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상기도에 대하여
2007.12.10 08:43
(질문) 관상기도라는 말을 들었는데 내용, 방법, 장단점을 알고 싶습니다
(답변) 관상기도(觀想祈禱, contemplative prayer)는 캐톨릭의 묵상기도가 발전한 상태의 기도를 말하는데, 이런 기도의 본질은 직관에 의존한 기도입니다. 기독교 기도라 할 수 없습니다. 예수회 창설자 로욜라가 시작한 것입니다. 내용과 방법은 다음 글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이 글은 감신대 출신히여 녹색살림야간학교 교사인 박운양 선생과 크리스천 저널과의 인터뷰 글입니다. 관상기도에 대한 긍정적인 글입니다.
관상기도는 하나님에 대한 언어. 상상. 표상을 최소한으로 줄이거나 전혀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과 친밀히 사귀는 마음의 기도입니다. 한마디로 주님을 어떤 가림도 없이 직관적으로 바라보고 알고 사랑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관상기도는 전적인 침묵을 요구하는데 언어 뿐 아니라 마음과 생각과 의지까지도 침묵을 요구합니다.
관상기도는 나를 철저히 비우고 하나님이 알아서 채울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관상기도는 자기가 아닌 하나님이 들어오셔서 활동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어떤 명령이 떨어질 지 항상 준비하는 자세이고 명령이 떨어지면 순종하는 자세입니다. 관상기도에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간디의 통찰처럼 ‘세상을 구원하려는 행동이 없는 기도는 정신적인 사치일 뿐이다’라는 관점에 동의하게 됩니다.
관상기도를 드리는 이들은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모든 관계를 그 틀 안에서 성찰합니다. 한마디로 관상기도는 영성생활의 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관상기도의 방법을 크게 세 단계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단계는 마음의 평정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정신이 통일되거나 마음이 온전히 하나 될 때까지 그저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을 뜻합니다. 마음의 평정을 이루려면 편안하게 자리에 앉아서 천천히 그리고 신중하게 모든 긴장과 걱정을 내버리는 것입니다. 그 다음 하나님의 임재를 느껴보아야 합니다. 걱정거리가 생기거나 정신이 산만해지면 그것을 다만 아버지께서 해결해 주시도록 맡겨야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소동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풀어 버리는 것입니다. 마음의 평정이란 내버리는 것이며 풀어 주는 것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고요의 단계입니다. 마음의 평정을 통해 마음속의 온갖 방해 요인들과 정신을 분산시키는 것들과 의지를 박약하게 하는 것들을 모두 내버리기 때문에 내적으로 하나님의 움직임에 민감해지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의 존재 중심에는 요동하지 아니하는 고요함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는 고요함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바짝 긴장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방심하지 않고 귀를 기울이는 상태가 됩니다. 마음속에서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는 마음의 응시가 있는데 그것은 때때로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뜨거운 임재를 체험하며 주님의 가까이 계심과 주님의 사랑을 느끼게 됩니다.
세 번째 단계는 영적인 신비 체험으로 황홀경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역사하시는 일이라는 점에서 앞의 두 단계와는 아주 다릅니다.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에게 역사하시도록 끊임없이 마음을 열어 놓고 받아드릴 준비를 갖추는 것이 필요합니다.
교만할지 모르지만 전 하루 종일 관상기도를 합니다. 다른 이들에게 말을 할 때도 기도하는 마음으로 하고 들을 때도 그 속에서 울려 퍼지는 하나님의 음성에 민감하게 반응하려고 노력합니다. 글을 쓸 때도 제 힘으로 머리를 쥐어 짜내서 하기보다는 하나님이 주시는 감동으로 쓰려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씁니다.
특별히 ‘렉치오 디비나(Lectio Divina)’를 병행하는데 이 렉치오 디비나를 설명 드리자면 베네딕트 수도원의 전통으로부터 비롯된 시각과 청각을 이용한 독서식 명상기도법을 말합니다. 독서를 통해서 읽는 이와 본문이 상호 작용하면서 본문이 개인의 영혼과 개인의 상황으로 파고들게 됩니다. 그 결과로서 영혼은 영적인 가치 혹은 영적인 세계와의 접촉을 경험하는 체험을 할 수 있습니다. 독서방법을 살피면
△ 은밀한 장소에서 선택된 본문을 반복해서 읽습니다.
△ 그리고 본문에 대해서 생각하고 명상하고 그 안에 머뭅니다.
△ ‘읽기’는 단순한 반복으로 출발하여 점점 그 내용을 반추하고 마음의 눈으로 성서의 장면을 영상화시킵니다.
△ 거룩한 독서가 진행되는 동안 잡념이 반드시 떠오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마음을 이미 읽은 본문에 초점을 맞추도록 노력합니다. 그리고 조용히 본문으로 거듭 돌아갑니다.
△ 특히 주의할 것은 독서를 할 때 비평적이고 분석적인 기능은 멈추는 것이 좋습니다.
△ 내면적으로 초점이 맞추어졌으면 천천히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선택한 말씀을 읽습니다. 읽다가 단어나 문장에 머물러 그 깊은 의미를 묵상하면서 머물러 있습니다.
참고서적은 <십자가의 성요한>과 <사막교부들의 금언>이라는 책입니다. 그리고 현대의 대표적인 영성가인 토머스 머튼 그리고 다석 유영모 선생님의 책도 큰 울림을 줍니다. 복음주의자인 유진 피터슨의 책도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가장 큰 경향을 받은 이는 아빌라의 <테레사>입니다. <현대의 마더 테레사>라는 책도 참 좋습니다. 그리고 이미 널리 알려진 헨리 나우웬의 책도 권하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본회퍼 목사님의 <나를 따르라>를 소개합니다.
이 렉치오 디비나는 하나님과의 진지한 관계형성을 위한 기도이며, 내면적인 영성을 형성하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독서와 기도가 수렴되어 통합되는 것입니다. 독서와 기도를 통해서 우리를 하나님과 만나게 하고 해방하게 하며, 하나님의 자유로운 능력을 통하여 우리에게 하나님의 지혜에로의 여행을 가능하게 하고 성령께서 자유롭게 우리를 변화시키도록 허락하는 것입니다.
▶ 혹시 자기 생각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착각하게 될 가능성도 많을 거 같은데요?
