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5. 18

2007.11.03 11:53

김성찬 조회 수:1219 추천:63



  5. 18
  

  오만과 편견의 시대에

  지난 9개월간이나 미국을 뒤흔들어 놓았던  O J 심슨에 대한 ‘세기의 심판’은 무죄 평결로 끝을 맺었습니다. 즉시, 심슨은 그 지지자들의 환호를 받으며 석방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세기의 심판은 온 지구촌 가족들에게 미국의 치부(恥部), 그 모든 것(예를 들면 인종 문제, 섹스, 폭력 그리고 언론의 사생활 선정 보도등)을 다 드러내 보였을 뿐 만 아니라, 흑인 지배적인 배심에 의해 무죄 평결이 난 것에 대해 ‘과연 정의가 이긴 것인가’라는 강한 의문을 갖게 한 사건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동안 이 사건의 발단과 마무리 그 전 과정을 통해 한가지 놓칠 수 없는 신비한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우리에겐 익숙치 않은, 결코 기억에 없던 희귀한 사실을 말입니다. 제가 이 세기의 심판에 무관심해 할 수 없었던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이 사건이 모든 미국적 치부를 다 드러내 보였다고 부끄러워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일관 되이 흐르던 고귀한 백옥 같은 진실 그것은 ‘편견(偏見)이 유죄(有罪)’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이 심판에 ‘편견(偏見)’이 자리 잡지 못하도록 부단한 노력을 경주하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배심원 선정 기준과 그 과정의 순결성, 행여 배심원들이 유죄라는 ‘편견’을 가질까 봐 심슨이 신사복을 입고 법정에 앉도록 배려한 것 그리고 이번 사건을 무죄 평결로 이르게 한 결정적인 이유가, 사건 현장에서 문제의 피묻은 장갑을 발견했다는 당시 로스앤젤레스 경찰청 형사 마크 퍼먼이, 흑인을 증오하는 인종차별주의자임을 입증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라는 사실 등이 바로 그런 사실을 뒷받침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신비(神秘)였습니다. 감추어진 것, 이 땅에서는 드러나지 않았던 것이었기에 신비였던 것입니다. 편견(偏見), 그것은 그  어떤 것으로도 정당화할 수 없는 악한 것임을 극명하게 나타내 보여 준 것입니다.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그 누구도 편견의 희생물이 되서는 안된다는 신앙고백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편파 수사. 그 동안 이런 용어에만 익숙해 온 우리는, 불행하게도 수사란 의례히 편파 수사라는 등식에 너무도 철저히 길들여져 온 것입니다.

  ‘5. 18’ - 그 무고한 양민들을 누가, 어떻게, 왜 죽였는가?라는 사실 규명보다, 거기 죽어 내동댕이쳐진 인간들이 어느 동네 사람이냐에 따라 입장을 달리하는 이 땅의 무섭고 치사한 편견(偏見)이, 차츰 그 부끄러운 허물을 벗어 가는 이 작은 용기의 시대에도, 여전히 우리의 검찰은 사사건건 그 중립성에 의심을 받더니만, 그 명백한 신 군부의 국헌문란행위인 ‘5.18’ 고소 고발 사건을 ‘공소권 없음’이라는 납득할 수 없는 논리로 불기소 처분을 하고만 것입니다. 일단 쿠데타에 성공하면 헌법 파괴의 중대한 범죄조차 그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나쁜 선례는 남긴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권력의 시녀들인 검찰이, 이 서슬 퍼런 역사적 진실 앞에서도 그런  편파적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는 그 배후에는, ‘성공한 쿠데타는 무죄’라느니, ‘역사는 승리자만 기억한다’느니, ‘광주 사태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등의 희한한 역사관(?)을 지닌 자들의 ‘오만’(傲慢)이 뒷받침되고 있음을 삼척동자도 부인하지 않을 것입니다. 시편 기자의 지적대로 죄인의 길(5共), 악인의 꾀(6共) 그리고 오만(傲慢)한 자의 자리, 이렇게 이어지는 이 정권의 태생적(胎生的) 한계가 낳은 산물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학살 책임자들을 비호하고 나서는 것입니다. ‘노씨 망언 규탄 확산’ 우리는 이런 표제를 대하고 있습니다. 단죄(斷罪)의 대상 자가 거침없이 내뱉는 망언(妄言)은 무지의 소치가 아니라, 그들의 오만 방자한 태도에서 나온 것임을 부인할 자가 없을 것입니다. 단단히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면죄부를 준 자들의 오만, 그 제왕의 논리와 일맥 상통한 것입니다.

  오만(傲慢), 그 대표적인 사건인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성소(聖所) 유린(蹂躪) 사건은 이 정권의 심리 기제, 그 끝간데 없는 ‘오만(傲慢) - 그 승리 이데올로기’를 극명하게 드러내 보여 준 불행한 사건이었습니다.  

