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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인가? 쇼인가?

2012.12.01 16:02

최성상 조회 수:887 추천:31

발제자: 강충선목사 모임 일시:2012년 11월 27일(화)

A.W. 토저(A.W. Tozer) 예배인가, 쇼인가(on Worship and Entertainment)

토저는 교인수의 성장을 위해서라면 대중의 인기에 야합하고, 거대 기업의 경영방식을 무차별 차용하고, 할리우드 엔터테인먼트 방식을 예배에 도입하는 것에 대해 통렬한 비판을 가하였다. 그는 현대의 교회가 물량적인 성장을 위해서라면 교회의 순결성을 포기하는 듯한 자세를 보일 때는 그것을 좌시하지 않고, 언제나 선지자의 음성을 발하였다. 듣든지 안 듣든지 이스라엘 교회의 세속화를 준열히 책망했던 예레미야처럼, 토저도 이시대에 아부하지 않고 하나님교회의 순수성을 파수하기 위해 ‘강력한’말씀을 선포했다. 그래서 토저는 ‘이 시대의 선지자’라는 평판을 들었다. 토저가 신앙의 개혁을 위해 외쳤던 뜨겁고 강력한 메시지를 이 시대의 우리도 들어야 한다.”

머리말

“예배가 변질되면 교회가 변질된다.”

평생의 사역이 끝날 무렵 A.W 토저 박사는 세상이 교회 속으로 침투하여 교회를 잔인하게 유린하는 것을 막지 못하여 전쟁에서 패배했다고 술회했다. 그는 기독교가 빈혈증에 걸려서는 안 된다고 역설하면서, “많은 교회가 기독교의 진리에 물을 타버렸다, 그리하여 그것이 독이라 할지라도 그 누구도 죽일 수 없고, 그것이 약이라 할지라도 그 누구도 고칠 수 없게 되었다”라고 비판했다 토저는 ‘엔터테인먼트(Entertainment)라는 큰 우상’이 예배를 타락시킨 주범이라고 진단한다.

1부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예배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이 우리를 창조하신 본래의 목적을 위해 우리를 다시 부르고 계신다.

그 본래의 목적이란 하나님을 예배하며 하나님을 영원히 즐거워하는 것이다. 우리가 전심으로 참예배를 드린 후에야 비로소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올바른 순서이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예배를 지겨워하는 사람은 아직도 천국에 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이다.

1장 먼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예배하라

예배의 대상은 하나님이시다. 니케아 신경은 우리가 ‘한 하나님, 즉 천지를 지으신 분,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지으신 분, 전능하신 아버지’를 믿는다고 고백한다. 우리는 바로 이런 분을 예배하는 것이다.

예배를 드리고 싶어 하는 것은 인간의 보편적인 본능이다. 예배를 드리지 않는 인종이나 종족이 이 세상 어디에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런 인종이나 종족에 대해 이제까지 알려진 바는 없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예배는 너무나 불완전하고 잘못된 방향에 빠져 있고 순수하지 못하다.

예배를 이루는 몇 가지 요소들이 있다. 그 중 하나가 ‘감탄’(admiration)이다. 예배하지 않고 감탄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감탄 없이 예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둘째, 존경(honor) 또한 필수적인 요소이다. 셋째, ‘매혹’(fascination)이다. 우리를 매혹하는 것이 아니면 우리의 예배 대상이 될 수 없다. 예배하기 위해서는 감탄과 존경만으로는 부족하다. 거기에는 매혹하는 신비로운 힘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아 예배를 향해 열리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넷째, 사랑(love)이다. 어떤 대상을 예배하지 않으면서 사랑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사랑하지 않으면서 예배하는 것은 불가능 한다.

예배는 사랑하는 대상과의 연합을 추구한다. 우리의 마음과 우리가 숭모하는 하나님 사이의 간격을 메우려는 적극적인 행위가 최고의 예배이다.

