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토론해 봅시다 : 제자가 되세요!
2008.05.19 19:53
여기, 뜨거운 감자를 대합니다.
오늘, 서울중앙지방회 교역자회에서 정방원목사님께서 설교하신 설교문을 올립니다. 정목사님께서 흔쾌히 설교문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설교를 작성하게 된 배경과 스스로 다진 결의를 메일로 보내 주셨습니다. 우리 함께 허심탄회한 토론의 장을 열었으면 합니다.
1. 정방원목사님께서 보내오신 메일 전문
선배 목사님께
지난 3월 저희 교회에서 교역자회를 한 죄(?)로 오늘 설교시험을 치루었습니다.
사실 오늘 설교는 저희 교회에서 교역자회를 하던 날 새벽에 주님이 주신 말씀이었습니다.
나서기도 싫어하고, 욕먹기도 싫어하는 성격인 것을 주님이 뻔히 아시면서 도전하셨습니다.
너는 상대적으로 자리와 봉투에 자유롭지 않느냐고 주님이 설득하셨습니다.
무척 망설였습니다. 설교 내용을 갖고 그렇게 많이 고민하기는 처음이었습니다.
2달 동안 주님과 심각한 영적 갈등을 빚었습니다.
아무튼 논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논란은 변화의 바람을 몰고 올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변화는 간단합니다!
군대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졸병 때 술 먹지 않는다고 많이 맞았습니다.
그러나 고참 때 때리지 않았습니다.
그랬더니 제대 때까지 구타를 볼 수 없었습니다.
변화는 간단합니다!!
지방회 임원과 어른들이 희생하면 됩니다.
변화가 오지 않는다면 저는 돈키호테입니다.
이제 욕먹을 일만 남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방원목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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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목사님
결기가 느껴지는 메일과 메시지 잘 받았습니다.
혼자 감당하기가 쉽지 않은 메일과 메시지라서,
제 홈피에 올려 함께 고민해 봤으면 합니다.
허락해 주실 줄로, 허락해 주신 줄로 믿고---.
허심탄회한 토론의 장이 열렸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김성찬 드림.
2. 정방원목사의 설교 전문
제목 : 제자가 되세요!
본문 : 누가복음 14:25~35
(좋은 설교자는 청중에게 설교하기 이전에 설교자 자신에게 설교합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는 먼저 제 자신에게 하는 설교임을 말씀드립니다.)
얼마 전 MBC의 ‘뉴스 후’, ‘PD 수첩’, ‘100분 토론’ 등에서 한국교회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내용이 지속적으로 방송된 적이 있습니다. 그 결과 최근에 사회에서는 “예수는 좋은데, 교회는 싫다”는 부정적인 여론이 확산되어 가고 있습니다. 게다가 최근 통계청의 통계자료(2008. 2. 21)도 결코 전망이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지난 10년 동안 기독교 인구가 1.6% 감소한 반면, 천주교는 74% 이상의 성장세를 보였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5년 안에 천주교가 기독교를 추월할 것이라는 전망도 가능하다고 이야기입니다. 결국 이대로 가다가는 한국교회가 사회로부터 외면당할지도 모릅니다. 조만간 “예수도 싫고, 교회도 싫다”는 비판에 직면할지도 모릅니다. 지금 왜 우리 사회가 ‘예수는 좋은데, 교회는 싫다’고 할까요? 이는 전적으로 교회 지도자라고 할 수 있는 목사의 책임입니다.
본문 34~35절에 보시면, 소금이 맛을 잃으면 아무 쓸 데가 없습니다. 결국 버림받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면, 목사가 목사답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요? 버림받게 되어 있습니다. 교회가 맛을 잃으면, 목사가 맛을 잃으면, 예수님으로부터 외면당할 뿐 아니라 사회로부터도 외면당하게 될 것입니다.
어제는 5월 18일이어서 저녁에 막내아들과 함께 청계천 광장에 나갔습니다. 빗속에서도 미국산 미친 소를 막기 위해 촛불을 들었습니다. 문득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교회가 세상의 빛이 되지 못한다면, 교회가 세상을 향해 등대가 되지 못한다면, 교회가 세상을 향해 횃불을 들지 못한다면, 아마도 세상이 교회를 향해 촛불을 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제자도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본문 26절, 27절, 그리고 33절에 세 번에 걸쳐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결론으로 소금이 맛을 잃으면 버림받는다고 경고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무슨 의도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소금이 맛을 내야만 진짜 소금이 되는 것처럼, 제자가 맛을 내야만 진짜 제자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무릇 제자는 제자다워야 하고, 목사는 목사다워야 하고, 교회는 교회다워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좀 더 자세히 이해하려면 문맥을 통해 살펴보아야 합니다. 누가복음 14장 1절에 보시면, 예수님은 한 바리새인 종교지도자의 초청을 받으셨습니다. 그 종교 지도자는 예수님뿐 아니라 다른 종교지도자들도 초청을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누가복음 14장 7절에 보시면, 예수님 앞에서 불성 사나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꼴불견이 연출되었습니다. 초청을 받았던 종교지도자들이 서로 높은 자리에 앉겠다고 자리다툼을 했던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 예수님은 어떤 반응을 보이셨을까요? 세 부류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서로 다른 교훈을 주셨습니다. 첫 번째는 누가복음 14장 7절부터 자리다툼하는 종교지도자들에게 주신 교훈입니다. 두 번째는 누가복음 14장 12절부터 예수님을 초청했던 그 종교지도자에게 주신 교훈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오늘 본문에 수많은 무리에게 주신 교훈입니다.
먼저, 첫 번째 교훈입니다.
예수님은 자리다툼을 하는 종교지도자들을 향해 ‘차라리 가서 끝자리부터 앉으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소위 종교지도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명예욕에 사로잡혀서 자리다툼이나 하고 있다니, 예수님이 보실 때 얼마나 한심했겠습니까? 맛을 잃어버린 소금처럼 그들은 이미 ‘맛이 간’ 종교지도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위대한 교훈을 주셨습니다. <눅 14:11>“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높아지고 싶으면 낮아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번 총회에는 그리고 총회 본부에는 명예욕에 사로잡혀서 자리다툼하는 종교지도자들이 다 사라졌으면 참 좋겠습니다.
두 번째 교훈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초청했던 바리새인 종교지도자에게 우회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초청하라. 그리하면 네게 복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무슨 의미일까요? 명예욕에 사로잡혀서 자리다툼하는 종교지도자들을 가까이 하지 마라는 의미입니다. 비록 예수님은 우회적으로 말씀하셨지만, ‘너도 역시 명예욕에 사로잡혀서 자리다툼이나 하는 종교지도자가 아니냐’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근묵자흑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대개 끼리끼리 놉니다. 좋지 않은 것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쉽게 보고 배웁니다. 그 바리새인 종교지도자는 사람들을 잘못 초청해서 오히려 욕먹고 있습니다. 초청을 잘 해야 합니다. 그래야 복이 있습니다. 어젯밤 촛불을 들면서 이런 생각들을 했습니다. 총회도 대의원들을 잘 초청해야 복을 받을텐데...미친 소를 잘못 초청하면 민족의 역사에 두고두고 욕먹는 사람이 될텐데...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세 번째 교훈입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은 수많은 무리를 상대로 제자도를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수많은 무리는 종교지도자들과는 전혀 다른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수많은 무리를 상대로 제자도를 말씀하셨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명예욕에 사로잡혀서 자리다툼 하는 종교지도자들은 절대로 제자로 삼지 않겠다는 의미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지도자가 되기보다는 먼저 제자가 되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진정한 제자, 제자다운 제자, 소금이 맛을 내듯 맛을 내는 제자가 될 수 있을까요?