맞습니다. 따라서 렉치오 디비나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영성의 대가들의 독서방법을 통해서 계속해서 나에게 다가온 생각이 하나님 뜻에 맞는지 지속적으로 비교하면서 확인해야 하고 그리고 또한 모든 내밀한 고민을 이야기하고 기도해 줄 수 있는 멘토가 있어야 합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김기석 목사님같이 제가 모든 면에서 모델로 삼을 수 있는 멘토로 허락하셨습니다. 오늘 이 인터뷰도 목사님과 먼저 기도하고 상의하고 출연하게 되었습니다. 멘토를 통해서 반드시 자문을 받아야 합니다. 이 과정이 빠지게 되면 대단히 위험하고 오히려 관상기도가 치명적인 독이 될 수도 있습니다.
▶ ‘관상 기도’가 박운양 선생의 실제 생활에 구체적으로 어떤 영향을 줬는지 궁금한데요, 직접 체험했던 사례 몇 가지를 자세하게 소개해 주십시오.
방언이 터지거나하는 신비한 체험은 죄송하지만 전혀 없습니다. 다만 삶이 근본적으로 달라집니다. 거의 매순간 하나님의 임재의 틀 안에서 생활하게 됩니다. 이것이 부담이 아니라 엄마 품안의 아기처럼 편안한 따스한 온화한 부드러운 느낌으로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저는 감리교에서 대표적인 K교회의 K 목사님을 저도 존경합니다. 그래서 신학대에 오기 전에 그 분이 감독회장으로 있을 때는 집으로 매주 보내졌던 그 분의 <불기둥>이라는 소책자에 실린 설교를 읽고서 많은 감명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분은 그 K교회에서는 인정을 받는지 몰라도 일반인들에게는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분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담임자가 성적인 추문을 일으키고 재정 비리를 일으켰는데 어떻게 교회에 계속 남아서 목회를 할 수 있느냐’ 는 것이지요. 사실 제가 <뉴스앤조이>에 올렸던 글도 그 고민의 산물이었습니다. 전 그 K목사님이 그렇게 되신 것은 하나님 임재연습에 실패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만일 그분이 관상기도를 익숙하게 드릴 수 있었다면 전 결코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믿습니다.
관상기도를 하는 도중에 제일 힘든 것이 성적인 생각에 사로잡힐 때입니다 .아직 저도 37세 밖에 안 된 젊은 나이이기 때문에 이성(異性)적인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면 괴롭습니다. 그러나 이 관상기도를 하면서 완전히는 아니지만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보다 많은 에너지를 기도를 하면서 얻게 된 깨달음으로 삶 속에서의 구체적인 실천을 고민하고 집중하는데 쓰여 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관상기도가 익숙하지 못했을 때는 냄비처럼 한때 반짝해서 일을 벌였다가 책임지지 못해서 주위 사람들에게 아픔을 주었던 적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먼저 말실수가 사라졌습니다. 우리가 생활하면서 말실수 때문에 얼마나 곤혹스런 상황을 많이 당하게 됩니까? 그리고 의욕적으로 열정이 생각게 되면 주위 사람들에게 왜 저들은 나처럼 따라 주지 않을까? 하고 그들을 재촉하거나 다그치기 쉽습니다. 한마디로 조급해 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완전히는 아니지만 이제는 하나님 임재연습을 통해서 많이 자유해 졌기 때문에, 결과에 대한 조급함도 사람들에 대한 서운함도 그렇게 저를 괴롭히지 않습니다. 그저 그때그때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 헤아리고 기도하고 생각을 주시면 고민하고 멘토 김기석 목사님과 상의하고 그리고 실천합니다. 물론 실수는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실수는 대부분 극복할 수 있는 실수이지 치명적인 실수는 하지 않게 됩니다.
(1) 다분히 인본주의적 영성훈련의 산물입니다. 참된 기도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와 같이 먼저 하나님의 뜻을 묻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에서 가르치신 모범기도문처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일용할 양식을 구하고, 서로의 빚진 것을 탕감해 주며, 시험에 들지말고 악에서 구하여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관상기도는 뉴에이지 운동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우리는 관상보다는 말씀과 찬양가운데 하나님의 거룩함에 참여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해야 합니다
(2) 관상은 다분히 불교의 선(禪 Zen) 냄새가 납니다. 방법,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는 자는 수도중인 로욜라 이그나티우스의 영성훈련의 한 모습임을 쉬이 알 수 있습니다. 로욜라 이그나티우스(1491 Spain에서 출생, 마틴 루터와 비슷한 시대에 출생하였습니다). 반개혁운동으로 캐톨릭안에서 개혁운동으로 영성운동을 시작했습니다. 4주간 영성훈련을 하기 위해 Society of Jesus (=Jesuit)조직했습니다. 예수를 위한 기사가 되기 위해 1522년에 고해성사를 하고 바로 성지순례하였습니다. ‘영성훈련의 책’ (영신수련, 분도출판사)을 저술하였고 1537년 사제로 서품을 받았고, 예수회 종파로 교황으로부터 인정받습니다. 로마에서 운명되었는데, 회원의 수가 1000명을 쉽게 채웠답니다. 중국의 마태오 릿지, 초기 조선의 캐톨릭 신자들(이승훈, 정약용) 모두 예수회 소속입니다. 한국의 서강대, 효성여대, 미국의 Boston College, Notre Dame University, Fordham University 등이 예수회 소속입니다. 그들의 구호는 “학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아라” 하며 개신교도들을 캐톨릭으로 돌아오게 하는데 최선을 다합니다. 오감을 이용하여 imagination을 합니다.
영성훈련의 목적
1) 사람들이 자기 죄를 인정, 사죄하게 한다; 내가 누구인가 ?
2) 성화과정 issue of vocation
3) 선교과정 issue of mission
실천적 영성신학입니다.
4주 내용: 1) 사람의 목적 ? 2) 3) 그리스도의 신비 체험 4) 진실한 그리스도인
3) 침묵, 묵상기도, 관상기도는 영성계발로 (타종교도 신이 되기 위한 영성계발), 불교의 요가, 명상 TM
mind control (이의 목적은 해탈, 운명에서 탈출하기 위해)과 흡사합니다.
동방기독교에 5세기 호흡기도가 시작됨 (불교의 기도와 유사)
자기가 원하는 것을 절대 기도하지 않고 철저하게 듣는 기도를 한다. - 수동적인 기도, not active prayer
Catapatic way - 말씀을 받고 묵상하며 기도 (Lectio divina)
- 마음을 완전히 비우고,
4) 상상력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좋은 선물로 여깁니다. 과연 성서적인지요?