우리 마음을 안정시키고 달래기 위해서 교회에 간다는 사람들의 말에 나는 동의할 수 없다.

예배 드릴 때 우리 마음이 안정되고 평안을 얻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교회 출석의 일차적인 목적은 아니다. 그 목적은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배는 본래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을 건강하게 만드는 것도 예배이다. 지성을 갖춘 도덕적 피조물들이 서로 화합하여 드리는 예배는 피조물 전체의 교향악이다. 그러나 예배가 없는 곳에서는 끊어진 현과 불화만 있을 뿐이다. 구속받은 온 우주가 다시 모여서 온전히 한 목소리로 즐겁게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예배할 때 우리는 새로운 피조세계, 즉 새 하늘과 새 땅을 보게 될 것이다.

예배는 우리의 모든 것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무슨 말인가? 이것은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의 전 인격을 다 바쳐 예배하지 않으면 우리의 예배는 온전한 예배가 되지 못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모든 정성을 다해 최대한 온전한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내 존재의 어느 한 부분이라도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로 인하여 내 존재의 모든 부분이 서로 화합하지 못한다면, 나는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하는 것이 아니다.

신앙에서 마술적 힘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당신이 예수님의 이름을 수천 번 반복한다 할지라도, 당신이 예수님의 뜻에 따라 살지 않으면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일이다. 하나님을 예배 하면서 우리의 뜻대로 사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나님의 이름이 우리 안에서 강력하게 역사하려면 하나님의 뜻과 우리의 뜻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삿13:25)

만일 당신이 일주일의 7일간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일주일에 단 하루도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는 것이다. 주일예배 후에 월요일 예배, 화요일 예배, 수요일 예배 등으로 삶의 예배가 계속 이어지지 않는다면 주일예배도 의미가 없다.

반드시 ‘행위로’ 잘못을 범해야만 죄책감을 느껴 회개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잘못된 ‘생각만으로도’ 나는 하나님과의 교제, 그 분의 임재에 대한 느낌, 또한 영적 감각을 잃어버릴 수 있다. 당신의 생각이 하나님이 거하실 수 있는 성소가 되도록 하라. 삶의 어떤 부분에서도 그분의 영광을 해치지 않도록 노력하라. 한 발짝 내디딜 만한 작은 땅까지도 전부 거룩하게 하라. 모든 시간과 장소를 하나님께 넘겨드려라 그러면 당신은 그분을 올바르게 예배할 것이고, 그분은 그 예배를 받으실 것이다. 이렇게 되려면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

2장 우리는 예배드리기 위해 구원받았다

우리는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구원받았다. 그리스도께서 과거에 하신 모든 것, 그리고 지금하고 계신 모든 것은 바로 이 한 가지 목적을 위해서이다. 우리가 주장하는 대로 우리가 신자라면,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

하나님이 창조의 첫째 목적은 도덕적 존재를 영적으로, 또한 지적으로 준비시켜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도록 만드는데 있었다. 내 삶 속에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면 나는 온전히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예배를 드릴 수 없다. 오늘날 우리의 교회에는 부족한 것이 거의 없다. 그런데 문제는 가장 중요한 것이 빠져있다는 사실이다. 우리에게 없는 것은 우리 자신을 참되고 거룩하게 드리려는 결단과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아버지, 즉 하나님을 위한 예배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신자 개개인이 활력 넘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전심으로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을 거룩하고 아름답게 예배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우리가 전심으로 참 예배를 드린 후에야 비로소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올바른 순서이다. 예배를 지겨워하는 사람은 아직도 천국에 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이다.

교회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존재한다. 예배 이외의 다른 것들은 모두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혹은 다섯 번째의 일이다.

예배는 예배하는 자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인격적으로 만나는 체험이다. 참예배를 위해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성령님이 찾아오시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분이 찾아오셔서 예배의 영을 허락하셔야 우리가 참예배를 드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무엇보다도 예배자를 원하신다. 예수님이 우리를 구속하신 것은 우선 우리가 예배자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이지, 일꾼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예배를 사모하고 갈망하는 사람만이 훌륭한 일꾼이 될 수 있다.