첫째, 본문 26절입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세상에 그 무엇보다도, 세상에 그 누구보다도, 심지어 자기 생명보다도 예수님을 더 사랑해야만 진정한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물어보셨습니다. “네가 날 사랑하느냐?” 요한계시록 2장에 나오는 에베소교회처럼 처음 사랑을 잃어버리면 다른 종교적인 행위가 아무리 많아도 제자일 수 없습니다.
둘째, 본문 27절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추종해야만 진정한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내가 죽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신앙은 죽고 사는 문제입니다. 내가 죽으면 예수님이 살고, 내가 살겠다고 발버둥 치면 예수님이 죽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는 바울의 고백이 있어야만 우리도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셋째, 본문 33절입니다.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물질에 대한 탐욕을 버려야만 진정한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한번도 돈을 취하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돈이 왜 돈일까요? 본래 돈의 기능은 유통에 있습니다. 그래서 돈은 돌고 돌아야 됩니다. 돌고 돌아야 될 돈을 움켜쥐고만 있다면, 결국 돈이 사람의 머리를 돌게 할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는 돈 때문에 미친 사람이 참 많습니다. 돈 문제에 대해 예수님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인 어떠했을까요? <눅 16:14>“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평신도 사역자인 누가가 오늘 우리 시대에 누가복음 16장 14절을 다시 쓴다면 아마 이렇게 썼을 것입니다. “목사는 봉투를 좋아하는 자들이라.”
목사가 봉투를 좋아하는 한, 봉투 좋아 하는 장로들의 버릇을 고칠 수 없습니다.
가급적이면 봉투 문화를 없애고, 가능하면 자원봉사 문화를 만들어야 합니다. 지난 1월 5일 교인 35명을 데리고 태안에 다녀왔습니다. 태안 바닷가의 기름 제거를 위해 열심히 자원봉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가서 깜짝 놀랐습니다. 자원봉사를 하는 평신도들이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그렇게 많은 줄을 몰랐습니다. 목사는 꼬박꼬박 봉투를 챙기고 평신도는 자원봉사를 하고, 잘못 되어도 한참 잘못된 교회문화입니다. 제자가 되려면 봉투부터 버려야 합니다.
정리합니다.
오늘 말씀을 제 자신에게 적용해 봅니다. 예수님이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정목사야, 바리새인 같은 종교지도자가 되지 말고, 제자가 되라’, ‘정목사야, 자리와 봉투를 좋아하는 목사가 되지 말고, 제자가 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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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J
2008.05.19 22:44
정목사님. 좋은 말씀에 은혜 받았어요. 허나 개혁의 메세지는 언제나 여름 냉수처럼 그 순간은 시원하나 외롭운 메아리로 그치기 쉬우니 이 광장에서 작은 불씨가 되도록 동지들을 모아 보세요. -
먹통
2008.05.19 22:52
변화가 간단하다구요.
단순구조인 군 내무반의 관행개선처럼, 단 한사람의 결단으로 가능한 일이라면 얼마나 쉽겠습니까?
간단치 않습니다. -
김성찬
2008.05.20 08:14
저는 어제 교역자회엘 가지 않았습니다.
근데, 여기저기서 들려 온 소문이 심상치 않았습니다.
정목사님의 설교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사실, 저도 그 교역자회에 꼭 가고 싶었습니다.
정목사님이 설교자셨기 때문입니다. 뭔가 알지 못한 그 어떤 기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지 않았습니다. 그 영적 호기심조차 묵살해가며.
교역자회가 끝난 후, 예상치 못한 한 선배님께로부터 전화가 왔었습니다.
그분은 저에게 제가 교역자회에 나타나지 않은 이유를, 그 어떤 이에게 들었다며 이렇게 다독였습니다.
"맘 아파서 안 나타났다며, 맴이. 너무 맘 아파 하지 말어."
순간, 저는 그 선배의 뜻밖의 권고에 의아해 했지만, 한편으론 그에 말이 저의 복심을 찌른 진단이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뭐 그런 생뚱맞은 말쌈을, 이라며 눙쳐버렸지만 말입니다.
그후, 여기저기서 전화가 왔고, 그래서 또 갔습니다.
단연코, 정방원목사님의 설교가 관심끈 화두였습니다.
하여, 저는 정목사님께 전활 넣었습니다.
그 생생한 현장의 소리는 아니지만, 문자로라도 대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정목사님은 흔쾌히 원고를 보내주셨고, 거기에다 더해 자신이 그 설교를 대언할 수 밖에 없었던 영적 배경까지 첨부해 주었습니다.
그 메일을 열어 젖히는 순간,
저는 아차, 싶었습니다.
감당 못 할 짐을 떠 맡았다는 부담감이 확 몰려 왔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의 표적이 바로 나였기 때문입니다.
그냥, 덮어 버리고 싶었습니다. 피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었다는 생각에 후회막급했습니다.
그러나, 그냥 덮어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이 성령의 책망하시는 은총을 우리 모두가 공유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회생불가능한 우리의 영적 현실.
나에게는 답이 없고, 나에게는 용기가 없습니다.
그 알량한 명분과 의분에 매어, 독야청청, 그 시린 십 여 년 세월을 온몸으로 견뎌 온 나는, 이제 더 이상 그 조직의 쓴 맛을 보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근데, 알 수 없습니다.
왜, 내가 자청해서 이 고발을 접수해 버렸는지.
팔잔지, 사명인지.
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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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ciel
2008.05.20 08:33
왜 토론을 해야하는 것이죠...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대로 행하면 되는 것이 아닌가요 ?? 토론해서 결론이 무엇으로 나는 건가요 ??? 설교자가 잘못했다고 나나요..아님 잘 했다고 나나요...
말씀을 선포하신 분은 기도와 영적 감동으로 하셨고...우리는 그 소리를 들었고...그 다음은 들은 자들이 행하면 되는 것이 설교가 아닌가요...!!! 의도는 알겠지만...
설교를 토론하자는 이야기는 조금은 그렇네요...앞으로 어느 곳에서 어떤 설교를 하든지...누군가의 눈치를 보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공연한 생각이 드는 것은 무엇일까요 !!!! -
김성찬
2008.05.20 08:59
과연, 예리하시군요.
찜찜했는데, '토론'이란 용어가.
'토론'이 아니라 그 말씀 앞에 발가벗고 서보자는 의도였습니다.
표현력이 부족해섭니다.
그러나, 굳이 '토론'이라고 한다면,
그 말씀이 주는 훈계를 과연 우리가 실천해낼 힘이 있는가를 허심탄회하게 토로(논의)해 보자는 말입니다. -
이 성우 ♡
2008.05.20 10:48
변화.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명령(사랑)입니다.
감사합니다.
상당한 것들에 의해 붙잡혀 있음에 간단치는 않겠지만
그 변화를 이루시는 분이 주님이시니
"주여!저를 처리하소서" -
구재찬
2008.05.20 11:10
제자도에 관한 본문은 마가복음 3:13-15 도 참고해야 한다고 봅니다. 마가복음의 주제가 제자도(신약학자들의 거의 동의함)라면 제자도는 예수와 함께하는 것이요 또한 제자들을 내보내 말씀을 전파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누가가 평신도 사역자란 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누가를 전공한 저로서 누가는 고도의 신학자요 어느누구도 따를 수 없는 역사 신학자입니다. 살롬. -
무명
2008.05.20 14:57
2달 이상 고민하시느라, 건강은 헤치지 않으셨는지요.....
목사님의 설교에 감동을 받은 사람이 많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렇지만 그 시간에 전혀 듣지 못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봉투를 받는 사람들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는데.....' 그러니 정작 들어야 할 사람들이 딴소리 할수도 있고,
'들을 귀 있는 자들은' 가슴앓이를 하는 것이지요.
목사님과 같이 고민하고 기도하는 동역자도 있음을 기억하면서,
주님 앞에 떳떳이 설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
박병권
2008.05.20 15:42
같이 앉아 있을 때, 오늘 설교가 되겠어요 하시면서 사고한번 치게되나?
말할 때만 해도 예상 조차 못했습니다.