관상기도를 엄마 품의 어린이의 모습으로 이해하는데 영성신학에 깊이 들어가면 다원주의 pluralistic, 종교다원주의에 빠집니다. 영성가인 토마스 멀톤은 태국에 가서 불상 앞에서 신비를 느낀다고 고백했습니다.
결론적으로 관상기도를 분별없이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성경에도 이삭의 묵상기도(창 24장), 시편 1편의 묵상(hegeh)라는 동사는 영적인 호흡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쉬지말고 기도하기 위해 기도를 우리 영혼의 호흡으로 삼아 우리의 삶, 생각, 습관, 학업, 사업, 직장생활, 운전중에도 기도의 생활화가 이루어지는 것이 하나님께 열납되는 기도생활입니다.
우리는 성경적, 복음적, 영적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관상기도를 거부합니다.
* 관리자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8-07-19 22:38)댓글 13
-
윤목사
2007.12.11 14:43
-
김삼
2007.12.11 14:46
관상기도는 진리의 사각지대
김삼 2007/04/11, 조회 : 3,861, 추천 : 0
사진: 칼 융이 서문을 써준 스즈키의 '선불교' 표지. 오른쪽 사진 출처: novembersong.blogspot.com
-관상영성엔 '경계선'이란 게 없다..이동원의 관상관을 중심으로
관상기도의 '정의'나 신학적 개념을 여기서 구구히 내리긴 싫다. 이미 알려질 대로 알려진 관습이라서 독자도 알아볼 만큼 알아 봤을 테니.
어린아이들은 경고할 수록 나쁜 것에 호기심을 갖는 법이다. 성인들도 마찬가지, 율법이 금할수록 죄를 더 짓지 않나. 그러니 관상이 아무리 위험하다고 해도 할 사람은 뒷구멍으로 다 할 것이다.
"딱 부러진 반론이 없는 이상 나도 조금씩 해 보고 싶다"는 호기심 넘치는 호사가들에게 필자가 아무리 침 튀겨 가며 경고해 본들 무슨 소용이겠나? 그래서 "하지 마라", "하지 마라" 보다도 구체적인 사례로 그 위험을 반증하련다.
관상 담론에서 유의할 것 한 가지는 관상영성은 신교 관상가들의 입바른 주장과는 달리 성경 진리 즉 복음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점. 복음을 초월하여 하는 묵상 형태라는 것이다. 그래서 빠른 속도로 기독교로부터 카톨릭/정교회/불교(티벹불교/일본불교/선불교 포함)/도교/힌두교 등 종파/종교 간 대화 및 에큐메니컬리즘의 촉매가 되고 있다.
관상기도의 텃밭에서는 모든 종파, 더 나아가 모든 종교가 허물 없이 어울리는 게 상식화 돼 있다. 따라서 성경 진리와 영적 분별을 염두에 두면서 관상에 호기심을 갖거나 탐닉하는 성도의 복음 정신은 관상 추구에 방해가 될 것은 당연한 이치다.
예컨대 20세기 관상의 선구자 토머스 머튼이 은둔해 있던 겥세마니 수도원에 티벹 불교의 수장, 달라이 라마까지 와서 머튼의 무덤에 참배를 하고 함께 '미사'에 참여하는 등 아무 부담을 느끼지 않는다.
관상은 복음 없이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유형이라는 점에서 현재 신교계의 관상기도는 복음에다 억지로 끼어 맞추고 있다는 인상을 금치 못한다. 신교계 관상가들의 주장과는 달리 관상은 복음 없이도 얼마든지 가능하며, 따라서 신교계 관상가들이 교회와 복음을 이용하고 있다는 논리도 피해 가지 못한다.
관상을 강조하고 즐긴다는 점에서 토머스 머튼, 존 메인, 리처드 포스터 등 종교다원주의자들이나 한국의 이동원 목사, 미주의 강준민 목사나 아무 차이가 없다. 더욱이 비슷한 형태의 기도를 해온 힌두교도/불교도/도교인/유교인들도 별 부담없이 한데 어울린다는 것이다.
이동원 부부의 영성을 '지도'한 샬렘 인스티튜트
아마 이동원/강준민 같은 사람들은 이런 엄연한 사실을 부정하려 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부정이 아무 의미가 없음을 단적인 사례로 입증해 볼 수 있다.
이동원 목사는 '관상과 행동의 미학'(2002년 8월3일)이란 칼럼에서 그 해 7월 유학생 수련회 '코스타'와 워싱턴 지구촌교회(김만풍 목사)와의 교차사역 후, 1주동안 볼티모어 근교의 '성삼위일체 수도원'에서 '샬렘 인스티튜트'의 영성지도를 따라 부부가 함께 관상기도로 시간을 보냈다고 밝혔다.
이동원 부부를 "영적으로 지도한" 문제의 샬렘 인스티튜트(www.shalem.org)는 종파를 막론하고 '성직자'들과 신도들의 관상영성을 보급해온 단체다. 표면상 그럴듯한 기독교단체 같지만 한 꺼풀 벗기고 보면, '종파'만이 아닌 '종교'의 경계를 자유롭게 초월한다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샬렘 인스티튜트가 실시하고 있는 프로그램들은 필자의 눈을 의심케 한다.
지난해(2006년) 11월4일 메릴랜드 세인트마크장로교회에서 실시한 프로그램의 제목은 '관상 실천으로서의 선(禪, zen)-정의의 길'. 프로그램 소개문엔 일본 불승 바수이 토쿠쇼의 말까지 곁들였다. "그대의 참 본성을 깨우칠 때..그대의 많은 고유의 덕목들을 나타내고 남들과 어울리며, 그들의 삶에 혜택을 주게 된다."
명색이 '장로교회'인 이 장소에서의 웤샵은 선불교(zen buddhism)의 관상을 소개하고 참여자들 전원이 가부좌 자세로 좌선 실습, 걷기 명상을 한 뒤, "선(禪)이 우리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온정적 행위를 구현할 수 있는 한 삶의 길을 보충해 줄 수" 있음을 배운 과정이었다. '선(禪)과 하나님'이라.. 이들이 말하는 하나님은 불교의 자연신과 별 다름 없음을 느끼게 되는 대목이다.