예배는 감탄과 경외를 겸손히 기쁨으로 느끼고 그 느낌을 적절한 방법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예배에는‘신비’라는 요소가 있어야 한다. 만일 신비가 없다면 예배도 없다. 만일 하나님을 다 이해할 수 있다면 나는 그분을 예배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예배는 인간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본래 하나님은 인간을 예배자로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기 원하신다. 그리고 뜨거운 예배를 통해서 힘을 얻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열심히 일하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가 이 순서를 바꾸어서 먼저 일부터 하려고 드는 아마추어가 되기를 원치 않으신다. 하나님은 일꾼을 갖기보다 예배자를 갖기 원하신다. 우리는 그분이 길가에 서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와서 내 일을 위해 수고할까?”라고 고민하시리라고 착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도움이 전혀 없다고 해도 얼마든지 자신의 일을 이루실 분이시다. 하나님이 먼저 원하시는 것은 예배자이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모든 것이 있으나 예배가 없다. 기도회에 는 참석하지 않으면서, 단지 교회 운영위원회에 참여하여 교회의 예산을 얼마나 지출해야 할지 계산하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기도하지 않고 예배도 드리지 않는 사람들이 교회를 운영하고 이끌어 나간다는 것은 참으로 무서운 모순이다.

예배의 요소 중 한 가지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무한한 신뢰’이다. 오늘날 예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을 존중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더 이상 이사야 선지자처럼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사 6:1) 하나님을 보지 못한다.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본래의 하나님이 다른 모습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과거 신앙의 위인들처럼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무한한 신뢰가 없다. 신뢰가 없으면 존경심도 생기지 않는 법이다.

영성은 예배의 한 요소이다. 그러므로 영성이 없다면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를 드릴 수 없다.

둘째, 예배의 요소는 ‘진실성’이다. 진실성이라 함은 겉치레뿐인 형식이나 거짓된 가식이 아니라는 뜻이다.

셋째 예배의 요소는 ‘정직’이다. 모든 기도에는 정직이 내재해야 한다. 정직은 단순히 ‘점잖게 예의를 지키는 것’ 이상을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절대적으로 정직해야 한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이 부인할 수 없는 한 가지 사실은 그들이 성숙한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시대의 사람들이 전하는 복음이 영혼을 구원할지는 몰라도, 성숙한 예배자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2부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를 드려라

성령님이 함께하시지 않으면 참예배가 불가능하다. 우리가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참예배를 드리려면 우리 안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영이 활동하셔야 한다. 하나님은 성령 없는 예배를 받지 않으신다.

3장 하나님이 받지 않으시는 예배도 있다

하나님께서 모든 예배를 다 받으시는 것은 아니다. 교회에서는 아름다운 오르간 소리와 찬양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곧 참예배는 아니다. 참예배가 되려면 성령님과 진리가 있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예배 드리지만 그 중 하나님이 받지 않으시는 예배가 많다는 것은 참으로 비극적인 사실이다. 성령님이 함께하시지 않는 예배는 참예배가 아니다. 수백만의 교양 있는 크리스천들이 단지 교회의 전통에 따라 관습적으로 예배를 드리기 때문에 결코 하나님께 상달하지 못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나는 잠을 이루기 힘들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가인의 예배를 받지 않으셨는데, 그 이유는 그가 하나님과 타락한 인간들 사이에 속죄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인이 하나님께 드린 예배에는 세 가지 중대한 잘못이 있었다.