제자도에 대하여 말하리라 생각했는데 그 주제에다 현실적인 갱신의 주제를
얹어서 설교를 하실 때 듣고 있는 제가 뭉쿨해지더군요
갈할 때 벌컥 들이킨 생수처럼 시원한 느낌도 들더군요.
본문의 내용에 본인의 견해를 포함시킨, 주제의 적용에 대한 세밀한 설교적
분석은 차치하고라도(봉투를 받지 않는 것이 제자도인가? 본문이 그러한 내용을 뒷 받침하는가? 등등) 그 견해를 표현할 수 있는 용기, 결기에 대하여 감동입니다.
사석에서 몇번 나눈 바 있지만 어르신들이 앞자리에 앉아계시고 선후배
동역자들이 두루 많았는데 참 담담히도 말하는 모습이 감동입니다.
지난번 저희 교회 헌신예배 초청시에 봉투를 거절하시더니, 언행일치하십니다.
봉투문화? 두루 일반화 되어있는 이 문제에 대하여 저도 생각이 많습니다.
제 자신도 이 주제에 대하여 자유롭게 "바꿉시다"라고 말하기가 부끄럽기에
말입니다. 다만 우리가 일상적으로 습관화 되어있는 ,
고쳐야할 목회자의 생활태도에 대하여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것은 꼭 필요한 일로
생각듭니다. 대접받는 일에 익숙하고, 목사이기 이전에 진지한 신앙인지를 생각치 않고, 소박함과 검소함을 받아 들이기 보다 편리하고 화려함 명성을 취하는 것들 등등입니다.
정목사님의 지적, 마음에 새기고 더불어 함께 고민하며 살아가는 만남으로
더 괜찮게 나이드는 동역자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더불어 소식 듣자 마자 이렇게 대화방을 열어주시는
이사랑방 주인장님께도 쌩유 베리! -
양동춘
2008.05.20 16:43
요새 이방원(태종)이 방송을 통해서 카리스마의 은혜(?)를 끼치는데?
사랑하는 주의 종,
아끼는 후배 정방원목사님께서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나누어 주어서 큰 감사를 드립니다.
요즘 중앙지방회 교역자기도회에 가능하면 안가는 이유를 만드는 분위기인데?
그래서 꼭 가야할 때만 가게 되는데?
관례에 따라 매월 첫주 월요일 모임에서 벗어나서
셋째주 월요일로 모임이 바뀐 것을 깜빅 챙기지 못하므로
도마처럼 은혜의 소외자 되었음을 아쉬어 하며
설교자와 준비한 모든 분들에게 미안함을 먼저 전합니다.
아직도 중앙지방회와 성결교단은 소망이 있음을 감사드립니다.
은혜를 끼치는 목사님과 은혜받는 목사님이 계셔서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은혜를 또한 주님의 은혜로 계속 성도들과 함께 날마다의 삶에서 승리해야하는 거룩한 부담이 있습니다. 설교자의 삶 또는 예배자의 삶에서 말입니다.
생활에서 승리해야 설교가 완성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지금부터 십여년전에 처음으로 L.A를 갔을 때의 일입니다.
아주 우연한 기회에 미주지방회 교역자기도회 모임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이정근목사님께서 시무하시는 유니온교회였습니다.
그 당시 로고스교회를 담임하는 강준민목사의 강한 설교가 있었습니다.
기억나는 한부분은 "준비되지 않은 설교는 성도들이 거부 할 수 있다." 는 등의
강하고 도전적인 설교였습니다.
예배를 마친 후에 서로의 인사에서 참석한 대부분의 목사님들은 은혜의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은사이시면서 원로가 되신 허경삼교수님과
교단과 한기총 총무를 엮임하신 이봉성목사님께서도 그 자리에 계셨는데
두분 모두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참 멋있는 장면이었습니다.
인상적이고 감사 그 자체였습니다.
누구도 자리와 돈봉투에서 자유롭기가 쉽지가 않게 마련입니다.
별난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이 아니고
말씀과 삶이 일치되지 않으면 그 길로 접어들기 십상 아닙니까?
그거도 요즈음은 신바리새인(?)이 된다는 것이 더 힘이 듭니다.
그래서 늘 새로워지라고 말씀하신 줄을 압니다.
늘 십자가의 삶을 살라고 하시는 줄을 압니다.
우리 비전교회 정방원목사님의 설교문을 보면서 중심으로 아멘하면서
주님 앞에 바로 서기를 원합니다.
지방회 또는 교단에서 "자리와 돈봉투"가 아니어도
섬기는 교회에서도 똑 같은 문제가 발생한다고 봅니다.
비록 "심방감사헌금"이기는 하지만
저의 나눔교회에서는 심방후 감사헌금봉투를 대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도 가물에 콩나듯 헌금하는이들이 있어서 위로를 받습니다.
우리가 자리와 붕투에 자유할려면
그 자리에 앉을 사람이 앉고
그 봉투를 받을 사람이 받으면 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평신도처럼 자원봉사가 가장 자유롭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주 안에서 받아도 아멘, 안받아도 아멘 할 날을 소망합니다.
준비된 겸손한 분들이 요소요소에서
교단과 지방회를 위해 봉사하시면 좋겠습니다.
우리 중앙지방회도 지방회를 이용하는 사람보다
지방회를 사랑하며 아끼는 분들이
지금보다 점점 많이지기를 기도하면서 기대합니다.
정방원목사님의 설교에 다시 한번 아멘하면서
그렇케 하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그렇게 순종하실 목사님께 축복하면서 감사를 돌립니다.
중앙지방회와 다가오는 교단총회에 하나님의 평화가 임하시기를, 샬롬!
이번에도 그렇게 되줄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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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찬
2008.05.20 18:11
총회를 앞두고, 대의원 자리를 확보하려는 필사적인 투정이 전방위적으로 전개되고 있습니다.
금년 총회가 3년 항존위원직을 뽑는 자리라면서, 그 영양가 넘치는 자리 확보를 위한 첫 단추를 꿰고자 발버둥입니다.
오늘도, 바쁜 와중에 몇차례나 압력아닌 압력에 시달렸습니다.
맘 비우라고, 안수순으로 보내는 결단에 동의해 준 우리 대의원들의 고매한 의식을 이해 당사자들은 이해도 못하는가 봅니다.
이성우님의 지적대로, 상당한 것들에 의해 붙잡혀 있음에 간단치는 않, 습니다.
그 변화를 이루시는 분이신 우리 주님께서는 어떤 방식으로 개입하실려는지.
고름은 살되지 않고,
징계없는 뉘우침은 정녕 없는 것입니까?
상당한 것들에 의해 붙잡혀 있는, 이 실존에게 지혜와 용기를 주소서! -
김성찬
2008.05.20 20:11
돈봉투이야깁니다.
제가 마지막 스쳐지나쳤던 학교에 유능한 교감선생님이 계셨습니다. 날래고, 민첩하며 영리하기로 소문 난 교감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학교는 시골 학교와 달리 촌지가 만만치 않게 들어 옵니다. 그 촌지를 다루는 방법을 일러 드립니다. 달라고는 하지 말되 주는 것은 거절하지 마십시오. 관계가 깨집니다."
이런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서울로 발령 난 동기가 여의도에소재한 학교로 부임해 갔습니다.
하루는 학부모 한분이 찾아 와서 10만원권 수표를 한장 주고 가더랍니다. 순진무구한 교사 초년병은 그 촌지를 감당할 길 없어 그 다음 날 그 학부모에게 다시 돌려 보냈답니다. 근데, 그 다음 날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아이가 내민 봉투 속에는 10만원권 수표가 그득했다고 합니다. 그 학부모는 생각했겠죠. 어, 이 선생 봐라, 10만원이 작아, 그럼 몇장 더 쓰지.
지금은 교육혁명이 일어나 촌지는 많이 줄어 들었으나, 여전히 강남에서는 당당하게 오고 간다고들 합니다.
