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3134: 빌립보서 십자가 신학

2019.05.26 16:57

관리자 조회 수:39

빌립보서를 공부하며, 승리의 신학, 번영 신학에 물든 우리네 목회 현실을, 나는 에바브로디도의 와병에 가슴 졸이던 목회자 바울을 통해 진단해 본다.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총회가 눈앞이다. 교단 수장이 되고자 하는 이들과 그 소속교회들은 승리의 신학에 목숨 걸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득표전에 올인하며, 성총회를 난장으로 만들고 있다.

 

어느핸가, 어느 교회 목사는 교단 수장에 당선 되어야만 목회 생명도 연장시켜 주겠다는 당회의 결의를, 가련하게 내세우며 득표 활동을 했었다.  그는 그 호소로 당선 됐고, 목회 생명도 연장 됐었다.

 

이는 단적으로 교권 쟁취를 승리(번영) 신학의 최종 목표를 삼았다는 말이다.

 

에바브로디도의 병세에 바울의 목회적 성패가 달려 있었다. 목회도 시대적 산물이라서, 당시 그레코-로만 사회에서는 질병은 대개 영적인 문제와 연관시켜 생각하였다. 당연히 에바브로디도의 병세는 그 진전 상황에 따라 바울 자신과 빌립보 교인들에게 어떤 방향으로든 영향을 끼칠 것이 분명했다.

 

만일 목회자 바울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내가 쓸 것을 돕는 자(빌2:25)”인 에바브로디도가 병세가 악화 되어 죽기라도 한다면(첫번째 근심), 빌립보교회 교우들에게 당할 모진 비판(사이비 전도자 등등, 두번째 근심) 때문에, 바울은 근심 위에 근심을 했다는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의 십자가의 신학이 빌립보교회가 신봉하는 승리/번영의 신학에 의해 모질게 매도 될 것, 또한 불보듯 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또 다른 총회 선거에서, 그 어떤 선배가 그 때 부총회장 선거에서 실패하지 않았더라면, 적어도 그 교회에서 쫓기듯 내몰리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샤머니즘적 승리/번영 신학에 물든 교회와 교인들에게 오늘의 목회자들도 위협을 받고 있다.

 

그러나 다행히 바울은 하나님의 긍휼로 그 위기를 모면한다.

 

그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이 그를 긍휼히 여기셨고 그뿐 아니라 또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내 근심 위에 근심을 면하게 하셨느니라(빌2:27)

 

이런 바울의 승리의 신학에 대해, 쟝 깔뱅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죽음이란, 이 세상의 모든 고통과 죄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것인데, 살아나게 된 것을 (하나님의) 자비라 할 수 있는가?”라고 원리주의적 태클(?)을 건다.

 

그러나 바울은 승리주의자들처럼 자신의 기도로 에바브로디도가 치유 되었다고 떠벌이지 않는다. 단지 ‘하나님의 긍휼’이라고만 소극적으로 표현한다. 

 

 “빌립보서에서 바울이 치유의 능력을 전면에 내세우는 승리주의와 대결하고 있다는 관점에서 본다면, 치유에 대한 바울의 소극적인 표현은 이해가 충분하다. ... 만약 병을 고쳐주지 않으신다면, 그 나름대로 (하나님의) 깊은 뜻이 있을 것이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빌립보 신학의 강조점이다. 바울의 십자가 신학은 승리주의자들과 정면으로 대결하는 신학이다.”(박영호)

 

그렇다. 바울은 십자가 신학으로 난국을 정면 돌파한다. 자신의 과시할만한 이력을 배설물로 여기며, 십자가로만 이루는 부활 신앙의 기치만을 높이 든다. 

 

부총회장에 당선 되어야 하는 근심에 만일 부총회장에 당선 되지 못하면 교회가 내뱉을 독한 평가에 대한 근심으로, 근심 위에 근심을 하는 이들이 새겨 들어야할 말씀이다.