첫째, 가인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지 못했다. 다시 말해서, 그는 그분이 주권적이고 거룩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둘째, 가인은 그가 하나님과 참된 관계를 맺지 못했으면서도 그런 관계를 맺고 있다고 착각했다. 그는 그와 하나님 사이에 중재자가 없이도 그분이 자기를 받아들이실 것이라고 태평하게 믿었다. 그는 인간이 죄 때문에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나 있다는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셋째, 가인은 죄의 심각성을 모르고 그것을 아주 가볍게 여겼다. 이것은 가인뿐만 아니라 가인 이후 수많은 사람들의 문제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에 죄를 미워하신다. 죄 때문에 세상에는 고통과 슬픔이 가득하게 되었고, 무엇보다 인간은 인생 최고의 목적과 기쁨, 즉 하나님을 예배하는 기쁨을 잃어버렸다. 가인이 드리는 예배는 부적절하고 무의미한 예배였다.

예배 드리기 위한 모든 것들이 다 갖추어져 있는데도 한 가지 불길한 결핍요소를 들라면 바로 성령님의 능력이 함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경건의 모양은 충분하다. 그것은 사람들을 사로잡을 정도로 충분히 아름답고 웅장하다. 이런 것들이 어우러져서 예배자들의 마음을 한껏 사로잡는다. 그러나 종종 성령님의 초자연적인 감동이 없을 때가 있다. 목회자와 회중은 위로부터 내려오는 능력을 알지도 못하고 갈망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우리의 입술로 하나님을 예배하지만 삶으로는 그분을 예배하지 않는 일을 쉽게 저지르기도 한다. 그러나 단언하건대 당신의 삶이 예배하지 않는다면, 결국 당신의 입술도 예배하지 않는 것이다.

‘사마리아인의 예배’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이단적인 예배를 뜻한다. 이단적인 사람이라고 해서 진리를 전부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자기가 좋아하는 것들은 받아들이고 자기가 싫어하는 것들은 부인하는 편협한 사람이다. 삶의 각 부분을 둘로 나누어 한쪽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다른 한쪽은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는 것, 그것이야말로 이단적 예배, 즉 사마리아인의 예배이다.

‘자연예배’라는 것도 있다. 그것은 종교적 시이다. 그것은 장엄한 자연을 즐기며 명상하는 것이다. 자연 숭배자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해서‘자연을 통해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은 아주 많다. 그들은 눈과 귀가 아닌 마음을 미에 집중시킨다. 당신의 귀가 미에 집중할 경우 그것은 음악이 되고, 당신의 눈이 미에 집중한다면 그것은 미술이 된다. 그러나 음악이나 미술 없이 아름다운 생각을 한다면 그것은 시 이다.

어떤 사람들은 몰아의 경지를 예배라고 착각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종교음악을 예배로 착각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예배를 다 받으시는 것은 아니다. 종교적 체험이라고 해서 하나님이 전부 받으시는 것은 아니다. 참 예배가 되려면 성령님과 진리가 있어야 한다.

당신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예배를 드려서는 안 된다. “네가 원하는 방식대로 예배하라”라는 것은 마귀의 속임수이다.

성령님은 오직 예배하는 사람을 통해서 일하신다.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는 일하지 않으신다. 우리는 예배드리지 않고 단지 종교적 활동에 몰두하면서 우리 자신을 속일 수 있다.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은 곧 거룩한 봉사의 책무를 강하게 느껴서 봉사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하나님과의 교제는 곧 순종과 선행으로 이어지는 법이다. 일보다 예배가 앞서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순서이다. 이 순서를 뒤집어서는 안 된다.

4장 영혼의 눈으로 영광의 하나님을 바라보라

봉사, 일, 활동은 모두 선하기 때문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힘써야 할 것들이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들의 뿌리가 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내적 습관이다.

주위의 소음들이 당신의 마음에서 사라지고 하나님의 임재가 당신을 감싼다고 느낄 때까지 그곳에 조용히 앉아 있어라. 불쾌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말고, 그것을 듣지 않겠다고 결심하라. 내면에서 들리는 음성을 인식하는 법을 배울 때까지 그 음성에만 귀를 기울여라.