소개문은 또 카톨릭 사제인 라벗 케네디의 책, '선 정신, 기독교 정신: 기독교 삶에서의 선(禪)의 위치'에서 다음 글을 인용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스승 아래서의 선(禪) 실천이 기독교 삶에 결합될 수 있음을 체험했다. 그것은 기독교의 기도 체험을 심화시키고 우리의 신심을 우리의 머리만이 아닌 우리의 전인에 뿌리박게 해 줄 수 있다."
이 홍보문은 "우리 다함께, 이 선의 요소를 통해 그런 결속을 기르도록 힘써 봅시다."로 매듭짓고 있다. 독자는 무심코 읽을지 모르지만 필자는 모골이 송연해질 정도다. 불교식 좌선을 하면, 불도의 영이 속에 찾아들기 때문이다. 그 영이 성령이 보내시는 선한 영인가? 아니면 뭐겠는가?
그런데도 이동원 목사 부부는 바로 이런 단체의 '영성 지도'를 따라 '경건한' 휴가를 보낸 것이다. 이 목사는 이 수도원의 침묵 속에서 보낸 시간의 정적이 태고의 고요 속에 영혼의 평안을 회복시켜 줬고, 주변의 모든 낯선 얼굴들이 넉넉한 우정의 샘물이 됐다고 미사여구를 동원해가며 한껏 관상 홍보(?)를 했다.
그후 카작스탄의 발빠른 일정에도 불구하고 전에 없던 변화의 하나로 전혀 피곤을 느끼지 않았는데 그것이 마음의 여유와 평온을 찾은 '관상의 은총'임을 깨달았단다. 흠~ 하나님의 은총이 아닌, '관상의 은총'이라.. 다원종교적/진리방임적 관상영성은 이런 '치유'도 갖다 준단다.
야웨 하나님, 성자 예수님과 그 분의 말씀을 기뻐함이 우리의 힘이요 독수리 같은 스태미너의 회복의 길이라는 성경 교훈과는 대조적이다(시103:5, 네헤미야8:10).
그는 이어서 "꼴불견의 미성숙한 행동들이 관상을 상실한 현대의 모습"이라고 단언했다. 그렇다면 관상을 하지 않는 복음주의 크리스천들을 포함한 모든 현대인들이 꼴불견의 미성숙한 행동의 미학 아닌 '추학'에 빠져있다고 봐도 되겠는가?
관상가들은 죄다 지고지순의 고상한 성숙한 행동의 미학 속에 사는 사람들이고. 그 '성숙'이 이교를 적극 경계한 성경 진리엔 '깜깜절벽'임을 모른다는 얘기가 아니려나. 입술에 침도 바를 새 없이 '영성'을 부추기는 사람들의 영적 무지를 스스로 폭로한다고 보는 게 더 옳지 않을까?
그런 단체의 영적 '지도'를 받는 이목사 부부에게 모종의 영적 분별이 있었다고 보는가? 샬렘 인스티튜트의 프로그램에 따르면 필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게 된다! 이미 그들의 종교다원적 영성에 동화됐다고밖엔.. 이동원은 '샬렘 인스티튜트'의 이런 마구잡이 식 잡교영성을 참 기독교영성으로 받아들이고 있음이 분명하다. 아니라면 "뭐, 그럴 수도 있지" 식 진리방임주의자가 분명하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한국교회 '최고'의 설교가라니 한국교계의 분별력 또한 알 만하다. 미처 몰랐다고? 오히려..알아보는 데 게으르거나 별로 그러잖고파서 일 것이다. 그러니 이 목사 부부의 이런 막무가내식 '기독교영성'은 지구촌교회 교인들을 비롯한 주변 추종자들에게 고스란히 전수되고 있을 터이다.
샬렘 인스티튜트의 2006년 11월 14일 '래트너 뮤지엄에서의 다종교 침묵의 날' 프로그램 소개문을 한 번 살펴 보자. 우선 '히네이니..마카리쉬 라다하트'(나, 여기 있다. 고요히 반추하며..)라는 힌두교 발문을 서두에 달았다. 뮤지엄 세팅에서의 관상 실험인 이 프로그램에서 이들은 다양한 미술작품이 걸린 회랑을 거닐며 다함께 평화/샬롬과 온전함(wholeness)을 추구하면서 '거룩한 분'의 음성에 귀 기울이는 여로에 참여했단다.
그들이 생각하는 '거룩한 분'은 종교를 초월하는 상상의 신에 불과하다.
이동원의 등식 [카톨릭 영성=기독교 영성]
이동원이 카톨릭에 별 거부감이 없다는 사실은 신교 목사로서 수도원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그 자신이 밝혀 준다. 이동원 등 신교 관상가들이 상투적으로 내세우는 말은 관상영성이 '기독교의 오랜 전통'이라는 것. 그러나 이들이 뒤로 호박씨 까듯 은근히 숨기려는 것 한 가지는 관상이 좀 더 정확하게..카톨릭에서 유래한 전통이란 점이다.
성경에서 비롯되지 않았어도 카톨릭에서 온 것은 모두 기독교 전통인가? 이 말은 이동원 등이 카톨릭을 신교와 다름 없는 기독교로 본다는 관점을 드러낸다.
이동원 등 관상가들이 이런 식으로 카톨릭 전통을 전체 기독교전통으로 받아들인다는 말은 중세 카톨릭 신비가들인 노르위치의 줄리안, 아빌라의 테레사, '십자가의 성 요한', 20세기 관상의 선구자 토머스 머튼 등을 신교인들과 하등 차이없는 기독교인으로 아무런 경계심없이 받아들인다는 말과도 같다.
더구나 머튼은 강준민/이동원의 멘토랄 수 있는 리처드 포스터(레노바레 대표)가 극찬해온 20세기 '기독교 영성의 대가'임에랴. 현대 신교의 영성을 홀딱 뒤집어 놓았다는 평판을 듣는 포스터는 결코 참 복음주의자가 아니라 오히려 종교다원주의자임을 알아야 한다.
포스터의 모든 책엔 반드시 머튼 어록을 인용하고 있다! 그런데 머튼이 어떤 사람이던가? 도교/불교/힌두교 등에서 적극 합일점을 찾으려던, 실상 기독교 복음과 진리에 무지한 사람이었다. [아래 필자의 딴 글 제목들 참조.]