 

착하고 충성 된 성도의 자녀는 대학 입시에 실패하는데, 불신자의 자녀들은 좋은 대학에 입학하는 사태(?)를 놓고, 우리의 믿음이 헛된 것이라고 여긴다면, 우리는 부활장에서 목회자 바울 사도가 힘주어 강조했던 이 구절을 묵상해 봐야 한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전15:19).”

 

적어도 우리는 ‘더욱 불쌍한 자’가 되어서는 안 될 것 아닌가?

 

십자가의 승리는 <죽음> 이후 부활로 완성 된다. 이것이 참된 승리의 신학이요, 영생무궁할 번영 신학이다.

 

나도 총회 선거에 나섰던 적이 있었다. 

 

나는 대부분 전화 연락도 하지 않고 목사 대의원들을 교회로 찾아갔다. 있으면 만나고, 안 계시면 그냥 지나쳤다. 왜냐하면 시간을 뺏는 부담을 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단돈 한푼도 내가 찾아갔던 대의원들에게 준 적이 없다. 밥도 새벽에 만난 딱 한 사람 콩나물국밥 사 준 적 외엔 기억이 없다. 가급적 식사 시간대를 의도적으로 피했기 때문이다. 선거법을 철저하게 준수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히려 매번 귀경하던 내 호주머니에는 현찰이 가득했었다. 나는 돈을 주고 표를 얻지 않았다. 오히려 장삼이사의 자발적인 후원을 받으며 선거전을 치렀다. 

 

타 후보에 대한 악평 한 마디 내뱉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선거 기간 중에 공갈 협박성 괴문서를 나를 비롯한 몇몇 후보에게 보낸 자가 있었다. 

 

나중에 그는 그 증거 인멸하려고, 자신이 받은 괴문서를 분실했다며, 나에게 그 괴문서를 자신에게 보내주면 자신이 대표로 검찰에 고발하겠다며, 보내달라고 신신당부해서, 나는 순진하게 사본도 안 떠놓고, 지문 묻을까봐 핀셋으로 그 괴문서를 집어 봉투에 넣어 보냈었다. 

 

나는 그 괴문서 발송자가 누군인지 안다. 증거물과 증언도 확보해 놨었다. 나는 그 선거 기간 동안에 있었던 모든 일들을 깨알 같이 기록해 놨다. 그랬어도 나는 그에게 어떤 보복도 하지 않았다. 

 

누가 승리자인지는 지금은 아무도 모른다. 적어도 나는 선거법을 지킨 양심 승리자라는 자긍심만은 가지고 있다. 그리고 선거 결과 나는 그 누가 나를 도왔느니, 돕지 않았느니 단 한마디 원망이나 시비를 해 본 적이 없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내가 바울처럼 십자가 신학에 깊은 내공을 지닌 자였다는 말이 아니다. 단지 나는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 했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 부끄러움이 상대적으로 덜했기에 그랬던 거다. 

 

그리고 그 선거 기간을 통해 내가 반성하며 배운 한가지, 이제 후로는 그 누구든지 나를 찾아 온 이에게는 최선 다해 영접해야 한다는 귀한 교훈을 얻었다. 나를 찾아 온 손님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각성을 새롭게 했다. 오가며 식사 등 접대도 많이 받았었다. 허락 되는대로 갚을 거다. 한가지 놀라운 사실은 나그네인 나를 선대했던 이들을 하나님께서 선대하심을 나는 생생하게 목도하고 있다.

 

막판에 사족 같은 내 이야기를 써서 미안하다. 

 

빌립보서를 공부하면서, 새삼스레 목회자 바울의 목회적 애환을 함께 앓는 한 주간을 보내고 있다.

 

그러면서 바울 사역 전체가 승리주의자와의 대결에서 승리하느냐 패배하느냐의 문제와 연관 되어 있음을 배운다. 

 

“바울은 이 문제를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모범을 따르느냐, 아니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빌3:18)하느냐 라는 신학적 문제로 연결시키고 있다.”(박영호)

 

교권이 뭐라고, 

우리 십자가의 원수로 행해서는 안 되는 것 아닐까?

 

빌립보서 3장 [개역개정]

 

18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19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20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21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아멘

 

2019.05.24(금) 오후1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