우리 서울중앙지방회 공식회의 회의비는 3만원입니다. 한 때는 5만원이었는데, 2만원을 줄여 3만원씩 받고 있습니다.
저는, 이 3만원이 적정한 회의비라 여깁니다. 총회에서도 서울 지역 인사들의 경우 그 정도로 지불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헌신예배 사례비도 거절한 정방원 목사님의 결백한 모범이 부럽습니다.
그러나, 원만한 회의를 위해, 윤활유 정도의 거마비는 지불되어야 하지 않을까 저는 생각합니다.
물론, 암묵적인 거래가 관행처럼 되어 버린 현실은 타파해야겠지만, 원만한 행정집행을 위한 물질 투자는 필요하다 여깁니다.
나 혼자라면 몰라도, 내가 여러 사람들과 더불어 행정을 해 나가는 데 있어 그런 배려는 앞장 선 이의 당연한 임무라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돈봉투가 다 나쁜 것은 아닐 것입니다.
뭔가 수고한 이에게는 당연히 그 노고에 보답해야 한다는 원리는 지키되, 지나치거나, 부족하지 않는 규정이 필요하다 여기기 때문입니다.
돈봉투 문제를 제기하신 정목사님이나 그분에게 사례했다가 거절 당하신(?) 분들의 입장은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그 원리와 규정이, 지방회 임원의 입장에서. -
from 정방원
2008.05.22 08:43
정방원 목사님한테 욕먹을 셈치고 여기, 사고를 칩니다.
정목사님께 허락 받지 않았습니다. 허락해 줄 것 같지 않아섭니다.
요약 발췌해서 옮겨 실을까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그 고운 문맥의 흐름을 끊어 버릴 것 같아섭니다. 하여, 전문을 그대로 옮겨 놓기로 했습니다.
정목사님, 미안합니다. 공개해서 그 깊은 뜻을 모두가 한번 헤아려 보기를 원하는 마음이 앞서서 입니다.
이하 정목사님께서 저에게 보내 주신 메일입니다.
---
선배목사님께,
목사님의 전화를 받고 고민했습니다. 홈페이지에 온라인으로 댓글을 올리는 것은 싫었습니다. 이메일은 오프라인이라고 생각하고 글을 올립니다. 선배님의 요청을 무시해면 예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 글은 정리되지 않은 생각이고, 다듬어지지 않은 문장이고, 정제되지 않은 표현입니다. 한마디로 두서없이 쓴 글입니다. 그만큼 제 마음이 복잡합니다. 생각이 어지럽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있습니다. ‘이 글은 분명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일 뿐입니다. 무슨 생각인들 누가 못합니까?’
....................
자리는 참 중요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지혜롭게 자리를 가려 앉습니다. 목회자의 큰 교회 선망은 자리다툼을 낳습니다. 목회자에게 권력 지향의 자리다툼은 치열한 전투와 같습니다. 건축하다가도 더 큰 교회로 쉽게 자리를 옮긴다거나, 위임식을 하자마자 더 좋은 교회로 자리를 옮기는 모습을 주변에서 흔히 봅니다. 또한 하나님이 맡겨주신 교회에 자족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이력서를 들고 다니면서 장로들 앞에서 설교시험 치루는 모습도 보편화된 현실입니다. 이러한 일들이 가슴이 시리도록 우리를 아프게 합니다.
지방회와 총회의 항존부서는 이미 권력화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의 귀족 목회자들이 차지했습니다. 중진회의는 왜 필요합니까? 임원들이 일처리하면 됩니다. 임원들이 일처리를 못할 정도로 무능하면, 임원들을 바꾸면 됩니다. 옥상옥은 없어야 합니다. 권력의 맛을 오랜 기간 아니 영원히 잊지 못하고 계속 누려보겠다는 마음들의 모임이 아닌지 의심스럽습니다. 전직 대통령들이 모임을 갖고 ‘감 놔라 콩 놔라’ 하지 않습니다. 임기가 끝났으면 노무현 전직 대통령처럼 자연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내려놓지를 못하고 계속 유지하려는 것을 보면, 그 자리에 뭔가 있기는 있나 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가는 듯합니다.
물론 교회도 정치는 필요합니다. 그러나 교회 정치는 사람을 살리는 정치이어야 합니다. 권력 지향의 정치는 타락입니다. 사람을 실망시키는 정치는 허물입니다. 사람을 죽이는 정치는 죄악입니다. 일찍이 저는 목회를 시작하면서, 하나님 앞에 소박한 다짐 하나를 했습니다. ‘이력서 들고 다니면서 교인들 앞에 설교시험 치루지 않겠다.’ 사실은 설교 시험 경쟁에서 이길 자신도 없었습니다.
돈은 참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봉투 문화는 정도가 좀 심합니다. 그런데 교회가 그 문화를 따라가려고 합니다. 맵새가 황새 따라가면 가랑이 찢어집니다. 본래 촌지나 사례는 마음을 담아서 드리는 작은 정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촌지와 사례는 살려야 할 좋은 문화인데, 그 정도를 구분하기 어렵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자리와 돈 문제에 있어서 목사는 달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장로와도 달아야 합니다. 봉투! 받아보면 아주 좋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봉투에 익숙해지고 싶지 않습니다. 봉투의 노예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부임하면서 교회 안에 신선한 선언을 했습니다. 심방 때 도서비와 교통비, 결혼식과 장례식 때 사례비, 돌 칠순 개업 예배 때 사례비, 목사 생일 때 사례비, 교회 밖 행사에 참석할 때 출장비 등 모든 봉투를 거절했습니다. 그 동안 교회에서 주는 공식적인 생활비로만 살아왔습니다. 그렇다고 교회에서 주는 생활비가 많은 것도 아닙니다. 자녀들에게는 이렇게 세뇌교육을 시켜야 했습니다. ‘아프면 안 된다. 병원비가 없기 때문에.’ 청소년인데도 불구하고, 자녀들은 지금도 그 말이 진리인 줄 알고 삽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조금 불편하게 살면서 자족하는 훈련을 할 뿐입니다. 그렇다고 교인들에게, 다른 목사들에게, 다른 사람들에게 그렇게 살라고 요구하거나 강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저의 삶의 스타일일 뿐입니다.
목사로서 봉투문화 개선을 위해 실현 불가능한 꿈같은 이야기를 한번 해봅니다.
첫째, 청지기 정신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제도보다 중요한 것은 정신입니다. 교인들에게는 돈의 청지기로 살 것을 요구하면서 목사가 돈의 청지기로 살지 못하면 안 됩니다. 청지기는 주인이 돈을 ‘맡겨 주셨다’고 생각하지 절대로 ‘주셨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십일조 했다고 해서 무조건 그 사람이 돈의 청지기입니까? 나머지 십 분의 구(9/10)를 맘대로 할 수 있습니까? 교회의 재정이나 지방회의 재정도 결코 목사나 장로가 인심 쓰고 생색내면서 함부로 쓸 수 있는 눈먼 돈은 아닙니다. 내 돈 아니라고 막 써서는 안 됩니다. 교회가 목사 이름을 위해, 지방회가 목사 장로를 위해, 이벤트 하듯 불필요한 행사에 돈을 물 붓듯 부어서도 안 됩니다. 청지기는 검소할 수밖에 없습니다.