  브루지만(Brueggemann)은 “사무엘상 21장 1-6절에 다윗이 놉(Nob)의 신전에서 거룩하다고 거짓말을 하여 신에게 바치는 빵을 먹은 것은 성(聖)과 속(俗)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며, 또 사무엘하 12장 16-23절에 다윗의 아들이 죽은 다음 그가 금식하는 대신 음식을 취한 것은 삶과 죽음에 대한 다윗의 새로운 견해를 보여 주는 것이며, 여기서 다윗과 같은 사고방식이 결국은 인간 행동과 그 운명에 대한 책임성의 신학(theology of responsibility)을 낳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책임성의 신학, 책임성의 정치. 권리에는 의무가 따르고,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하게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권리가 더 증진되고, 자유가 보다 더 많아 질 수록 우리는 자신의 행동과 결단에 대한 보다 더 큰 의무와 책임이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정신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에게만은 스스로 면죄부를 씌우는 제왕의 논리는 시대 착오적인 것이 아니고 그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패망의 선봉이며, 지름길인 것입니다. 주어진 권한만큼 겸허하게 역사적 진실을 바라보는 지혜가 요구되고 있는 것입니다. 돌감람나무를 참감람나무 되게 하는 뼈를 깎는 노력과 신앙고백이 무엇보다 더 필요한 비상한 시기가 바로 이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승리자는 역사에서의 심판을 인정하는 자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 망월동 묘지에 묻힌 그들은 땅속에는 묻혀 있을는지 모르나 그들은 결코 역사 속에 묻혀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죽은 자를 역사는 망각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말 죽은 자는 역사의 이름으로 망각된 자들일 것입니다. 진정한 승리자는 역사가 기억해 줄 결단을 바로 ‘오늘’ 행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슬쩍 책임을 회피하려고 ‘내일’ 역사에 맡기자는 식으로 얼버무리고 마는 구차한 대답 같은 것으로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것입니다. 죽은 자들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오늘’ 이 사회가 감당할 때 우리는 이 비상한 시대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후세대들이 이 부담스런 유산 때문에 더 이상 고통을 당하지 않도록 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역사의 악몽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구동독 출신 극작가 하이너 뮐러(Heiner Muller)는 “역사의 악몽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먼저 역사의 실존을 인정해야 한다. 역사를 알아야 한다. --(중략)-- 우리는 먼저 역사를 분석해야 한다. 그런 다음 우리는 그것을 고발할 수 있고 그것에서 벗어 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역사의 악몽에서 벗어 날 이 시대의 최소한의 노력은 진상을 규명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검찰과 현정권은 오히려 학살 책임자를 비호하고, 5.18학살의 진상 규명을 역사의 심판에 맡기자는 식으로 회피하면서 불기소 처분이라는 면죄부를 주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5.18 진상 규명과 관련자 처벌을 위한 ‘5.18특별법 제정’과 ‘특별 검사제 도입’을 위한 그들의 결단이 촉구되고 있는 것입니다. 온 국민의 이름으로 말입니다.

  이 비극적 사건에 대한 기독교적 통찰

  우리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역사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이 역사를 하나님의 역사로 고백합니다. 역사적 종교로서의 그리스도교가 갖는 이런 역사적 특성 때문에 그리스도교는 전교회사를 통해서 역사적 사건이 갖는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여 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비극적 사건에 대한 기독교적 통찰을 또 다시 역사로부터 요청 받고 있으며 또한 응답해야 할 막중한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그 하나, 이 비극적 사건에 대한 기독교적 통찰 그것은, 이 시대의 문제란 능력(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방향(方向)에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뒤돌아 보건대, 우리는 역사 앞에서 정직하지도 못했고 용기도 없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첨 잘하는 인간의 본성 앞에 굴복하고 만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부당한 여론을 형성하는 일에 일조한 엉터리 선지자와 같은 자들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모든 것이 잘 되어 가며 평화롭게 될 것이라고 백성들에게 말하며, 사악한 것을 선한 것이라고 선한 것은 사악한 것이라고 부르며, 백성들이 즐겨 듣는 안이한 이론들을 제공하는 엉터리 선지자 말입니다. 아첨하는 인간의 본성에 능한 자들이 관직을 얻듯, 교회조차도 아첨하는 교회로 전락해 버린 것이 아니었나 생각해 봅니다. 
   
  우리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신앙고백은 또 어떠합니까?  너무 한쪽으로만 치우쳐 있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세례 요한의 자리는 광야였습니다. 오늘로 말하자면 기도원이나 수도원 또는 교회당 안으로만 국한된 자리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의 하나님 나라는 역사적 현장성을 지닌 구체적인 것이어야 했습니다. 요한의 광야, 그의 금욕적인 생활 방식은 오실 메시야에 대한 것이였으므로 그에게 있어서의 하나님 나라는 현재성이 아닌 미래성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오실 자 바로 그분이었으며(막 11:9),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를 통해 구체적인 현재의 사실로 선포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에게 있어서 광야란 하나님과의 교제의 장소인 동시에 사탄으로 부터 유혹을 받는 홀로 있는 장소일 뿐입니다. 그래서 그의 공생애는 정치적, 사회적으로 소외 받는 사람들의 현장인 고향 갈릴리의 나사렛에서부터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그해 ’80년 그분은 우리의 국군에 의해 학살당하던 빛고을, 광주(光州)로 향하여 가고 계셨을 것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능력(힘)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방향(方向)에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는 능력이 충만합니다. 매우 풍요롭습니다. 매우 호화롭습니다. 그런데 향방 없는 달음질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불타는 로마를 등지고 허둥대며 달음질해 대던 베드로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은 ‘쿼바디스 도미네,’ 불타는 로마로 향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둘째로, 이 비극적 사건에 대한 기독교적 통찰 그것은 ‘역사에 있어서의 심판’에 관한 것입니다.

