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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에서 만난 여자

2008.05.09 18:59

영목 조회 수:1459 추천:53

장승리 지하철에서 만난 여자/장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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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결의 안팎

 


역삼동을 가려면 이리로 가는 것이 맞나요
그렇다는 대답을 서너 차례 듣고서도
또다시 묻는 여자
역삼동을 가려면 이리로 가는 것이 맞나요
검은 뒤통수들이 뱉어 놓은 가래침이
여자 얼굴 위로 흥건하다

물결이 될 수 없어 아픈 여자
바람 한 다발 꺾어 그 품에 안겨 주고 싶은데
출렁이고 싶어
칼 한 자루 손에 쥐고
이리저리 제 몸을 헤집어도
붉은 빗방울 하나
제 목을 적시지 못하는 여자

고여 있는 제 몸 더러운 물도
양 손으로 떠올려 놓고 보면
투명한 것을
더러운 투명함만 헤아리고 또 헤아리다
결국 제 가슴에 강물을 포개 놓고
바느질을 시작하는 여자

안 땀, 겉 땀
흰 이빨 훤히 드러내며
강물 위로 번지는 백치의 웃음이
내 입술을 억지로 잡아당긴다

 

 

알리움 / 장승리

 

무덤 속 시체들이 벌떡벌떡 발기하는 동틀 녘

난 가끔씩 내 무덤에 알리움 한 송이 들고 찾아 간다

(무덤에 다다르려면 낡은 나룻배를 타고 가야해

할머니 환한 주름 같은 서글픈 물결을 따라 강을 건너야 하지)

무덤에 다다르면 알리움 한 송이 무덤 앞에 내려놓고 

내 이름이 적혀 있는 묘비 앞에서 잠시 눈을 감는다

눈물샘에서 헤엄치고 있던 잉어 한 마리 파드득 몸부림 칠 때

눈물샘에 동글동글한 파장이 생겨 그 모습에 또다시 코끝이 찡해져 올 때

그제야 난 눈을 뜬다

나를 태우고 왔던 나룻배처럼

무덤도 강물 따라 소리 없이 흘러가고

내 몸에서 여문 꽃잎 하나씩 따다 무덤 위로 떨어뜨리니

꽃잎을 밟고 가는 무덤의 발자국 소리가 내 얼굴을 밟고 간다

강물 위를 떠돌던 하얀 물새는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고

무덤은 붉은 열매처럼 빛나는데

내 집 담장 너머를 기웃거린 죄

한참을 서성이다 초인종을 누르고 도망친 죄

나보다 더 큰 내 원죄를 임신한 저 무덤이 내 얼굴을 밟고 간다

*알리움 -'끝없는 슬픔'이라는 꽃말을 가진 꽃 이름

[2003 중앙신인문학상] 시 당선작 서울 한세대

 

 

 

뒤통수/장승리


마름모꼴의 운동장을 걷고 있다 뾰족한 끝, 그 끝이 너무 아득해 아찔하다

초여름인데 난 내복 위에 반팔 소매의 빨간 티셔츠를 입고 있다 저 앞에 엄

마와 여동생이 손을 잡고 가고 있다 참으로 다정해 보이는 모녀지간이다 난

운동장 밑바닥에 깔려있는 모래와 함께 서걱이며 그 뒤를 따르고 있다 맞잡

을 손이 없다 운동장에선 포근한 지하실 냄새가 난다 그 냄새 사이로 스며들

고 싶다 운동장 밑, 숨겨진 지하실로 주저앉고 싶다 한번도 뒤돌아보는 법

없는 엄마의 뒤통수 눈물로 얼룩진 희미한 그 뒤통수가 내 세상의 전부였다

난 한번도 세상의 앞모습을 본 적이 없다 엄마, 엄만 그 누구의 모진 뒤통수

를 바라보며 고개를 떨구었길래 그토록 막막한 당신의 뒤통수를 나에게까지

유전하는 건가요 엄마와 난 뿌리는 대로 소출할 수밖에 없는 깜깜한 흙 밭

이라는 걸 몰랐나요 엄마 덕분에 내 뒤통수도 촉촉하게 젖어 있어요 뒤통수

를 적시는 불쌍한 그 눈물들에 흠뻑 취해 미지근한 토사물 속에서 잠이 들어

요 씹고 또 씹어 삼켜버린 엄마의 뒤통수는 내 피와 살이 되지 못한 채 토사

물 속에 뒤섞여 서럽게 울어대고 울음소리에 깨버린 난 토사물과 함께 땅바

닥에 들러붙는다 시간을 잃어버린 오래된 벽시계가 밤하늘에 걸려있다 난 나

를 뒤로 한 채 초점 잃은 시계 바늘 위에 걸터앉아 내 뒤통수를 물고 날아가

는 시간의 뒤통수에게 손을 흔든다

 

 

 