다른 사람들과 경쟁하지 말라. 하나님께 당신을 드려라.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지 간에 당신 자신이 되어라. 당신이 아닌 어떤 다른 존재가 되지 말라. 당신이 관심을 두 세가지 일에만 국한 시켜라. 순간순간 마음 속으로 기도하도록 스스로 훈련하라. 그러면 얼마 후 당신은 심지어 일을 하면서도 기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성공하려면 반드시 그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영적으로 성장하려면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수많은 일들을 뿌리치고 오직 하나님의 일에 집중해야 한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홀로 서는 일’과 ‘침묵의 열매’를 맺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방향으로 바뀌어가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볼 때 우리는 우리를 바라보고 계시는 하나님의 자애로운 눈길과 마주치게 된다. 성경은 하나님의 눈이 온 천하를 두루 살피신다고 증거한다. 하나님은“감찰하시는 하나님”(창 16:13)이시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은 마음의 문제이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다.

5장 하나님의 황홀한 임재는 체험하라

참그리스도인의 체험의 본질은 하나님을 정말로 만나는 것이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 이외의 다른 것들은 부수적이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없다면, 종교는 실재의 그림자이며, 다른 사람의 체험을 옮기는 싸구려 모방일 뿐이다. 하나님을 만나는 황홀한 체험을 하라.

오늘날 교회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다시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다시금 바라보아야 한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분이신지를 모른다.

오늘날 기독교가 보여주는 하나님은 사람들이 친구처럼 쉽게 어울릴 수 있는 나약한 싸구려 하나님이다. 그분은 ‘이웃집 아저씨’ 정도로 여겨진다. 그분은 당신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도와주고, 당신이 평안할 때는 당신을 그냥 내버려두는 분으로 여겨진다. 우리는 아브라함과 야곱의 하나님을 누구든지 언제나 쉽게 도움을 청할 수 있는 박제된 하나님으로 만들어 버렸다.

과거 영적 거인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깊이 체험하고 그 체험을 평생 기억하면서 살아갔다. 그들은 처음 하나님을 만났을 때에 그들은 모두 두려움에 사로잡혔을 것이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얼마 후 그 두려움은 즐거운 외경심으로 바뀌어 그 상태를 유지하다가, 결국 하나님께 가까이 있다는 경건한 감정으로 변화한다.

우리 믿음의 조상들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느낌이 너무나 황홀하다고 우리에게 증거했고, 우리도 이것을 체험적으로 알고 있다. 이런 체험적인 인식이 있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기독교를 공격해도 흔들리지 않는다.

자기에게 임재하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들은 불신자들이 반대에도 전혀 요동하지 않는다.

참 그리스도인의 체험의 본질은 하나님을 정말로 만나는 것이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 이외의 다른 것들은 부수적이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없다면 종교는 그 실재의 그림자이며 다른 사람의 체험을 옮기는 싸구려 모방일 뿐이다. 유년기부터 노년기까지 교회 안에서 살면서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영혼이 있어도 사랑하지 못하고 오직 신학과 논리가 합성해낸 신만을 안다면, 그것이야말로 크나큰 비극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의 임재의 현시, 즉 그분의 임재의 ‘나타남’은 그분의 임재와는 다르다. 임재의 현시 없이 임재가 있을 수 있다. 우리가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고 해도 하나님은 여기에 계실 수 있다. 한편 우리가 그분의 임재를 의식할 때에만 그분은 현시하신다. 우리 편에서 해야할 일은 하나님의 영에 순종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는 기독교 핵심 진리이다.

대체로 경건한 두려움, 경외심을 가져다 주는 하나님의 임재가 우리 가운데 없다는 것이 오늘날의 문제이다. 하나님을 향한 참 두려움은 아름답다. 왜냐하면 그것은 예배요 사랑이며 경외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느끼는 높은 수준의 행복감이며, 그분이 계시지 않으면 차라리 죽음을 택할 정도로 그분을 기뻐하는 일이다.

