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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노덴’(ανωθεν) - 위에서(from above) 내리는 신생(新生)

2007.11.03 12:01

김성찬 조회 수:1475 추천:47

  ‘아노덴’(ανωθεν) - 위에서(from above) 내리는 신생(新生)


  이 영화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포세이돈 어드벤쳐’(The Poseidon Adventure;폴 갈리코 원작 ).
  희랍 신화에 나오는 바다와 폭풍과 지진등 자연재해를 관장하는 신(神) - 포세이돈(Poseidon)의 이름을 딴 포세이돈호의 마지막 항해를 그린 영화를 말입니다. 나폴레옹이 유럽을 정복할 때 사용했던 군대의 힘보다 더한 마력(馬力)을 지닌 초호화 여객선 포세이돈(Poseidon)이 섣달 그믐 한밤중 거대한 해저 지진에 전복 되면서 시작 되는 이 영화는 300여 승객과 승무원들의 처참한 생존 투쟁을 극적으로 영상화 시키고 있습니다.
  생존자 단 여섯명. 소리 없이 밀려드는 물살의 공포와 위용. 아비규환. 특히나, 필사적인 생존 투쟁 끝에 발견한 최종 관문을 눈 앞에 두고, 돌연 쏟아져 나오는 뜨거운 증기를 차단하고자, 그 분사구(噴射口) 벨브에 뛰어 올라 힘겹게 매달린 채 벨브를 제어(制馭)하면서 절규하던 스콧(Scott)목사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우리 힘으로 했습니다. 당신(하나님)의 도움 없이 말입니다. 등만 돌리지 마십시요. 우리를 내버려 두십시요.”  그러다 기진하여 뜨거운 기름물 탱크로 떨어져 내려 희생제물이 되던, 불꽃 같은 정열의 화신(化身) 스콧(Scott)목사의 행동하는 양심에 찬사를 보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 우리가 간과할 수 없는 한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나는 이 영화가 어떤 신학적 영감을 우리에게 생생하게 보여 주었다고 생각 해 봅니다. 이런 것입니다. 뒤집혀진 배. 이는 어떤 구원이 절실히 요청되는 위기에 처한  이 세상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땅의 구원은 진정 어디에서 오는가” 묻고 있습니다.
  “내 방식대로 하나님을 찾는 자유를 만끽하게 되었다”며 아프리카로 추방 당한 것을 오히려 즐기던 반항아 스콧(Scott)목사는 이렇게 설교 합니다.  “여러분 안에 있는 하나님께 기도 하십시요. 내 안의 하나님께. 하나님은 노력하는 자를 사랑 하십니다. 하나님은 바쁘신 분입니다.그러므로 하나님과 인간을 개인적으로 연결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는 초월적인 하나님을 부인하고, 인간 자신 안에 잠재해 있다고 굳게 믿는 신적 능력을 깨워 일으키라고 말합니다. 인간이 잠자는 신(神)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극적인 인간 승리를 원했는지도 모릅니다. 그에 의하면 구원은 그의 손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의 능력은 거기 ‘사람 안에’, ‘내 안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 비밀은 생존을 위한 몸부림을 계속하던 그들의 입을 통해 고백 되었던 것입니다.
  “삶이 저 위에 있어요. 위만 봐요, 위만!”
  “오 하나님!  밖에 누가 있어!  위에, 정말 누가 있어!!”
   마지막 천정을 뚫고 들어 오던 구원의 빛이 우리에게 “신생(新生)은, 구원(救援)은 어디서 오는가’를 분명히 암시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신생(新生)은 결코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밖’에서 온 것입니다. ‘위에서’ 온 것 입니다.

 
 랍비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어둠 속에 한줄기 빛을 찾아 예수께 나아온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단 70명으로 구성된 최고의 법정 - 산헤드린의 회원이었고,당시 훌륭한 종교생활을 하고 있던 6000여명 밖에 되지 않던 바리새인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요한복음3장 1절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유대인의 관원이라.”  그는 니고데모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너희는 스스로 삼가서 안식일에 짐을 지고 예루살렘 문으로 들어오지 말며”(렘17:21-24)라는 말씀을 지키기 위해,  안식일에는 한개의 마른 무화과 열매만한 무게의 음식물, 한모금의 우유, 상처 하나에 찍어 바를 분량의 꿀, 작은 몸에 바를 정도의 기름, 눈에 바르는 고약을 적실만한 물등도 짐으로 여길 만큼 엄격한 종교생활을 영위한 사람이었습니다. 율법주의자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종교는 엄밀히 말해 인간 행위에 기초한 종교였던 것입니다.그래서 그는 영혼이 굶주렸던 것입니다.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요3:2) 니고데모의 은밀한 고백은 그의 갈한 영혼의 호소였던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 있던 니고데모에게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아노덴’(ανωθεν))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3:3)  그러나 니고데모는 이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이해 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매우 현세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하나님 나라는 정치적이고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어야만 했습니다. 인간 행위의 산물이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되물었던 것입니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번째 모태에 들어 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요3:4)


  ‘아노덴’(ανωθεν) - 위에서(from above) 내리는 신생(新生)

  거듭(‘아노덴’(ανωθεν))은 위에서 부터(from above)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거듭남은, 신생(新生)은 ‘아노덴’(ανωθεν) - 위에서 부터(from above)오는 것입니다. 위에서 부터 오는 것만이 생명인 것입니다. 신생(新生)은 아래서, 여인의 뱃속에서, 내 안에서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아래서 위로 올라 가는 것은 죽음이나, 위에서 내리는 것은 생명이라고 말입니다. 창세기 11장 바벨탑 사건은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것은 죽음이자 파괴라고 말해 주고 있습니다.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창11:4). 하늘에 닿아, 이름을 내고자 했던  인간의 헛된 욕망이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반면에  사도행전 2장의 성령강림사건은 신생(新生)은 위에서 부터 오는 것임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온 집에 가득하며”(행2:2). 인간 행위에 의한 구원이 절망하던 그 땅에 위로부터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히 내린 사건은 새생명을 우리에게 값없이 선물한 것입니다.

