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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무덤 위에 앉아 쉬리니

2008.05.28 11:30

구재천 조회 수:1200 추천:46

박정만

박정만

내 무덤 위에 앉아 쉬리니

 

 

 

사랑이여,


이 세상 가장 순결한 꽃잎의 이름으로


저 하늘에 내 이름이 적히리니


그때에 이르기를 인생은 한마당 꿈이라 하라.

 

 

나는 사망의 검불이요


그 무덤을 덮는 한 촉의 풀잎이니


이제 뿌리째 들어내어


저 오뉴월 땡볕 아래 가차없이 던지시라.

 

 

그리하여 마르고 마른 땅에


마른 줄거리같이 육신의 뼈가 놓일 때


아득하고 어두운 저 적소위에


내 생도 사라지고 풀잎 또한 시든것을.

 

 

그러나 아낌없는 세월이 또 흘러


어느 황량한 빈 벌판 길에


목마른 황혼의 계절이 찿아오면


한 나그네 내 무덤 위에 앉아 쉬리니


그때에 거듭 이르기를 인생은 한마당 꿈이라 하라.

 

가는 길 없음을 나는 아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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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시인을 죽였는가-박정만

오늘 우리의 삶은 내일의 역사가 된다.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삶이 역사와는 무관하다고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살아 간다.시인 박정만도 우리와 다를 바 없는 그런사람이었다. 시 말고는 아무 것도 없었던 사람. 시인 아니고는 아무것도 아니었던 사람.박정만은 그런 사람이었다.그러나 운명은 그가 어떻게 생각하든 말든 이상한 방식으로 한 평범한사람을 시대와 관계를 맺게 한다. 1981년 국풍행사가 요란하던 5월 어느 날, 그는 일명 '빙고호텔'로
불리던 보안사 서빙고분실로 끌려간다. 그리고 7년 후, 43살의 젊은 나이에 시인 박정만은 세상을 떠난다.
어쩌면 아무 것도 아닌, 시대와는 너무나 무관한 듯한 한 시인의 죽음을 통해 그 시대를 조명해 본다.

1. 박정만은 누구인가?

박정만은 1981년 5월 이른바 한수산 필화사건에 연루돼 가혹한
고문을 받고 그 후유증으로 생을 마감한 시인이다. 그는 시인 김소월의
계보를 이어 한국서정시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을 만큼
순수한 시세계를 노래했던 인물이다. 그는 개성있는 시를 통해 민중의
한과 슬픔을 남도의 유장한 가락으로 담아낸 천부적인 서정시인이기도
했다. 그러나 80년대는 자유를 갈망하던 서정시인마저 죽음으로
몰아갔던 시대였다.

2. 그는 왜 죽을 수 밖에 없었나?

박정만은 자신이 사회운동을 한것도 아니고 민주화운동에 헌신했던
인물도 아니었다라는 사실을 밝혀달라고 유언을 남겼다. 시인의 양심이
진실을 왜곡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너무나 결백한 시인의
마음은 시대의 모순을 견딜 수 없었고 자신에게 가해진 폭력 또한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은 한 시인의 삶과 그가 살았던 시대와의
불화라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런 그에게 주어진 것은 죽음이라는
극단의 길이었다. 그는 죽음을 향해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3. 박정만의 죽음은 그 시대의 죽음이었다.

박정만과 작가 한수산은 책을 출판하려는 목적으로 한두번 만난 일
밖에 없는 관계였다. 그러나 박정만은 소위 '한수산필화사건'에
연루되어 고문과 함께 죽음에 이르는 고통을 겪었다. 그러나 그것이
우연에 불과한 사건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힘에 의해
권력을 잡은 자들의 무자비한 폭력이 이 사회를 억압하던 시절. 그의
죽음은 그 시대를 살던 모든 이들이 겪을 수 있는 일이었고, 그런
의미에서 그의 죽음은 그 시대의 죽음이었다.

4. 시인의 전설

고문으로 인한 고통을 겪은 후 그는 알콜중독으로 망신창이가 된다.
그러나 죽음을 맞기 1년 전 단 20여일 동안 무려 300여편의 시를
쏟아내는 초인적인 능력을 보인다. 이때 그는 기존의 허무주의를 넘어
현실비판과 참여의 의지를 거침없는 시어로 보여준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 그의 생명이 마지막으로 용솟음치는 절명의 순간에 接神에 가까운
경지에 이르러 그 일을 치러냈다. 그러나 그는 그 순간 이미 전설이 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서울올림픽 폐막식날인 88년 10월 2일, 그는
자신의 봉천동 셋집에서 홀로 죽음을 맞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