둘째, 봉투에서 마음만 받고 액수는 하나님께 돌려야 합니다. 목사는 액수가 많든 적든 교회에서 주는 생활비로 살아야 합니다. 물론 교회에서 목사의 생활비를 다 책임지지 못하는 경우도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봉투가 주된 생활비는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수입을 챙길 것이 아니라, 봉투 속에 담긴 감사의 마음을 받고 액수는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회의비로 3만 원짜리 봉투는 괜찮고, 5만 원짜리 봉투는 안 된다는 기준은 없는 듯합니다. 행사 순서를 맡거나, 회의에 참석하고서 받아 챙기는 봉투는 결코 목사의 부수입이나 용돈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를 들어 교회 재정에서 축의금을 지출하고, 답례로 받는 봉투는 목사의 호주머니로 들어가는 구조는 잘못된 구조입니다. 어느 교회 개척예배 후에, 참석한 모든 목사들에게 봉투를 주는 것을 보았습니다. 결국 목사는 봉투를 받으면서 예배를 드리고, 평신도는 헌금하면서 예배를 드리는 꼴이 되었습니다. 주님이 봉투 받는 목사나 봉투 주는 교회를 어떻게 보셨을까 자못 궁금합니다.
셋째, 할 수만 있다면 자원봉사자를 찾아야 합니다. 돈과 권력이 만나면 자칫 사람을 부패하게 하고 타락하게 만듭니다. 돈은 돈대로 들어갑니다. 지방회 안에도 심리부와 인사부 등 노른자위 부서가 있는 것으로 압니다. 돈과 권력이 만났기 때문입니다. 타 부서의 회의비는 왜 없습니까? 그보다 더 중요한 지방회에 참석했는데, 왜 회의비를 주지 않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노른자위 부서를 위해 자리다툼이 생기는 듯합니다. 우리 주변에는 자비량으로 할 수 있는 자원봉사자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대의원들 중에 회의비 받지 않고라도 그 부서에서 일하겠다는 자원봉사자들이 왜 없겠습니까? 대의원들 중에 거마비 받지 않고라도 그 교회 행사의 순서를 맡겠다는 자원봉사자들이 왜 없겠습니까? 회의비를 전혀 지출하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회의를 할 수 있습니다. 거마비를 전혀 지출하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행사를 할 수 있습니다. 회의나 행사 후에 사랑이 담긴 따뜻한 식사 대접 정도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돈과 권력은 가능하면 분리해야 합니다. 예산을 방만하게 사용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산을 절감해야 합니다. 봉투 속에 담긴 돈은 눈먼 돈이 아니라 교회에서 성도들의 피땀이 담긴 헌금이기 때문입니다.
...........................
불가능한 일입니다. 현실은 그렇지만, 그래도 꿈꾸며 살아보려고 합니다.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선배목사님, 죄송합니다.
2008. 5. 21.
정방원목사 올림.
-
김성찬
2008.05.22 22:49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고, 자기절제의 뼈저린 사례를 공개하시니, 변화의 가능태로서의 제자도가 얼추 피부에 와 닿습니다.
오늘 권사연합성회에서 장로님들과 FTA에 대하여 횡설수설 했습니다. FTA가 실행되면, 의료진료비와 처방, 처치비가 상상을 초월할 만큼 높아질 거라며, 이제 늙어 약발에 의지해야할 우리 노인네 신세가 처량해질거라며 염려와 푸념들을 늘어 놓았습니다.
제가 비방을 일러 주었습니다.
"아프면 안 된다, 아프지마, 아빠 병원비 없어!"
정목사님께서 자녀들에게 엄명하신 당부를.
그래도, 우리 아버지는 부자아닌가요?
교단이 썩었다고 탄식하던 청량리교회 남장로님께서, 어디 비방이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모두들 한마디로, 없다, 고 자신있게 대답했습니다.
지리시간에 배운 판구조론을 떠올려 봅니다.
이번 쓰촨성의 참사도 판이 흔들려 일어난 사고랍니다.
새 판을 짜는 수 밖에 없습니다.
총회가 새 판을 짤 수 없다면, 지방회 단위로라도 새 판을 짜야 합니다.
정목사님께서 제시하신 제자도의 그림자라도 밟아 보려면,
단언컨데, 현 지방회로는 불가능합니다.
그 제자도를 모토로 판을 짠 새공동체가 탄생될 수 있다면, 행여 그 흉내라도 내 볼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내적 자기 변혁의 경각심을 불러 일으킨 귀한 답글 감사히 받습니다.
허파꽈리에 물이 찼는지 이내 숨이 가뿝니다. -
무명
2008.05.23 09:11
김목사님! 그 증세는 허파에 바람이 들어갔다고 하는 증세인데...
사모님을 위해서라도 건강하셔야 합니다.
이 곳이 마약과 같습니다. 하루에 한 번을 들러보게 만드는 것이....
"아프면 안 된다, 아프지마, 아빠 병원비 없어!" - 이틀 동안, 이 말을 읽으며, 생각하며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초년 전도사 시절의 각오를 다져봅니다.
-
박병권
2008.05.23 10:41
청지기 정신, 주신 주님께 되돌림, 자원 봉사의 정신에 동감합니다.
아직 정치흐름에 승선은 못했지만 간간히 이러저런 모습으로 봉투를 받았습니다.
순간 받으면서 얼마가 들었을까? 하며 내심 궁금해 한적도 있고
어느 헌신예배 끝에는 어 사례(봉투)가 없는 모양이네? 하며 약간 서운한 적도 있습니다.
사안별로 각각의 경우가 있겠지만, 정목사님의 삶의 원리에 동조하고 싶습니다.
목회자로서 소박하고 청빈할 수 있다면 다른 일상의 편리함보다는 우선의
가치가 되기 때문이지요.
청빈 정결 순명이 카톨릭 수도사들의 강령이라지요.
가정을 이루고 사는 우리 개신교에서는 경우가 달라지지만 그 당위성은 십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충분치 않은 사례비로 살아가면서 저희 아들들에게 "병원 갈일 없으면 좋겠다"라고 말한적이 있기에 그 의미가 짜안하게 가슴에 내려 앉습니다.
개인이 변화되는 일은 신앙과 신학이 건전해야 하는 일이라 여기면서 마음을
다잡아보고,
구조적으로 덜 변질되게 하는 일은 판을 새로 짜는 일이 필요하리라 생각들고,
이래 저래 심사 복잡하게 만드시는 군요,
그럼에도 생산적 혼돈! 이러한 나눔의 장이 있어 좋습니다.
-
김성찬
2008.05.25 21:45
난, 어제 봉투를 거절했습니다.
내용인즉슨,
어제 말입니다. 서울중앙지방회 남전도회 주최 친선체육대회 개회예배 설교를 마치고 나온 나에게, 회장되신 이장로님꼐서 흰봉투를 내밀었습니다. 사례비라 여겨지는 돈봉투였습니다. 예전 같았으면 의례히 감사히 받았었을텐데.
순간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전혀, 그 어떤 의도도 없는, 그야말로 무의식적인 그 어떤 행동을 발하고 있는 저를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제가 그 순간 그 돈봉투를 거절하고 있었던것입니다.
내가 왜 그랬을까?
------.
내가 미쳤지, 차라리, 그냥 받아서 병권이나 줄 걸. 뽈차러가면서 내민 손, 냉정하게 뿌리쳤는데, 거기나 보태줄 것을---. 남전도회는 돈도 많을텐데.
한참 후, 제정신을 찾은 후, 나는 그 흰봉투 앞에서 내가 나타내 보인 그 뜻밖의 행위가 어디에서 기인된 것인지 궁금해 했습니다.
그건, 순전히 요 며칠 사이 날 공략한 정방원 때문이었습니다.
100프로, 정방원 탓이었습니다.
그것 말고는 달리 다른 이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 덫에 걸린 것입니다.
아니, 저가 나를 새 사냥군의 올무에서와 극한 염병에서 건지실 것(시 91편 3절)이라 그분께서는 약속해 주셨는데---.
극한 염병(?)에 걸린 것입니다.
그 바이러스가 나도 모르게 내 의식 속에 파고 들어와 날 무너뜨린 겁니다.
이건, 자랑이 아닙니다. 바보 짓을 한 내 푸념입니다.
다시는, 그리 말라고 날 붙어어 매는 이드(id,쾌락적 욕구)의 노예됨의 선언입니다.
난, 이제 다시 흰봉투를 받게 될 것입니다. 아니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난 이미 그 짜릿한 손맛을 잃은 것 같습니다.