6장 불타오르는 열정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라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열정으로 불탈 때까지 그분을 묵상하고 그분과 교제해야 한다. 우리는 모세처럼 하나님의 빛을 받아 우리의 얼굴이 달아오를 때까지 그분과 교제해야 한다. 이런 열정이 없이 냉랭한 가슴으로 하나님을 받아들이기에는 그분은 너무나 뜨거운 분이시다.

하나님과의 교제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즐거운 일이다. 그분은 구속받은 사람들과 교제하시는데, 그 교제가 다른 어떤 것 때문에 방해 받지 않고 편안하게 이루어질 때, 우리의 영혼은 안식과 치유를 얻을 수 있다.

성령님의 일차적인 사역은 잃어버린 영혼을 중생의 씻음을 통해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 가운데로 회복시키는 일이다. 이 일을 달성하기 위해서 그분은 회개하는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계시하신다(고전 12:3 참조). 우리는 그리스도를 알 수 있는 것은 성령님이 그런 능력을 주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령님이 허락하시는 만큼만 그리스도를 소유할 수 있다.

하나님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더 이상 격식이나 인위적인 자극이 필요 없을 정도로 서로 편안해지기 전까지는 만족하시는 법이 없다. 하나님의 참친구는 그분의 면전에서 오랜 시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앉아 있을 수 있다. 완전한 신뢰가 있다면 상대방을 안심시키기 위한 말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하나님을 사모하고 존경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분 앞에서 말없이 평안하게 앉아 있을 수 있다.

7장 하나님의 능력을 간절히 사모하라

아브라함, 다윗, 바울과 우리의 큰 차이점은 그들이 하나님을 찾고 발견하고, 찾고 발견하고, 찾고 발견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간절히 찾았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가? 우리는 주님을 영접하고 난 뒤에는 그분을 다시 찾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보라. 그러면 하나님의 친구들이 하나님을 얼마나 사모하고 갈망했는지 알 것이다. 아브라함, 다윗, 바울과 우리의 큰 차이점은 그들이 하나님을 찾고 발견하고, 찾고 발견하고, 찾고 발견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끊임없이 간절히 찾았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가? 우리는 주님을 영접하고 난 뒤에는 그분을 다시 찾지 않는다. 다른 것들을 제쳐두고 오직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만을 추구하라.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능력, 즉 ‘하나님에 대한 수용성’에는 어떤 한 가지 요소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영적 수용성’이란 영혼 안에서 몇 가지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섞인 능력이다. 즉 하나님에 대한 수용성이 있다는 것은 그분을 좋아하고, 그분에게 기울어지고, 그분에게 긍정적으로 반응하고, 그분을 소유하고 싶어한다는 말이다.

다른 것들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고 오직 영적인 것만 추구할 만큼 영적 갈망이 크지만 때때로 그 갈망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사람이 생겨난다. 이런 사람은 교회에서 늘 기도 모임을 인도하는 사람들의 관습적이고 냉랭한 기도에 만족하지 못한다.

8장 모든 것을 다 바쳐 하나님을 숭모하라

하나님에게 매료된다는 것은 그분을 숭모하는 것, 즉 그분을 우러러 사모하는 것을 포함하는 일이다. 하나님을 숭모하는 것은 우리의 모든 것을 바쳐서 그분을 사랑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분을 숭모할 때 우리는 두려움과 경이감과 열망과 경외심을 가지고 그분을 사랑하게 된다.

감탄의 단계에 올라서지 못하는 예배는 기초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기도는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가 닿도록 고양시키는 일이다. 이렇게 하나님을 드높이는 일이야말로 찬양하고 기도하고 예배하기 위한 우리의 필요조건이다.

집회에서 부르는 많은 곡에서도 성령님의 감화보다는 낭만적인 분위기가 더욱더 지배적이다. 그런 노래의 곡이나 가사는 욕망을 자극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우리가 누리는 축복의 정도는 그분이 우리를 얼마나 완전하게 다스려주시는 가에 정확히 비례한다.

