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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 않네, 모든 것들

2008.05.09 19:51

영목 조회 수:2391 추천:60

함성호          오지 않네, 모든 것들

함성호  

 

 

        나 은행나무 그늘 아래서

        142번 서울대―수색 버스를 기다리네

        어떤 날은 나 가지를 잘리운

        버즘나무 그늘 아래서 72-1번 연신내행

        버스를 오래도록 기다리고

        그녀의 집에 가는 542번 심야 버스를

        하염없이 기다린 적도 있네

        앙상한 가로수의 은밀한 상처들을 세며

        때로는 선릉 가는 772번 버스를

        수없는 노래로 기다리기도 하네

        그러다 기다림의 유혹에 꿈처럼

        143번 버스나 205-1번 혜화동 가는 버스를

         생으로 보내버리기도 하고

        눈 오는 마포대교를 걸어 아무도 없는 빈집에서

        나 실연의 시를 적기도 했다네

        어느 한 날은 205번 버스나 50-1번 좌석버스를

        깊은 설레임으로 기다린 적도 있었지만

        그 짧은 연애를 끝으로 눈 내리는 날에서

        꽃이 피는 날까지

        그런 것들은 쉽게 보낼 수 있게 되었다네

        패배를 기억하게 해주는 것들, 이를테면

        성남에서 영등포까지, 홍등이 켜진 춘천역 앞을

        지나던 그 희미한 버스들을

        이제 나는 잊었네

        나 푸른 비닐 우산의 그림자 안에서

        기다림의 끝보다

        새로운 기다림 속에 서 있음을 알겠네

        오늘도 나 147번 화전 가는 버스나 133-2번 모래내

         가는 버스를 기다리네

        이제는 더 이상 부를 노래도 없고

        어느 누구도 나의 기다림을 알지 못하네

        오지 않네, 모든 것들

        강을 넘어가는 길은 멀고

        날은 춥고, 나는 어둡네

 

 

함성호 시인
1963
년 강원도 속초에서 태어나 강원대 건축과를 졸업했다. 1990년 계간 「문학과사회」 여름호에 '비와 바람 속에서' 3편을 발표하면서 시단에 나왔다. 시집 <56 7천만 년의 고독>, <() 타즈마할>과 산문집 <허무의 기록> 등이 있다.
1991
년 건축 전문지 <공간>에 건축 평론이 당선되어 건축 평론가로도 활동하고 있으며, '21세기 전망' 동인이다. 2004년 현재 건축설계사무소 EON을 운영하고 있다.

 

『聖타즈마할』 / 함성호 / 문학과지성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