정방원은 내 입 맛을 앗아 갔습니다.
왠지, 씁쓸할 것만 같은 그 흰봉투의 유혹, 그래도 난 손사래를 치지 못 할 것입니다.
전농중학교 교정에서 나도 몰래 쳐댔던 손사래는 이후로, 꺼림칙한 전설로 기억될 것만 같습니다.
욕해도 좋습니다. 욕먹고 일찍 죽은 사람 없답니다.
사람이 무슨 재미로 삽니까?
남, 욕하는 재미로 사는 것 아닙니다.
재미나게 사십시오. 만장하신 여러분!
게맛을 아직 모르는 니들,
니들이 그 게 맛을 알어? ㅋ ㅋ
-
양동춘
2008.05.25 22:46
돈봉투?
참 난감하네?
어려울 때는---?
나는 사무실에만 컴퓨터가 있다.
그러니까 지금 사무실에 있는거지.
즐겨찾기를 보고 가야겠다? 하니
이곳에 마음이 갔는데?
머, 그렇게 돈본투 받아 본적도 없지만?
일전에 이런 기사를 봤는데?
조선왕조에서 황희(정승)는 청빈으로 유명하다고 들었는데?
그도 탐관오리였다는데, 세종을 만나면서 사람이 됐다는 글이었다.
원론이지만 우리(나)도 예수님 만나고는
외식하는 바리새인과
돈밝히는 사두개인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할 일이 아닌가?
어쪘거나 이것 안되면 난감한 일인데?
가이드라인이라는 것 좀 없나?
정말 받아서 박목사(축구팀)라도 주었으면
일지매,임꺽정, 홍길동 반열에는 낄 수 있는건데?
하여간 답답하구먼?
(돈)돈이 무엇인지, 누구말대로 웬수인지? 그래서 돈을 사랑하지말라고 하셨나?
(봉)봉투받고 봉잡았다고 생각하면 정말 봉이 되는 것을?
(투)투덜거리지 말고 돈봉투 안받을 때가 좋은 것을!
<가이드라인1>
돈붕투 주는대로 받자, 준 사람 성의 생각해서?
마음에 걸리는 돈이면 성금(후원금)으로 보내자!
미얀마로 중국사천성으로 아니 까까운 동사무소로?
<가이드라인2>
받지말아야 할 돈봉투이라면 거절할 용기를 기릅시다.
이번 기회가 최소한의 성직자의 양심을 세우는 기회가 되기를!
계속 토론하고 나누었으면 합니다.
여전히 주 안에서 샬롬입니다!
걸렸네? -
김성찬
2008.05.25 23:36
답답하다니,
절로 그랬다니까, 담엔 안그런다잖아.
낼, 수원축구장엘 오라는데 기름값이 걱정이여.
나도 답답혀. -
동감
2008.05.25 23:40
그 삼행시 절묘하네요.
카피라이터로 전업해도 무리 없겠습니다. -
이경규
2008.05.27 09:53
돈봉투
받아도 됩니다, 아니 받아야 합니다. 받아도 된다고 여겨지면.
안 받아도 됩니다. 아니 받아서는 안됩니다. 받아서는 안된다고 여겨지면.
받은 사람은 안 받은 사람을 불편해 할 필요가 없고, 안 받은 사람은 받은 사람을 째려 볼 필요도 없습니다.
가끔 헷갈리는 경우도 있지만, 신앙양심상 거리낌이 없다면 받아서 잘 쓰면 됩니다.
돈봉투 받아본 적이 별로 없는(몇 번은 받았다는 이야기) 사람의 넋두리였습니다. -
이성우
2008.05.27 10:43
이 용도목사님의 일화,
부흥회를 다니며 집회를 마치고 모든 성도들이 합심하여 기도하는 동안 말도없이 슬그머니 그 자리를 떠나 기차를 타고 돌아오기를 여러번....
소문이 나니 목사님을 뒤따라 와서는 기차가 떠나는 순간을 포착하여 봉투를 목사님의 무릎위에 투척.
기차를 내려 집/아마도 인왕산이 있는 부근이라 기억합니다/까지 걸어 가는 동안 불쌍한 사람들 만나면 나누어주다가 집에 다다를때면 남은 것이 없었답니다.
그래서 이 용도목사님의 사모님은 오이 한가지를 갖고도 여러가지 반찬을 만드는 재주(?)를 갖게 되었다네요.
돈에 대한 생각..?
어떤 마음..?
결국은 우리네 속사람의 문제 아닌가요?
자리 다툼.!!!?
예수가 아닌 그 무엇에 목을 매달고 사니 더불어 비참해 집니다,
"내안에 예수가 없다!!!"라는 제목의 책을 보며 나의 중심을 들여다 봅니다. -
박원석
2008.05.27 19:30
돈에 대한 문제는 참 민감한 주제입니다.
필요하거든요. 그리고 그 힘이 얼마나 센지 ..... 그 아픔을 경험하지 안해보면 모르지요. 그래서 우리가 사는 이 땅에서는 돈에 대한 사건 사고들이 쉴 틈이 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신학교 입학식이 끝나고
기숙사 방배정을 받아서 들어갔더니 선배님께서 노트를 좀 보자고 해서 새 노트를 드렸댔습니다. 그러더니 첫 페이지에 쓰기를 "다음 세가지만 조심하면 목사로 승리하는 것입니다"라고 쓰고 아래에 1. 이성, 2. 권력, 3. 명예 라고 써 주시더군요.
지금도 이 세가지에 대하여 생각함이 있습니다.
오늘날 목사로서 정말 조심할 것들이 맞다고 봅니다.
성문제로 넘어지는 목회자.
정치하는 일에 바빠져서 목회는 뒷전에 있는 목회자.
명예를 추구하다 보니 사람 눈치봐야하는 목회자.
이밖에도 찾으려면 뭔들 못찼겠습니까?
문제는 내 눈에 들보가 문제이지요.
어느날
주님과 교제하면서 이런 것들이 스스로 사라졌습니다.
왜 사라졌을까?
주의깊게 묵상하다가 아 그렇구나!
내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
바로 예수님이심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예수님이 내게 올인하셨다는 사실에 감동이 되었습니다.
무엇이 예수님보다 중요할까
누가 이것을 모르나요?
다 알지요.
알기만 아는 것은 머리와 마음뿐
내 삶에서 예수님이 멀어지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말씀을 통해 교제하면서 돈문제가 정리되어 지고 이성문제도 정리되어 지고 권력문제도 정리되어 지더군요.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예수님이 해주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 안에 내가 있으니 내 소리가 나오게 되어있습니다.
내 안에서 생명이 있으니 생명의 소리가 나오게 되고
내 안에 빛이 있으니 빛의 소리가 나오게 되었습니다.
내 안에 나는 지금도 돈 좋아하고 성적으로 유혹받고 지나간 과거에 권력있는 분들이 저의 힘이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율법적인 체계에 길들여 져 있어서 뭐를 해라! 하지 말아라! 강요하는 것이 쉽고 나도 몰래 그렇게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알게 되니 점점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제가 예수님을 아는 만큼 그런 것들에서 벗어나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무슨 말을 하고 무슨 소리를 해도
본질에 분명하게 세워져가면 점점 변화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그 본질이신 예수님과 날마다 함께 하는 일에서 되는 만큼 되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듣고 알기는 내게 있어서 가장 귀하고 크게 여기는 것이 그렇게 여겨지고
작은 것은 별로 관심이 없어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적어도 저에게서
예수님이 가장 귀하고 크신 분이어서 다른 것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음에 감사드립니다.
근래에 저목사 또 뻔한 소리한다고 우리교회에서도 들려옵니다.
그렇게 소리쳐도
저는 예수님만을 전할 거라고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있겠습니까?
시간이 지나고 보면 주님께서 다 이루셨더군요.