다른 무엇보다도 우리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모시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렇게 될 때 그분에게 감탄하고 그분을 경외하면서 보내는 시간이 가장 훌륭한 시간이 될 것이다.

우리 세대는 예배 중에 성스러움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교회에서 양육된 많은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을 경외해야 한다는 생각이 없다.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믿지 않기 때문이다.

9장 참된 예배의 부흥을 주시는 성령을 간구하라

성령님이 사람들에게 임하셔서 그들의 시선이 그들 자신에게서 하나님의 아들에게 바뀌도록 만들어주시는 것이 부흥이다. 하나님의 영이 새롭고 힘차게 활동하셔서 부흥이 일어날 때 예배의 열기가 고조된다.

현대의 과학자는 하나님 세계의 경이로운 것들을 쫓다가 하나님을 놓쳐 버렸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경이로운 말씀을 쫓다가 하나님을 잃어버릴 위험에 처해 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찾아오시고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을 공간적인 개념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분과 우리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물리적인 거리 개념이 동원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거리의 문제가 아니라 경험의 문제이다.

10장 나를 찬양하지 말고 하나님을 찬양하라

나는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너무 많이 말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노래하는 찬송가를 부르지 않고, 우리 자신에 대해 말하는 복음성가를 부르기 시작했을 때 우리의 찬양은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찬송가를 부르거나 가사를 음미하는 것은, 은사를 부여 받은 위대한 신앙인이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는 가운데 하나님께 드리는 아름다운 예배에 동참하는 일이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이 왜 자기가 그토록 사랑하는 지 그 설명을 듣는 일이다(A.W. Tozer, 2009:120).

제3부 사이비 예배를 중단하라

‘종교적 쇼’에는 악취가 난다. 종교적 쇼의 진행자들이 성소로 들어갈 때 그들은 여호와께 이상한 불을 드리는 위험스러운 짓을 하는 것이다. 최악의 경우 종교적 쇼는 신성모독이 될 수 있다. 아무리 좋게 봐주어도 그것은 기도와 성령님의 감동을 대신하려는 가련한 시도에 불과하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육신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애쓰는 것이다.

11장 쇼비즈니스 연예오락이 예배를 타락시키고 있다

종교적 연예오락이 그리스도의 교회를 너무나 타락시켰기 때문에, 수백만의 사람들은 그것이 이단이라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다. 전 세계 수백만의 복음주의자들은 종교적 연예오락에 몰두해있다. 그들은 연예오락이 묵주를 새는 것만큼 이단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우리 시대 사람들은 모든 것이 극적이어야 만족한다. 만일 하나님이 극적인 것을 만들어내지 않으시면 우리는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조차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생각대로 역할을 담당하시기를 원한다.

현대 복음주의자들의 실패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과거의 성도들이 소중히 여겼던 하나님과의 관계와 경건의 훈련이 그들에게 없기 때문이다. 현대 크리스천들이 보기에 그런 것들은 너무 진부하고 너무 느리다. 그들은 화려한 매력과 빠른 극적 활동을 원한다.

기독교가 매우 대중적인 종교인데도 우리는 거의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왜 그런가? 우리에게 죄에 대한 깨달음과 회개와 경건한 슬픔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당신에게도 나에게도 우리 모두에게도 십자가가 있다. 이 십자가는 개인적이고 내적이며 체험으로 알 수 있는 것이다. 십자가는 자발적으로 지는 것이다. 십자가를 지는 일은 힘들고 쓰라리고 아프다. 그러나 십자가를 지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그로 말미암아 생기는 고통을 참으며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속해있는 복음주의 진영의 사람들조차 ““십자가는 예수님이 지셨으니 우리는 이제부터 즐겁고 행복하게 살면된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갈보리 언덕 위에 서있는 십자가는 우리 마음 속의 십자가가 되어야 한다.

