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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65: 신자의 삶의 이치

2021.02.01 14:28

관리자 조회 수:3

복약 후, 아침을 끓이고 있다. 아내가 기도하러 나갔기에, 어찌할 수 없어서 그렇다. 첫 경험은 늘 설레나, 서툴다. 설레기에 서툴고, 서툴기에 설렌다. 끓어 넘치는 밥물을 연신 불어 가라앉히느라 불 곁에 딱 붙어 애를 먹고 있다. 먹기 쉬운 죽을 끓이는 일이 애를 다하는 일임을 깨닫는다. 함부로 ‘쉬운 죽’이라거나, ‘죽’을 맛 운운해서는 안될 것 같다.

그러다가 문득 빌립보서 4장 말씀이 떠올랐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1~14).”

이 말씀은 믿음에 대한 서술이 아니다. 이는 믿는 자(信者)로서의 삶을 대하는 ‘이치’를 일러주는 말씀이다. 그런데 우리는 13절 말씀만 떼내어 이 본문이, 마치 예수께서 귀신 들린 아이를 붙들고 어찌할 바 몰라하는 제자들을 꾸짖으시며 강조하신 ‘믿음’ 곧 마치 ‘산을 옮길 만한 믿음’(마17:20)의 역사를 이루는 비법이라고, 우리는 강단에서 힘주어 외쳐 왔다. 문맥의 흐름을 제대로 파악해야 본문의 참 뜻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문맥의 흐름을 무시하거나, 의도적으로 차단해 버리고, 자기 입맛에 맞는 부분만 똑 따내어 말씀 삼아 왔다. 그렇다. 이 마태복음 17장에 나온 ‘예수께서 귀신 들린 아이를 고치신 사건’은 마가복음 9장에도 나온다. 마가복음 9장에서는 예수께서 그 아이의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귀신이 그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23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24 곧 그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러 이르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하더라(막9:22~24).”

그렇다. 다시 말해서 빌립보서 4장 13절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씀이 마가복음 9장 23절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는 말씀과 동일하지 않다. 마가복음 9장에서는 ‘믿음’을 강조했다면, 빌립보서 4장에서는 신자(信者)인 사도 바울이 자신이 터득한 믿는 자들의 삶의 이치를 말해 주고 있다. 세파를 타는 믿는 자들의 기복 많은 삶에 있어서, 평정을 유지할 수 있는 일체의 비결을 이루는 힘이, 예수 안에 있다는 말씀이다. 그런 ‘이치’를 바울이 온몸으로 깨달아 알았다는 말씀이다. 그래, 내 욕망을 다 채워주는 만능 키가 예수라는 말이 아니다. 

팔팔 끓여 된밥이 연한 죽이 되게 불길을 확 열어주거나, 끓어 넘치지 못하게 밥물을 불어 가라앉혀주는 이 모든 일이 불 곁을 지키고 있는 내가 있어 가능하듯, 내 인생 요리는 그분이 내 안에 거하심으로만 요리된다는 말씀이 아닐까? 

살기 위해 먹는 거냐? 다시는 입맛을 위한 거냐?

들었던 소피스트적 의문에, 내 안에,거하시는 성령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답해 주신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

살기 위해 먹는 거냐? 다시는 입맛을 위한 거냐?

둘 다 적절하지 않다.

내가 밥을 먹든, 죽을 먹든, 살기 위함이든, 다시는 입맛을 위함이든,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그래그래 

굳게 믿는다.

아멘아멘!!

2021.01.30(토) 오전 9:20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