그래서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고 오늘 괴로움은 오늘 족하게 하셨습니다.
저도 돈이 필요합니다.
저도 좋은 자리생각이 있습니다.
저도 큰 교회와 많은 성도들이 있기를 바랍니다.
저도 큰 차타고 좀 으시대고 싶습니다.
저도 좋은 사위와 며느리 보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땅에서만 필요하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믿어서
그냥 주님이 주시는 대로 받자!
내안에서 예수님이 그렇게 받도록 이끌어가시니 감사할 따름이고 나는 주님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고백할 뿐입니다.
그냥 생각나는대로 기록했는데 토의 내용에서 벗어난 엉뚱한 소리일 수 있는 것도
개념치 않고
나는 쇠하고 예수님만 흥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 -
김성찬
2008.05.28 23:42
왜, 예수가 그 마음속에 없겠습니까?
우리는 베드로처럼, 믿음이 작을 때가 종종(자주) 있지만, 믿음이 없었던 적이 없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70년대 선우 휘라는 논객이 있었습니다. 의도적으로 굴절한 인텔리겐차였습니다.
그가 쓴 컬럼 중 이런 글이 지금도 기억납니다.
그는 그 컬럼에서, 그가 6.25동란 중 강릉에 거했는데, 혼잣 몸 신부와 식솔들 줄줄이 거느린 목사를 대했던 이야기를 늘어 놓았습니다.
그 동란통에 자식들 거둬 먹이느라, 선창가를 배회하던 꾀죄죄한 목사와 그 난리 통에도 학처럼 고고하게 굴던 홀 몸 신부를 대비하며 쓴 글이었습니다.
식솔들의 먹거리를 위해, 썩은 생선 쪼가리를 물어 날리는 목사가 그는 못마땅했노라고 술회하고 있었습니다.
기독청년이었던 내 낯이 뜨거워졌었습니다.
내가 고교 졸업 후, 곧장 신학교엘 가지 않았던 이유 중 하나가, 사무총회 때마다 목회자 사례비를 가지고 시시콜콜 물고 늘어지는 고약한 인간들 언행 때문이었습니다.
경건했던, 청년시절 난 홀로 독처할 수만 있다면 독신으로 목회를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목회는 홀로 감당할 수 없는 복락이었습니다.
그렇게 사람들 눈에, 아니 실제가 일반인들과 하등 다를 바 없는 생활인으로 살아 가는 목회자의 길에 접어 든 것입니다.
그 누가 안타깝고, 부럽지만,
저는 너무 산속 깊이 들어와 버린 것 같습니다.
말씀만으로 이기기에는, 내 믿음이, 벅찬 현실이 힘에 겹습니다.
하여, 추상명사로서의 하나님이 아닌, 가산명사로서의 복락을 바라며 삽니다.
그래서일까, 갈수록 갈증이 더 심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예수가 아닌 그 무엇에 매달리는 노추가 흉칙합니다.
그 봉투가 내 곤궁을 채워줬노라던 가난한 선배의 현실적 고백이 귓전을 때립니다. 난, 그 선배를 욕하지도, 욕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목회적 이상은 항상 이상인가 봅니다.
-
무명
2008.05.30 17:49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단 정방원목사님에 대한 전설
제가 아는 선교사가 식사 도중에 정목사님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선교사를 후원하고 있는 정목사님 가정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교회를 건축하고 물질적인 어려움 때문에 사택을 반지하 단칸방으로 이사하고
다섯 식구가 생활하고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아이들을 위한 배려와 목회적인 것을 위해서 편한 생활을
택할터인데, 본인은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 생활하면서
선교지에는 거액(?)의 선교비를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송금하신다는 내용에
솔직히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런 목회자와 같은 하늘아래서 숨쉬고 있다는 것이 행복합니다.
활천에 40대가 간다는 내용이 나왔는데, 정목사님 같은 분이 그런 곳에
등장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나이에서 짤렸나????
아무튼 신선한 감동을 주신 정목사님과 불을 계속해서 지피고 계신
김목사님!
요즘! 제가 동역자의 의미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감사!!! -
양동춘
2008.05.30 18:28
돈봉투와 자리가 그 사람의 인격인 것을!
돈사랑과 감투가 그 사람의 됨됨이 인 것을!
돈이면 다 되는 세상에서 감투까지 있으면 이름하여 금상첨화라고하지 않던가?
조용히 묵상기도합니다.
주님, 돈을 주옵소서!
교회개척에 필요한 돈을 주시고,
주인이 올린 교회보증금을 허락해주시고,
교회 월세와 관리비를 주시고,
약속한 선교비를 주시고,
늘 주시도록 요청하는 기도뿐이였습니다.
그렇다고 안주셨느냐?
그때마다 왜 돈만달라고 하느냐 책망하시지 않고 주셨습니다.
내놓고 이야기 합니다.
나눔교회 이야기입니다.
어느날부터 금요 기도회마다 헌금을 하고 필요한 이들에게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그 금액은 5-10만원선입니다.
매번 바로 나누기도하고 필요하면 모아서 나누기도 합니다.
일전에는 예닮교회와 미얀마 김선교사의 s.o.s를
마음에 두고 금요일에 기도하고 조금 보탰습니다.
당장 이번 주일에 행사가 둘이나 되서?
그래도 개척이 우선순위(?)라면 그곳을 위해 기도하고
아주 적지만 장애인과 함께 하는 나눔 교회에서 오병이어를 드릴 마음이 생깁니다.
미안합니다.
금요일뿐만아니라 많이 모이지도 않는 새벽기도시간까지 먼지를 텁니다.
한달을 모아서 지나가는 선교사님 또는 급하고 도움이 필요한 이웃에게 나눕니다.
5월 한달 모은 사랑은 나눔교회를 섬기는 자비량여전도사님의 고엽제장애인 남편이 화장실에서 그만 팔이 부러졌는데 수술을 하신답니다. 그것에 일조했습니다.
아주 열심히 돈봉투를 모음니다.
웨슬레의 말대로 열심히 벌어야 합니다.(정당하게 땀을 흘려서!)
그리고 열심히 주님의 이름으로 사랑을 나눕니다.
이런 마음이라면 주는 사람만 있으면 열심이 받고 싶습니다.
열심히 주면 되니까요!
그러다 잘못 받아소 감옥에 간다해도 멋진 고난이 아닌가요?
조금 곁(?)길로 갔는지 모르겠군요?
삶이 어우러진 정방원목사님을 축복합니다.
돈봉투와 자리에 걸맞는 많은 주님의 사자들이 나오기를 기도하면서 기대합니다.
(돈) 돈붕투를 주세요! 사랑으로 나누겠습니다.
(봉) 봉투를 풀칠해서라도 돈을 벌어 헌금하는 할머니 권사님이 생각납니다.
(투) 투기를 해서 돈벌 형편은 안되지만 동전두닢의 주인공만되어도 감사하겠습니다.
샬롬!
-
김성찬
2008.05.31 09:02
이제, 정목사를 놓아 줍시다.
그가 단칸 지하방에서 다섯식구와 함께 뒹굴었을 희열을 그분만의 추억으로 남겨 놓으십시다. 그 시퍼렇게 날 선 의식과 실천이 하모니를 이룬 제자도로 그가 살아간다면, 그 정신으로만 산다면 그가 99칸짜리 구중궁궐에 살아도 그는 그인 것입니다. 지하 단칸방에서 진짜 매사에 껄떡거리며 사는 거지같은 삶을 사는 사람도 있고, 고대광실에 살아도 신선같은 삶을 사는 이들도 있을 것이기에 말입니다.
난, 그렌저를 타는 정방원의 제자도를 오히려 보고 싶습니다.
돈봉투 이야기도 그만 합시다.
도통한 스님이 물에 빠진 여인을 구해냈습니다. 반라(半裸)된 여인을 안고 뛰는 그 스님을 사람들이 비난했답니다. 중이 여자를 탐한다고. 그 비난 앞에, 그 스님 왈, 어 그게 여자였나, 했답니다. 어, 그게 돈봉투였나?