  H. 버터필드는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좌절과 역경 그리고 삶의 고통들이란 그가 지은 죄악에 대한 심판이거나, 혹은 영혼을 위한 단련이거나, 성격에 관한 시험이거나 혹은 이 모든 것이 종합일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들 삶의 미세한 부분까지 역사 하시거나 아주 개인적인 일에 있어서도 인간의 일에 관여하신다면, 그는 어쨌든 역사에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우리는 넓은 화폭 위에 심판의 전형을 투영시킬 수밖에 없고 역사의 구조 속에는 심판이 내재되어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말합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유대 백성들에게 그들이 그토록 열렬히 기다려 온 “주님의 날”이란 그들이 기대 했던 대로 승리와 환호의 날이 아니라, 어둡고 무서운 심판의 날이라고 경고했던 것입니다.  역사에는 심판이 있음을 분명히 기억하십시요. 심는 데로 거두는 법칙을 결코 망각하지 마십시요.  버터필드는 “자신이 신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의 역사에 정면으로 도전하며, 그들의 힘이 그들에게 승리를 가져다준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무거운 역사의 심판이 가해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마지막 심판은 물론이고, 지금 역사 영역 내에서 발생하는 잠정적인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머지 않은 장래에 우리의 설교 속에서 이 사건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발견해 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셋째로, 이 비극적 사건에 대한 기독교적 통찰 그것은 참된 회개에 있습니다.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이 정하신 바라(롬13:1b)”라는 귀절만을 똑 떼 내어, 학살 책임자들을 칭송해 대며, 무고한 양민들을 악마로 몰아 세운 그 역사적(?) 조찬 기도회 참석자인 소위 기독교계 지도자들은, 그 본문 말씀이 국가 권력이나 법에 대한 순복 자세는 무비판적 야합이나 굴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 법에 합당하게 행하지 않는 불의한 권력에 대해서는 도리어 비판과 개혁을 추진해야 한다는 뜻임을 알지 못하고 있었던가, 아니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는가 묻고 싶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때때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보호를 보류하시고 사건들이 제멋대로 진행되도록 내버려 두시기도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들에게서 나의 얼굴을 거두고 그들의 결말이 어떻게 될지 두고 보리라.”  “주께서 어찌하여 얼굴을 가리우시고 나를 주의 대적으로 여기시나이까(욥13:24)”  그래서 하나님의 가공할 만한 방임으로부터 무서운 형벌이 내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 기억조차 하기 싫은 그 비극은 이런 하나님의 형벌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이제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가공할 만한 방임이 더 이상 지속되지 않는 참된 회개에 이르도록 힘써야 할 중요한 시점에 서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파괴를 멈추지 않으시면 모든 것이 다 파괴될 것이라고 두려워하며 그 자비를 구했던 에스겔처럼 우리도 그분의 내버려두시는 형벌만은 피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란 무엇입니까? 무자비한 폭력과 양민 학살로 정권을 잡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닐 것입니다. 마치 무고한 살인이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처럼, 한 밤중에 남의 가정집에 침입해서 죄없는 사람들을 까닭 없이 죽이고 유린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듯 말입니다. “네 놈들은 죽어도 싸!”라는 식의 까닭 모를 증오심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간교한 사탄의 짓인 것입니다. 진정한 하나님이 뜻은 그런 사건 이후에, 상처받은 인생들을 싸매어 주시고 위로해 주시는 것입니다. 보수하고 보복해 주시는 것입니다. “겁내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는 굳세게 하라 두려워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수하시며 보복하여 주실 것이라 그가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 하라(사35:4)” “그들의 행위대로 갚으시되 그 대적에게 분노하시며 그 원수에게 보응하시며 섬들에게 보복하실 것이라(사59:18)”  

  우리는 이제라도 용기 있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진리 앞에 바로 서는 용기 말입니다. 참회하는 용기 말입니다.  후회란 아무리 빨리 해도 늦은 것이지만, 회개는 아무리 늦어도 빠른 것입니다. 우리 성결교회의 신앙고백 가운데 행여 그 -종교적으로 착색된 브로조와지 이데올로기의 변형,  정치적 영역에의 보수적 영향력 행사를 강조한 이미지 속에 감추인 무비판적 야합이나 굴종은 없었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마지막 시점(기회)인지도 모릅니다. 진리의 보편성처럼, 오늘 광주의 문제는 이 땅 모든 지역의 문제로 번져 가고 있습니다. 동족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받아들이는 마음들이 확산되어 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도 이 창조적 전망을 확대시켜 나아갑시다. 영원과 직접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은 먼 미래가 아니라 항상 “지금”(Now)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