참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교회는 연예오락으로 즐거움을 얻으려고 애쓰는 법이다. 교회가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이끌지 못하는 사람은 연예오락이라도 제공하려고 애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복음주의 교회는 ‘종교적 연예오락’이라는 큰 이단에 빠져있는 것이다.

복음주의적 교회에서는 교인들에게(특히 젊은이들에게) 진지한 교육 프로그램은 최대한 적게 제공하고 연예오락을 최대한 많이 공급하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오직 하나님만으로 기뻐하며 그분을 사모하는 모임으로 사람들을 인도하는 일은 이제 거의 불가능해졌다.

12장 그리스도를 배반하고 인기를 숭배하는 작태를 그쳐라

문제는 자신들이 그리스도바다 인기를 더 사랑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아이들, 사업상 거래처 사람들, 직장 동료들, 친목회 친구들의 호감을 읽기를 원하지 않는다. 이렇게 그들은 친구들을 잃지 않으려고, 적을 만들지 않으려고 그리스도를 배신한다.

복음주의 진영의 지도자들이 자기를 부인하는 겸손한 사람이 아닌 오늘날의 종교 스타이기를 계속 고집한다면, 복음주의 운동은 신약의 교회 모습에서 점점 더 멀어질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기독교를 용인하도록 애쓰는 우리의 노력은 딱할 정도이다. 어떤 사람은 십자가의 못과 가시 면류관, 피와 고통과 버림받음의 본질적인 의미를 거부하고 그것을 단지 상징으로만 해석한다. 현대 기독교인들은 세상 사람들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들이 세상 사람들과 너무나 편하게 잘 지내고 있기 때문이다. 십자가에 달린 분을 따른다고 주장하는 사람들과 십자가에 달린 분을 믿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 너무나 원활한 협조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 시대는 기독교가 복잡해진 시대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찾을 수 있는 단순성이 우리 가운데서 좀처럼 발견되지 않는다. 오히려 다양한 프로그램, 방법, 조직화, 부산한 활동만 넘쳐난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시간과 에너지만 소모할 뿐 우리 마음의 깊은 소원을 충족시키지는 못한다. 깊이 없는 내적 체험, 공허한 예배, 부끄럽게도 세상의 방법을 모방하여 일을 성공시키려는 굴욕적인 태도, 이런 점들을 볼 때 우리가 하나님을 불완전하게 알고 하나님의 평안을 거이 알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13장 껍데기 예배는 가라

하나님은 언제나 사람들이 내실이 있기를 원하시지만 그들은 언제나 얄팍한 껍데기만을 추구한다. 교회 문제의 본질은 예배가 형식주의로 흐른다는 것이다. 이것이 현재 교회가 처한 가장 큰 문제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을 진정으로 갈망하는 신자들이 거의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이 땅을 편하게 느끼는 기독교인들이 이 세상을 그다지 떠나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천국의 소망을 죽는 날에 대비하는 보험 정도로 간직하지는 않는가? 우리의 육신적 본능은 “내가 지금 이렇게 건강하고 편한데, 굳이 안락한 현재를 버리고 내가 잘 모르는 내세에 소망을 둘 필요가 있는가? 라고 말한다. 현재 기독교는 이 땅에서 아주 재미있는 것이 되어버렸다.

오늘날 교회는 천국과 지옥을 섞어서 적당히 타협시킨 메시지를 전한다. 어떤 목회자들은 이것이 사람들과 잘 지낼 수 있는 방법이며 교회 이미지 제고에 도움이 된다고 믿는다.

어떤 해외 선교지에서는 소위 ‘쌀 크리스천’(rice Christian)이라는 말이 생겨나기도 했다. 그러니까 “쌀만 주면 믿겠다”라고 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물질적 이익을 위해서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최근의 종교적 부흥의 특징은 과거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대제(280-337, 기독교를 공인한 황제) 때에 일어났던 혼란스러운 부흥과 비슷하다. 그때와 마찬가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