더 큰 문제는, 구조적 병폐에 있습니다.
눈먼 돈으로 인식하고 있는 공금사용에 대해 엄격한 감사가 요청된다는 것입니다.
내 자랑이 아니라, 제가 몇 해전 청소년 부장을 하면서 그 한해 기천만원의 예산을 집행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단돈 한푼도 제몫으로 챙기지 않았습니다. 챙길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챙길 것이 너무도 많았지만 말입니다. 근데, 그 예산 집행에 대해 그 누구도 문의 하거나, 행정적 감사 같은 것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부패하게 하는 관용(?)입니다. 이런 관례에 서울중앙지방회는 너무 익숙해져 있습니다. 임원들에게 몇푼 주는 회의비만이 문제가 아닙니다. 전방위적 감시체제가 작동되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금년부터 우리 지방회에서는 전 부서에 대해 감사를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런 노력이 경주되면 우리는 투명하고, 효율적인 재정집행을 하게 되지 않을까 기대해 봅니다.
오월의 노래입니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 날이 올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고 상처는 남는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리 산 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리 산 자여 따르라
-
박병권
2008.06.04 11:44
왠 님을위한 행진곡이?
정목사님이 앞서서 가시고 있으니 따르자는 것?
아니면
김목사님이 앞서 가겠으니 따르라구요?
비약이라면, 원리적으로 말해서,
작은 실천도 현실적으로 쉽지 않으니 굳은 각오로 해야 한다는 뜻?
여하튼 참신한 문제제기 앞에서 여러행동을 되새겨보게됩니다.
사람이 도덕적으로 자리매김하는 일이, 비도덕적인 시스템과 조직안에서
힘든게 사실이기에,
목회자가 돈의 활용에 있어서 선용의 위치에 있기위해서,
목회자 개개인의 정당한 인식과
좋은 씨스템의구축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돈봉투를 받으려하기 보다 자원봉사의 인식을 갖고
물질이 마음을 흐리지 않도록 예산편성을 면밀하게 하고
집행에 있어서 투명하고 사후 점검에 정확히하고
지방회 전체예산을 대폭 삭감하여 돈이 잘 못 유통될경로를 막고
등등,
기존의 조직에서 개선하기가 힘들면
새롭게 판을 짜는것도 괜챦겠다 싶기도 하고
쉽지 않은 해결과제이군요.
-
딴지하나
2008.06.04 23:37
이런 문제를 가지고 이렇게 구구절절 말한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쪽팔린 일인 것 같습니다
꼭 중세시대의 도케티즘의 현대판 부활이라고나 할까?
정말 쓸데없는 논의라 생각합니다
이런 걸 지금 걱정할 때가 아닌 것 같은데요...
나라가 어떤 시국인데 정말 우리는 너무 한가로운 것 같네요.... -
김성찬
2008.06.05 11:23
어떤 시국인데,
왠, 뜬 구름 잡는 수다들이냐 라는 말씀이시군요.
글쎄요.
그 시국이나, 이 시국이나 그 혼미함을 관통하는 이 하나의 주제는 동일한 것 아닐까요?
리더십 부재. 아니, 부실한 리더십. 시대역행적인 리더십.
우린 그걸 이야기 해 보자는 겁니다.
돈봉투를 넘어, 쇠고기협상을 넘어 우리가 바라보고, 지향해야할 공동선이라는 가치말입니다.
청와대에서 서울광장으로, 그 교권의 권좌에서 데린구유로 성육신하는 리더십.
p.s
딴지하나님의 자극적인 언사들이 줄을 잇고 있지만,
그건 다 이해한다 해도,
중세시대의 도케티즘의 현대판 부활이라는 지적은 이해도 안되고, 동의도 어렵습니다. 자세히 그 논거를 제시해 주셨으면 합니다.
정말, 우리가 뜬구름 잡고 있습니까? -
양동춘
2008.06.05 20:34
뜬구름?
미국은 무조건 나쁘다!(반미성향)
미국은 무조건 좋다!(친미 더나아가 숭미)
이 자리에서 무슨 "친미다, 반미다"냐? 생뚱맞게?
그렇습니다.
지금 미국은 40년전 흑인지도자 마틴루터킹목사를 보내고
오바마 상원초선의원을 민주당 대통령보로 만들었습니다.
"변화와 희망"을 기대하고 말입니다.
오바마의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우리 안에서 두 부류의 애국자가 있습니다.
이라크에서 철군을 지지하는 애국자가 있고,
이라크에서 철군을 할 수 없다는 애국자가 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 오바마는
적을 만들기보다 통합과 함께 변화를
그리고 희망을 말하고 있음을 느끼게 하고 있다.
돈붕투가 돈봉투만의 문제라면 어느 분의 충고대로 더 이상 논할 지는 없는 셈이다.
돈(돈에 대한 태도)는 "삶" 그 자체입니다.
(행여)돈을 좇다가, 믿음에서 떠나 헤매면서, 많은 고통을 겪는 사람이 되지 말라고(딤전6:10하/새번역) 했습니다.
바울사도의 지적처럼 그런 사람이 될 수는 없겠지요?
더 적극적으로 "--덧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풍성히 주셔서 즐기게 하시는 하나님께 소망을 드라고 하십니다.(딤전6:17)
그래요, 돈봉투 이야기는 이 정도로 끝냅시다.
돈봉투에 임한 하나님의 평화(샬롬)가 넘치시기를!
샬롬!
(돈)돈봉투, 그대 앞에 진심을 보입니다.
(봉)봉이 되고 싶지 않아 어느 책제목처럼
"하나님 다음으로 돈을 사랑한다."고 고백합니다.
(투)"투기(시기)하지말라"고 하신 말씀처럼 돈봉투 시기하지 않는
초연하고 성숙한 경건한 신앙인이 되기를 원합니다. 샬롬!
-
깊은생각
2008.06.05 23:12
이쯤에서 한마디 해야 할까, 아님 저쯤에서 한마디해야 할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해 보았습니다...그 망설임은 본 토론의 주제가 투수의 변화구처럼 투수 손에서 떠날 땐 직구같이 보이다가 점점 땅으로 내려 떨어지는 변화구 같아보여 말입니다.
정목사님의 설교에는 정말 돈봉투에 대한 문제만 있는 건가 ??? 하는 착각을 유도하게 하는군요....사실은 지금 우리 지방회 나아가서 총회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한 통렬한 자아 반성적인 비판이 아닌가 하는데....물론 유비통신입니다만...큰 돈을 들어서 총회의 높은 자리에 앉고 싶은 분....또 총회 행정 책임자가 되고자 하시는 분, 또 지방회에서 행세를 하려면 꼭 총회 대의원으로 가야만 하는 것 같은 착각을 가지신 분, 그 분들에게서 시작되어져 어느덧 다음 세대에 전해져 내려오는 오랜 전통(?????)과 같은 명예와 권위주의의 발상등등...그것 덧 붙여서 목사를 끝내 좌절케하는 돈봉투의 문제까지....거론된 것 같다는 생각을 해서 처음에는 이런 문제에 대한 깊은 성찰의 토론이 있을 것 같았는데....결국...돈봉투를 받네....안받네....뭐 이런 결론으로 끝이 나는 것 같군요....
개혁은...어디로.....반성은 어디로......그리고 우리 교단은 어디로......아~~~이 나라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
옛 노래 가사가 갑자기 생각나는 군요....전영인가 하는 가수가 불렀죠....
어디쯤 가고 있을까~~~~~~~~ -
김성찬
2008.06.08 22:09
깊은생각님의 깊은생각 깊이 생각해 봤습니다.
이 홈피 글모음 동네방네에 제글 한편 답글로 올립니다.
'교회마저 이기주의에 빠졌는가'입니다.
한번 읽어 주십시오.
쌩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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