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벌초

2008.05.09 19:34

영목 조회 수:1050 추천:56

이명윤벌초

이명윤

시간은 복사기 불빛처럼 스치고 달아나요
A4용지처럼 아스라이 쌓여가는 일상을 뒤로 하고
오늘은 아버지, 당신에게 가는 날
어머니는 아버지 머리 깎는 날이라 하시고 아내는
스케줄에 의한 세 번째 집안행사라고 하지요
망자의 침묵도 아랑곳없이 여기저기 무성히 내민 손들을
저는요 아버지 근심이라 생각할게요
오랜 세월 지났어도 안부처럼 자라나는
그래요, 아버지 근심 들어 드리려고 왔어요
아가, 너희들 근심이나 밑동을 치려무나
제초기로 대출이자나 싹둑 자르거라
그렇군요 낼 모레가 또 대목이네요
왜 바람은 빈 호주머니부터 더듬을까요
근심은 잡초보다 빨리 우거져요
수풀 속에서 나비 한 마리 날아올라요
우리 기억은 너울너울 가벼워지고 있나요
거미줄에 걸린 저 벌레
기억상실증에 걸린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네요
죄송해요 아버지, 오래 있진 못하겠어요
저기 길이 한숨처럼 뱉어내는 긴 행렬을 보세요
집으로 오는 길
가지 끝마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 백일홍을 보았어요
쉬이 잠들지 않는 바람에
고장 난 시계추처럼 머리를 흔들며 앞다투어
가을을 넘고 있었어요.

* 2007년 [시안] 신인상 당선작 중에서


<시마을 문학상>, <전태일 문학상> 수상
2007년 <시안> 신인상 당선
시마을 최우수작가(4회)
시마을 동인
시마을 <청소년문학방> 운영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