그렇다면 신교 관상가들에겐 항차 '성모님(마리아) 흠숭'도 별 부담없이 '기독교전통'으로 작용할 잠재적 가능성도 충분하다는 얘기가 돼 버린다. 왜 그러냐고? 똑 같은 영성, 똑 같은 영(spirit)이기 때문이다. 같은 영..이것이 문제다. 일단 카톨릭 영성을 받아들이고 나면 카톨릭 종교의 영(the spirit of religion)이 작용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이동원 등 관상가들에겐 영적 분별이 없거나 극히 제한돼있다고 필자는 믿는다. 신교와 구교의 차이를 구분하는 영적 분별이 이미 기본적으로 소멸(?)됐기에 그렇다.
이동원은 설교에서나 신앙생활의 모든 면에서 신/구교 간 차별/구분 의식의 부담을 주는 담론은 적극 피할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하나다"란 의식부터 작용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와 그의 추종자들이 카톨릭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시간 문제라는 것이다. 카톨릭 수도원도 자유롭게 출입하는 그에겐 카톨릭의 터전도 '나의 장'이지 '남의 장'이 아닐 것이다.
그 다음..샬렘 인스티튜트는 2006년 10월 25일 '신비가들과 함께 기도하는 시간-성스러운 행동주의의 소명 키우기'(Praying with the Mystics: Deepening the Call to Sacred Activism)를 가을철 4주 시리즈로 시작했다. 버지니아 세인트피터성공회에서 실시한 이 프로그램은 위대한 '신비가'들의 삶과 저술에 대한 간단한 음미, 침묵과 기도, 소그룹 등으로 진행됐다. 시리즈 제목들은 다음과 같다.
20세기 트래피스트 수사 토머스 머튼과 함께 기도하기'
13세기 새 수도원 창설자, '아씨시의 프란시스'와 함께 기도하기
16세기 카르멜수도회 개혁가 '아빌라의 테레사와 함께 기도하기
14세기 은둔자, 노르위치의 줄리안과 함께 기도하기
독자는 어떻게 생각되는가? 고인과 함께 기도한다..좀 으시시 하지 않나? 필자는 제목을 읽는 기분부터가 썩 안 좋다. 그도 그럴 것이 성경은 [꼭 부활해야 할 인물 외에는 ] 고인과 아무 상관 말라고 경고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공회/정교회/카톨릭의 성모/성인 숭상/교제/기도는 성경이 엄금한 금기사항인 '고인과의 친교'와 다름 없음을 다시 한번 강조해둔다.
이처럼 영적 분별이 결핍된 곳이 관상의 현장이다.
관상은 하나님의 뜻을 명명백백히 드러낸 성경 말씀에 대한 복종의 형태가 아니라 성경을 카톨릭 영성에 우격다짐 격으로 끌어들인 성경 악용의 형태다.
성령께서는 지금 독자에게 묻고 계시다.
"너는 언제까지 다원종교적 관상과 성경적인 기도,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하려느냐?"
이렇게까지 경고해도 관상을 해보고 싶은 독자는 구태여 위험(risk)을 감수하고라도 하려는 모험정신이 투철한지는 모르되, 건느지 말아야 할 강을 건넜다는 사실을 뒤늦게야 깨달을 날이 올 것이다. 그럴 리 없다고?.. suit yourself.
관상기도의 실상에 관하여 필자의 다음 비평문들을 참고해 주기 바란다.
[구글탐색: '김삼 목사의 아멘넷 데스크']
#111 관상기도를 즐기는 님들에게
# 62 헨리 나우웬과 뉴에이지 영성
본 사이트의 최근 칼럼: '다른 향불, 다른 색'
-
윤사무엘
2007.12.11 15:47
그렇군요,
관상기도는 분명 로욜라가 시작했고, 지금도 베네딕트 수도원이나 예수회(Society of Jesuit)에서 많이 하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물론 누가 시작했는지가 중요하지 않고 내용과 방법 및 그 결과가 더 중요하다면 그 목적도 미화된다는 주장은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그러나 단어와 용어 선택에서 조심할 필요는 있다고 봅니다. 가령 영성이란 말도 1980년 중엽부터 개신교에서 유행어처럼 사용되고 있는데, 예전 부흥사경회라는 말대신 영성수련회라는 말을 더 자주 듣게 됩니다. 과연 영성이란 말이 옳은 말일까요? 장로교신학대학교의 모토도 학문과 경건인데, 경건이란 말을 요즘 듣기 힘듭니다. 경건은 영성보다 훨씬 좋은 말입니다.
관상기도? 향심기도? 캐톨릭에서 나온 용어며 그들의 피정 프로그램에서 사용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개혁전통에서 이를 과연 수용해도 될런지 알고 싶지요. 그 내용과 방법을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기도의 차원을 따지면서 기도의 차별화를 굳이 연구해야 하는지 말입니다.
