적 신앙고백을 잃었다고 한다면, 그래서 어떤 이들이 교회를 향해 돌을 던지고 있다고 한다면, 이제라도 우리는 ‘다시 예수’를 깊이 아는 은혜를 회복해야 할 것입니다. 

 

귀먹은 하나님

 

딸아이의 질문에 나는 순간 무척 당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문득 되살아 오는 장면, 장면들. 그리고 무거운 죄의식.  그것은 살아남은 자의 깊은 슬픔이었습니다. 난 그 녀석을 끌어안으며, 이렇게 얼버무렸습니다. 

 

“그런 거 묻지 마, 입장 곤란하게---.”

 

난 딸아이에게, 그때 기도라도 했었노라고 말할 수도 없었습니다. 사실 나는 그때 기도도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나의 하나님은, 난생 처음으로 귀먹은 하나님이셨기 때문입니다. “강도야! 강도!” 이렇게 소리를 지를 수도 없었습니다. 아무도 그 진실을 믿으려고도, 귀기울여 주려고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라도 허탄하고 망령된 신화의 신비를, 한 거풀이라도 벗겨보려고 한, 작은 사건(T.V 드라마) 앞에 다시 전율하며 서는 것입니다.  

 

아테네의 연사들에겐, 감정에 대한 호소가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감정에 호소하는 것을 악으로 간주하고, 재판관이 감정에 대한 호소 때문에, 사실을 보는 눈이 흐려지는 것을 부도덕하다고 생각하며, 선한 사람이, 자신의 목적을 위해 나쁜 절차들을 이용하는 것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진실과 정의가, 승리를 획득할 수 있는 다른 수단이 없을 때에는, 감정에 호소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인정했던 것입니다.  

 

감정적이라고 그들을 욕해선 안될 것입니다. 마음의 문을 열고 그들의 거친 심장의 고동 소리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그래야 우리 모두가 건강해 질 것입니다. 

 

사족(蛇足)입니다.  

그날 밤, 불을 끄고 누우면서 허공에다 대고 난 이렇게 내뱉었습니다.

 

“ ‘모래 시계,’ 그거라도 봐줘라.”

“ 인정해라. 나사렛에서 진실로 선한 사람이 났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