우뇌가 없어도 울 수 있는 - 장승리


  
걸레를 들고  내 온 몸을 닦는 아빠, 소용없어요 먼지는 없어지지 않
아요 단지 이동할 뿐이죠   먼지의  컨설턴트* 노릇은 이제 그만하세요
당신이 열심히 닦아 놓은 내 자궁 위로 벌써  이렇게 검은 눈이 쌓였잖
아요 커트라인에 걸려 아빠가 될 수 없다고 울고 있는 아빠, 이제 제발  

  
무덤을 싣고 노 저어 가는 바람 냄새가  견딜  만하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마음껏 날아다닐 수 있는 천  개의  내 클레토리스가 견딜 만하
고 견딜만한 해서 견딜 수 없는 敵, 날아오는  수백 개의 도끼 날 중 하
나에 정통으로 맞아도 아픈지 모르겠고 의사의 처방전 같은 당신의 연
애편지는 이제 신물이 나고 거지들이 내 찌그러진 눈동자  속에 적선을
다 하고  

  
정오의 해 위로 X  모양의 검은 테이프를  붙여  놓고 사라지는 당
, 당신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내 뒷모습은 안아 주지도 못한 채  오른
손 왼손을 번갈아가며 올렸다 내렸다 한다 나에게서 겨자씨를 뺀 것만
큼의 내가 산들을 움직이고 파도를  멈추게  하고  꽃들의 입을 영원히
틀어막을 수 있다고 어둠은 내 얼굴에 흰 얼룩을 남기는데



 

 

모서리가 자란다 / 장승리

 

 

사방이 거울이다 거울이 바라보는 거울 그 미궁 속을 헤매다 아침이 되면 파란 곰팡이로

부활하는 여자 여자의 모서리로 거미가 빨려들어간다 여자가 남겨진 거미줄에 물을 준다

모서리가 점점 커진다 쨍하고 거울이 깨진다 시간을 질주하던 오토바이가 급브레이크를

밟는다 등이 굽은 백발의 소녀가 깨진 거울 밖으로 튕겨져나와 여자에게 오버랩된다 더

이상 허수아비와 십자가를 구분하지 못하는 여자는 죽음에 집중할 수가 없다 죽음보다

집중이 더 중요한 여자 여자는 바늘과 섹스라도 하듯 항상 엄지발가락에 잔뜩 힘을 주고

있다 손가락으로 하나, , 셋을 세다 너무 힘들어 네 번째 손가락을 굽히지 못한 채 깨진

거울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여자 여자가 거미줄에 걸려 있다

 

 

난생 처음 목련이 아름답게 보이던 날 /장승리

 

 

광신도인지 마귀새끼인지 그게 그건지 손에 칼을 들고 성경구절을 인용하며 목청 터져라 설교를 하다 칼로 제 목 위로 사선을 긋고 붉은 피가 고이고 그것도 모자라 여기저기 자기 몸에 상처를 내는데 도망 다니는 나를 낚아채어 내 몸에도 칼집을 내려고 별 지랄을 다 떨다 실패하고 간신히 내 손가락 하나를 잡아 회 뜨듯 살점을 도려내는데 아파 죽겠는데 개새끼 내게 그런 힘이 어디서 났는지 그 놈을 이불에 돌돌 말아 큰 상자 안에 넣고 불을 붙였는데 어째 그 놈 불에 타는 소리가 다시 살아나는 소리 같아 조마조마했는데 아빠 가시덤불을 한 아름 안고 오시더니 상자 안에 집어넣어 주시는데 이번에 타는 소리는 진짜 소멸의 소리 환희의 소리 아름다운 음악 소리 신이 나서 적당히 남은 불씨 위로 물을 주는데 아빠가 물을 너무 많이 주면 들고 가기 무겁다고 적당이 주라고 해서 상자를 흔들어 보니 진짜 물이 출렁거리는데 아빠 이 물은 전날 아빠 보고 싶어 흘린 내 눈물인데 쏟아 낸 눈물만큼 나는 더 무거워지는데

 

 

자연의 아이들* /장승리

 

 

죽어서 걷는 길을 보았던 걸까

정작 죽어서는 볼 수 없는 길을

길 한쪽으로 정렬한 백목

그림자조차 눈이 부시다

왼쪽 풍경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시작과 끝이 보이지 않는 계단이 내 발자국을 따라오다

문고리가 없는 나를 두드린다

나조차도 들어갈 수 없는 나

나를 통과한 계단은 이미 보이지 않는다

문 바깥쪽에서 깨져 버린 발자국들이

마음껏 흩어지지도 못하고 주춤거리다 담배를 문다

구름 한 모금이 내 몸 한구석에 길게 드리워진다

몇 년 전 돌아가신 증조할머니가 남편이 되어 내 옆에 누워 계신다

나를 꼭 잡고 있으면서 제발 자기를 놔 달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