좀더 쉽게 간단하게 예수를 믿으면 안되는지요? 기도에도 이런 복잡한 용어대신 경건훈련으로 기도훈련이라 하면 안되는지요? -
대칸
2007.12.11 15:52
관상기도는 기도 중에 최고의 경지라고 말하면 좀 이상할 까요? 지금 우리 개신교 지도자들 중에 는 아무도 관상의 경지에 이른 사람이 없다고 생각합니다.관상기도는 말씀묵상의 단계를 지나서 하나님과 직접 대면하는 단계입니다. 가장 쉬운 성경구절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관상기도는 바로 이런 단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관상기도는 기독교영성의 최고의 단계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불교 영성의 최고의 경지는 선(禪)입니다. 이 선은 고요함에 이르는 것입니다. 지면관계상 깊게는 설명을 못드립니다만 기독의 관상기도는 고요함에 이르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위 관상기도는 예수님처럼 사도들처럼 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시편모두는 관상기도에 이르는 기도요 이미 관상에 이른 기도도 있습니다.사도 바울이 관상기도자요 사도들이 관상기도자들이었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이 관상기도를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7장의 예수님의 기도는 이미 관상에 이른 상태에서 아버지와 주고받는 대화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하나님을 직접 뵐 수가 없어서 계시된 말슴인 성경을 가지고 하난님께로 나가지만 주님이 오시면 그 때도 성경이 필요할 까요? 관상 기도에 대하여 섣불리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토마스 머턴이 동서를 넘나들면서 그가 동양의 신비 종교에 놀랐다고 하는 것은 서양적 사고방식만 가지고 그것만이 전부인 줄 알았는데 이곳에도 와보니 그들 나름대로의 종교를 가지고 그들만의 문화를 이루어왔다는 데에 대한 신비감의 표현이었음을 알아야할 것입니다. 하나만 더 예를 든다면 기독강요를 쓴 칼빈은 동양에 고등윤리인 유교가 한 문화를 형성하며 수 십억 인간의 정신사를 이끌고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저술되었다는 것은 알고 계신지요? 관상기도는 말씀과 성령의 도움이 없이는 관상으로 나갈 수가 없다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기독교의 관상에서의 침묵은 그냥 침묵이 아닙니다. 이 침묵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한 것입ㅈ니다. 성경에 나타난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장면이 부지기 수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말슴에 대한 묵상은 말씀으로부터 하나님의 뜻과 음성을 듣기 위한 묵상이요 침묵입니다. 말씀을 넘어 관상으로 초대되는 것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사도 바울도 갈라디아서 2장20절에서 고백은 관상에 이르자의 고백인데 이것은 성령의 역사 없이는 불가능 한 것임을 기억할 것입니다. 이 글을 올린이는 영성에 대하여 80년초반부터 고민해온 사람입니다. 지금도 기독교의 참된 영성에 대하여 끊임없는 질문을 던지며 고민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알아갈수록 부끄럽고 사기꾼이며 주님과는 전혀 상관 없는, 하나님을 이용하여 밥벌이 하고 있는 것은 아니가? 하는 생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사람입니다. 두서 없는 글 너그럽게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은 2007-12-11
15:21:51
-
대칸
2007.12.11 16:53
윤목사님 저 대칸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는 사람입니다. 올리신 글을 잘 읽어보았습니다. 장신대의 모토가 "경건과 학문"이라는 것 맞습니다.제가 생각하기에 윤목사님께서 생각하신대로 "경건"이라는 말은 너무 좋은 단어입니다. 그러나 경건의 내용이 무엇인가? 하고 질문을 하고 들어가면 복잡해 집니다. 그래서 저는 경건은 신앙의 외적인 표현이요 영성은 경건의 내용을 말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신앙이란 말이나 영성이란 말이 엇비슷하게 보여도 그 의미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수련이라는 말이나 영성수련이라는 말은 경건환 삶을 위한 내적 수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장신대 모토가 "경건" 과"학문"인데 문제는 경건의 능력이 없다는데 것입니다. 결국 경건함이 없다는 것은 영성훈련다운 훈련이 없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 아닙니까? 제가 생각하는 참된 경건은 물량주의와 성공신화로 대변되는 자본주의의 횡포를 넘어서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고로 경건은 성령과 믿음그리고 말씀을 실천에 옮길 수 있는 훈련된 영성을 기반으로 세워지는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따라서 관상기도는 말씀을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삶으로 살아내는 단계입니다. 바로 이러한 삶을 위한 기도가 관상기도입니다.2007-12-11
16:41:07 2007-12-11
16:43:51
-
김성찬
2007.12.11 18:47
대칸님의 글(입장)은 아슬아슬해 보입니다. 경계에 선 다는 것은 통전적 사고를 가능하게도 하지만 그것이 혼합적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귀하의 이런 글귀 때문입니다.
" (전략)-- 토마스 머턴이 동서를 넘나들면서 그가 동양의 신비 종교에 놀랐다고 하는 것은 서양적 사고방식만 가지고 그것만이 전부인 줄 알았는데 이곳에도 와보니 그들 나름대로의 종교를 가지고 그들만의 문화를 이루어왔다는 데에 대한 신비감의 표현이었음을 알아야할 것입니다. 하나만 더 예를 든다면 기독강요를 쓴 칼빈은 동양에 고등윤리인 유교가 한 문화를 형성하며 수 십억 인간의 정신사를 이끌고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저술되었다는 것은 알고 계신지요? "
이와 연관하여 한가지 분명히 해둘 사안은,
제 앞선 댓글, "교리와 논리를 뛰어 넘어,하나님과 매 순간 상관할 수 있는 관상기도라고 한다면 적극적으로 받아 들이겠다" 는 저의 입장은,
그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신 하나님일 때만 O.K 라는 말입니다.
너무 넓히다 보니 너무 묽어진것 아닌가요?
-
강요셉
2007.12.11 20:15
이동원 목사가 관상기도에 대해서 세미나까지 했고, 서울신대에서도 영성신학 시간에 관상기도에 대해서 실습도 한적이 있습니다. 사실 관상기도가 되는 사람은 관상기도를 하고, 안되는 사람은 안하면 되는 것인데, 자꾸 이게 좋다. 개신교는 이런게 약하다는 등등의 현실적인 조바심과 호기심 내지는 욕심으로 하다 보니 정상적으로 잘 이뤄지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기독교가 오리엔탈인가 옥시덴탈하는 것에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기독교를 터툴리안의 서양주도의 흐름으로 보자면 관상기도를 포함한 가톨릭적 요소는 굉장히 이국적이고, 개신교와 대비되는 개념입니다. 하지만 지리적으로나 성서학적으로 봐서 동양적인 흐름으로 받아들이면 영성수양및 훈련은 자연스럽게 될 것같습니다.
