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자원 입국을 허하지 않는 곳이
천국이더라
지원병 모집 공고를 기다리다가
어젯밤도 선잠을 잤다던

그가 그랬다

흔적 없이 사라지려고 하는데
2만 여권이 넘는 책이 문제더라

채무 인생으로 마감하는 그가
빚 잔치하듯
헌혈로 모은 현기증나는 장서를
유분처럼 흩뿌릴 유택을 찾고 있다는 말을 들으며
셋방살이로 일관한 자신의 인생 데자뷰를
그가 유언처럼 써내려가고 있다 여겨진다

일생 제 가진 것
모두 다
이내 비자 나올 줄 알고
그의 나라 확장을 위해 깡끄리 헌납했기에
제 몸 누일 초막 한 칸 없이
외려 짐 된 천국 안내 서적들에 치어
이만하면 됐다 여긴 이만 여권 책으로도
쉬이 넘어서지 못해 천국 문턱에 걸려 넘어지며
책도 사지마라 헛되고 헛된 수고니라
에피메테우스의 역설* 골빈 무소유를 계몽하고 있다

건강 어떠슈
라고 물어왔다, 내게

많이 살았잖아

예행연습하느라
중천에 해가 뜬 시각까지 자리를 보전하고 있다가
답했다

새날이다
하루 더 천국이 가까왔나니

버리고 갈 이만 여권의 책도 없는
휴거에 딱 적합한 체중이니

2020.02.14(금) 오전 9:59이 지나고 있다

*
에피메니데스의 역설은 다음과 같은 추론에 따라 모순에 봉착한다.

에피메니데스는 '모든 크레타인은 거짓말쟁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이 맞다고 전제한다면, 모든 크레타인은 거짓말쟁이이다.
그런데 에피메니데스는 크레타인이다.
고로 에피메니데스는 거짓말쟁이다.
거짓말쟁이의 말은 거짓말이므로, 에피메니데스의 말은 거짓말이다.
에피메니데스의 말이 거짓말이므로, 모든 크레타인은 거짓말쟁이가 아니다.
위의 추론에서, 2번 항목과 6번 항목은 서로 모순된 내용을 갖지만, 두 항목 모두 올바른 추론에 따라 나온 결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