원래 기독교의 전통이 쿰란공동체라든지 요한공동체라든지 엣세나 파든 바리새파든 전통과 영성훈련을 중시한 것이고, 그런 흐름은 사막교부와 중세 그리고 현대 우리들까지도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금욕적 기독교, 자기희생적 기독교, 철저한 자기부정, 봉사와 구제등을 성서에 있기에 라고 볼 수 만은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영성 훈련의 자기 빈곤에서 한국교회가 택하고 있는 것은 한마디로 따라하기와 흉내내기입니다. 리처드 포스터의 영성훈련 또한 토마스 머튼의 그런 요소를 상당부분 그대로 수용하고 있고, 그런 영성을 대형교회, 유명한 목사가 초청을 하고 레노바레 성경까지 편찬을 했죠... 관상기도 또한 그것 자체의 신학적 시시비 문제 이전에 이런 현실적인 상황에 대한 정확한 목회자들의 자기 결단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교회가 자꾸 잊어 버리는 것 두 가지가 있는데 사명과 검증입니다. 정치인, 경제계획도 작게는 몇 년에서 많게는 수십년까지 걸쳐서 검증을 하고 평가를 하는데 요새 신학이나 목회는 검증단계가 생략된 채로 부흥의 도구로 쓸만하면 우선 도입하고 보자는 생각이 강한 것 같습니다. 금이빨, 발길이 조정등 눈에 보이는 것을 가지고 목회에 써먹고자 하는 얄팍한 기술에 교회는 성서 중심이 아니라 목사중심, 부흥중심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관상기도에 대해서 긍정하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비단 위에서 지적한 인본주의적이고, 자기중심적인 기도행위다. 비성서적이다는 지적도 옳습니다. 하지만 그런 위험은 현재 우리가 하고 기도에도 얼마든지 존재합니다. 예수님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조차도 주문처럼 외우고 있는 우리가 관상기도에 대해서 단정짓는 것이 좀 어색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상기도는 검증되어야 하고, 개신교에서 널리 사용하고 권장하는 것 또한 매우 위험천만한 것입니다. 저도 관상기도를 교수님의 지도에 따라 해봤습니다만 기도에 몰입하기 보다 신비자체를 느끼려고 하는 의식이나, 관상기도에 대한 대단한 경외, 기도대상자에 대한 의지가 아니라 기도 자체에 대한 신뢰나 존경등 사실 잘 되지 않았습니다. 물론 훈련 부족이겠죠... 하지만 어떤 친구는 뭐 이런 저런 것을 느끼고 보고 들었다 하는 고백을 하는데, 개인의 고백이니깐 존중은 하지만 그러나 그것이 정말 성서적이고, 영적인 것인지는 검증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단순히 무슨 신비한 것을 체험하고 듣고 보는 것이 관상기도의 목적이라면 차라리 안하는게 낳다고 봅니다. 꼭 관상기도가 아니더라도 황홀경에 빠지고 신비를 체험하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으니깐요... 하지만 관상기도는 결과가 아니라 과정과 그 순간에 스스로를 평안하게 정리하고 생각을 비우고 말씀에 집중하는 것 자체가 매우 즐거운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꼭 관상기도를 해야만 무슨 깊은 기도와 탁월한 영성을 소유한다는 생각은 누구말대로 관상기도를 두 번 죽이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관상기도는 여러가지 기도 방법 가운데 하나로서 분명 다른 기도 방법들 처럼 장단점이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본인이 스스로 장점을 극대화 해나가면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
김성찬
2007.12.11 22:41
강요셉님의 글이 가장 가슴에 와 닿습니다. 말로만 듣던 관상기도를 훈련 받은 경험을 중도적 입장에서 잘 정리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기도의 결과(열매)만 탐하는 우리의 기도 목적에 일침을 가하는 기도의 과정이 주는 평안함에 대한 체험적 강조는 매우 인상적입니다. 그 무엇을 손에 쥐어 줘야만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있어 주는 것이 가장 큰 선물임을 느끼는 사랑하는 이들의 관계처럼 우리의 주님과 교통하는 기도가 그러해야 한다느 사실을 새삼 일깨워 준 고백입니다. 주문처럼 외워대는 주기도문. 그래 우리는 주술적 기도에 이미 물들어 있는 듯 합니다. 그러면서 이런 저런 기도에 시비하기는 너무 면구스럽습니다. 기도를 즐기는, 기도를 기도되게 하는 참 기도의 사람이 되길 소망합니다. 그래, 늘 기도할 수 있는 기도의 참 정의를 새롭게 정리해 본 좋은 토론입니다.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
윤사무엘
2007.12.11 22:44
강요셉님의 글을 잘 읽습니다.
공감입니다 -
대칸
2007.12.12 00:23
김성찬님의 글에서 저의 글이 아슬 아슬 하다고 하셨는데 그것은 이런 뜻입니다. 앞에 있는 글에서 관상기도에 대하여 강력히 부정하는 것에 대한 대응으로 한 예를 든것입니다. 사실 토마스 머턴이 활동하던시대는 모던시대가 끝나가고 포스트모던시대로 넘어가던 시기입니다. 서구의 젊은이들이 기독교에서 새로운 미래적 좌표를 찾지 못하고 동양의 종교에 매력을 느껴 동양으로 몰려가던 시기에 머턴 같은 영성가들은 동양의 종교에 무엇이 그렇게 젊은이들을 끌어드리는가 라는 것때문에 관심을 가졌다고 합니다. 관상기도는 알아가면 갈 수록 교회성장과는 특별히 관련이 적다는 느끼게 됩니다. 관상기도는 철저히 하나님과 1:1의 관계형성을 목적으로 합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능동적인 자기의지의 노력이 필요하지만 어느시점에서 하나님을 만나면 철저하게 수동적인 기도의 자리로 내려가게 됩니다. 광상기도는 해도되고 안해도 되는 그런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사람이면 그 기도에 이르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의 중간지대가 없다면 기도역시 중간지대는 없습니다. 관상기도 몇번 참여했다고 하여 관상기도자가 된것도 아니고 관상기도에 대하여 다 아는것도 아닙니다. 끊임없는 기도훈련을 통해서만 관상에 이른다는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 단계는 하나님이 기도를 응답햇다 안했다하는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관상기도는 철저히 개인적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자기부인의길이요 자기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길입니다. 관상기도는 313년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하기 이전의 박해받던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과 그 맥이 닿아 있는 것입니다. 강요셉님의 글을 읽고 공감하는바가 많습니다만 중도적인 입장이 느껴져서 몇글 올렸습니다. 2007-12-12
00:16:51
-
김성찬
2007.12.12 08:23
시대적 트랜드를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관상기도가 모던에서 포스트모던한 시대 흐름의 산물이라는 식의 해명은 저를 더 아리송하게 합니다. 중심해체라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음모는 우리의 거룩한 중심마저 해체해 버리려는 영적 도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좋은데 예수는 부담스러운 시대가 아닙니까?
그러나 관상기도에 그런 음모가 없다손 치더라도, 기도훈련의 한 프로그램으로 한 시대를 풍미하다가 언젠가 시들해질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기도훈련이라는 말도 작위적 냄새가 배어 있는 듯 합니다. 기도는 훈련없이도 누구나 가능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는---. -
이 성우
2007.12.12 14:30
요즈음 공부하고 있는 십자가의 성 요한,,,그의 책 "어둔 밤"을 통해 성 요한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완전한 자가 되려면 자연안에 계시면서도 초월자로 무한자로 계시는 아버지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나아갈 수 있다 하네요.
그리고 관상기도에 대한 정의를 소개합니다. 물론 문서에 있는 그대로를 옮깁니다.
관상기도는 성세의 은총과 정기적인 거룩한 독서로부터 아젼스럽게 발전한 것이다 우리는 기도가 사고와 감정이 언어로 나타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한가지 표현일 뿐이다. 관상기도는 사고와 언어 감정을 넘어서서 절대 신비이신 하나님께 우리의 정신과 가슴을 열어 두리는 것이다. 호흡보다 더 가까이 계시고 사고보다 더 가까이 계시며 우리의 의식 그 자체보다 우리에게 더 가까이 우리안에 계심을 믿음으로 알고 있는 그 하나님께 우리의 존재 전체를 열어 드리는 것이다. 관상기도는 겸손하고 비어있는 마음에 하나님이 내리시는 은총이며 하나님과의 일치를 통해 사람이 하나님을 닮게 하신다..../그리고 지난 모임때 "다른종교의 명상과의 차이점"을 묻는 질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음이 그들과 다르다 하였거든요...^^*
저는 이만큼 입니다. -
사랑나눔
2007.12.13 15:57
관상기도란 고요한 침묵속에서 단순하고, 순수하게 몰입한다는 기도방법을 일컫는 것이다.
기도란 보편다당해야 한다.
왜 언어를 주셨을까? 그것은 우리인간의 언어라는 수단으로 자기자신의 모든 것을 토해 내도록 하셨다고 본다. 세파에 지치고 상한 심령들은 언어로 쏟아내는 과정을 통해 하나님께서 치유하시는 것이다.
기도란 일반 평신도 누구나 할 수 있어야 한다.
관상기도, 향심기도는 일반 성도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기도방법이라 볼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묵상기도란 입으로는 고백하지 않아도, 머리속에는 그분에게 말하는 것이 묵상기도이다. 그러나 관상기도란 생각없이 주기만을 바라는 태도가 아닌가?
신구약 인물들을 보라. 누가 관상기도와 향심기도를 하였던가. 그들의 기도는 언어와 몸짓으로 교제하지 않았던가
언어와 몸짓의 기도를 예수님께서도 하지 않았는가? 사도바울도 마찬가지.
왜 캐토릭적 기도방법을 탐닉하려는가, 왜 구교를 연모하는가?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18 | 번개4 강의원고- 21C목회전략소고, 자기피로 사신교회 [4] | 전현석 | 2008.05.08 | 4824 |
17 | 번개 1 - 주님이 너무도 절박하여 복된 이들의 요엘서 공동묵상 대화록 [8] | 김성찬 | 2008.01.01 | 4310 |
16 | 함께 토론해 봅시다 : 제자가 되세요! [33] | 정방원 | 2008.05.19 | 5011 |
15 | 자연 생명지키기- 생명의 강 순례단과 함께 한 오후 [2] | 박병권 | 2008.05.23 | 4299 |
14 | 호출을 명 받았습니다. [14] | 김성찬 | 2008.06.12 | 3536 |
13 | 촛불집회 그 광장에서 [6] | 박병권 | 2008.06.06 | 3187 |
12 | 5.18 기념일을 보내며 [1] | 박병권 | 2008.05.20 | 3039 |
11 | 촛불에 나타난 민심을 읽으십시오 (다음 토론방 게재) [5] | 강물 | 2008.05.19 | 3140 |
10 | 광우병-촛불문화제, 회원이 쓴 글이 '다음' 토론 베스트글이 되었습니다 추천 16000, 조회 24만, 댓글 2200 [2] | 강물 | 2008.05.15 | 3063 |
9 | 만시지탄 [8] | 암중모색 | 2008.05.03 | 3013 |
8 | 용서를 구합니다. [16] | 이 성우 ♡ | 2008.01.31 | 3137 |
7 | 이건 아니잖아요. [27] | 이성우 | 2008.01.18 | 3313 |
» | 관상기도에 대하여 [13] | 윤사무엘 | 2007.12.10 | 3510 |
5 | 번개 4 - '말씀과 불'의 보따리를 풀다. [5] | 김성찬 | 2008.05.07 | 3313 |
4 | 사패산 삼행시 [5] | 양동춘 | 2008.04.30 | 3009 |
3 | 번개3-사패산 어록및 낭송 시 모음 [2] | 김성찬 | 2008.04.17 | 3596 |
2 | 시가있는 좋은 사람들의 산행 [7] | 오준흥 | 2008.04.17 | 3089 |
1 | 번개 2 - 그 님이 절박하여 수선화 된 이들의 아가서 공동 묵상 대화록 [3] | 김성찬 | 2008.02.27 | 3405 |
성경에서 말하는 기도는 창 24:63에 나오는 이삭의 묵상기도와 연관을 짓는다거나 시 1:2에 나오는 묵상과 연관을 짓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히브리어 성경에 보면 이삭은 하나님의 뜻을 묻고 말씀을 되새김질하는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성경적 기도의 핵심은
(1) 하나님의 뜻을 분별함(롬 12:2)
(2) 그 뜻을 전폭적으로 순종함 (마 26:39)
(3)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돌림 (계 5:8-9)
입니다.
관상기도는 내면적 세계의 바람, 관조적 명상, 나의 소원 등에 기초되는 것 같습니다. 만약 아니라면 설득력 있는 설명을 듣고 싶습니다. 성경에서 나오는 기도는 그냥 기도(트빌라, 프로쉬케)이지 여기에 다른 용어나 수식어를 붙이는 것은 부자연스럽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주기도문)이나 대제상적인 기도(요 17장)에 있는 것 처럼 기도 자체가 예배문이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하나님 나라가 이뤄지며, 그 분의 뜻이 이 땅에도 이뤄지도록 기도를 드립니다. 그리고 일용할 양식을 구하고 우리도 용서하는 삶을 살게 하옵시고, 시험에 들지 말고 악에서 구하여 달라는 기도를 드립니다. 그리고 송영드리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 것이 초대교회 기도였습니다. 여기에 성령님의 능력을 의지합니다. 그래서 기도의 4대 요소가 송영(adoration) + 고백(confession of sin & faith) + 감사(thanksgiving) + 간구(supplication) 이를 첫 글자만 따서 ACTS 라고 합니다.
영성에 대해 지나치게 빠지다 보면 다른 종교의 영성까지도 수용하는 분위기가 아쉽습니다. 종교통합주의자 토마스 멀톤이 불상 앞에서 느끼는 영성도 관상기도에서는 수용하니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