 
 두개의 종교

  그래서 엄밀히 말하자면 이 세상에는 두개의 종교만이 존재합니다. 하나는, 아래서 올라가는 종교입니다.  인간 행위에 기초한 종교(이것은 여러 형태를 지니고 나타나지만)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위에서 내려 오는 종교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하나님의 행위에 기초한 종교 즉 은혜의 종교입니다.

  먼저,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바벨탑의 종교는 수 많은 형태로 역사상에 등장했다 사라지고 다시 등장하는 부침(浮沈)을 거듭 하고 있습니다. 인간 행위에 기초한 종교는 한결 같이 이렇게 말합니다. “네 자신에게 무릎을 꿇어라. 너 자신을 경배하고  예배하라. 신은 너 자신처럼 네 안에 거한다.” 이러한 주장들은 “아트만이 브라만이다”(Atman is Brahman)(개별적인 자아가 우주적 자아이다)라고 주장하는 힌두교 같은 동양사상에서 왔든지, 또는 “위에 것과 아래 것이 같다”(신과 인간은 하나이다)는 비술주의에서 왔든지, 아니면 인간 안에 내재(內在)한 모든 지식, 능력, 진리의 자아실현을 말하는 심리학자들에게서 왔든지 간에, 이들은 “네(인간)가 곧 신(神)이다”라는 범신론적 기치를 높이 세우는 것입니다.(더글라스 그루두이스) 그래서 그들은 모든 문제도 인간 안에 있지만, 모든 문제의 해답도 인간 안에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에 의한 이 땅의 구원이 가능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모든 선한 것이 인간 안에 있기 때문에 미래에 대한 희망은 집단적인 인류의 잠재력의 실현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위에서 내려 오는 성육신(成肉身-Incarnation)의 비밀은 간직한 우리 기독교(하나님의 행위에 기초한 은혜의 종교)는, ‘모든 문제(뒤집혀진 세상의 절망)는 인간안에 있으나, 그 해답(구원)은 인간 안에 있지 않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육에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요3:6).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롬7:18). 인간 육체 안에 선한 것이 없슴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 안에 있는 것으로는 그 어떤 선함도 이룰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 하십니다. “ 또 가라사대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살인과  탐욕과  속임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이 모든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막7:20-23).  그래서 여기에 선(善)이 있다. 저기에 선(善)이 있다 떠들어 대지만 이 땅에 지선(至善)한 것은 본디 없습니다. 진정한 샬롬(shalom)을 안겨 주는 그 어떤 공간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물리적 강제력을 동원한 꿈의 도시는 바벨이요,소돔일 뿐 입니다. 그래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임하신 성육신의 비밀 속에만 그 해답이 있는 것입니다.


  모든 좋은 것은 위로부터

  그렇습니다. 모든 좋은 것은 위에서 옵니다.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 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1:17).  그렇습니다. 모든 좋은 것은 위에서 부터 내리는 것입니다. 변함도, 어두움도 없으신 빛들의 아버지께로 부터 오는 것입니다. 평안이,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않은 평안이(요14:27) 거기에 있습니다. 영생이,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요11:26)이 거기에 있습니다. 눈물도 없고, 애통도 없는 새하늘과 새땅, 별리의 슬픔도, 질병의 아픔도 없는 신천신지(新天新地), 그 죽음 없는 안식의 처소(계21:4)가 거기에 있습니다.  “위 엣 것을 사모하십시요”(골3:1).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약3:17). 영생이, 참 지혜가 거기에 있습니다.

  3월!
  신생(新生)의 계절입니다. 이 신생(新生)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계절의 순환을 통해 자신의 뜻을 알리시는 그분의 깊으신 뜻을 헤아려 봅시다. 방초 봄.  생명의 대합창이 온 천지에서 울려 나옵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시19:1). 그래서 나는 이 계절의 신생(新生)의 비밀을 이렇게 노래해 봅니다.

        물인가, 불인가
        팔할(八割)의 바람인가
        우지끈 부서지는 겨울 숲
        새 움 트는 빈가지의 탄성은

        랍비여
        두번째 모태(母胎)의 탄생이오니까
        ...아노덴
        자궁의 신비로는 헤아릴 길 없는
        ...위로부터 남

        목재(木材)된 주검 위에 아니 내리고
        타고 남은 재 위에도 임하지 않는

        빈가지
        죽은듯 살아 숨쉬는 생명의 첨탑(尖塔)
        서있는 나무
        서 있는 사람
        직립(直立)한 영혼(靈魂) 그 정수리에만 임하는
        생명 위에 내리는 생명(生命)

        아노덴
        신생(新生)이여
        은총이여

       (本人의 拙詩, 생명 위에 내리는 생명(生命)

  그렇습니다. 이 봄, 위로부터 내리는 생명의 신비는 솔로몬의 영광으로도 대치할 수 없는(마6:29) 고귀한 은총의 선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자들(히3:1)은 무엇보다도 ‘먼저’(first,only), 위 엣 것을 구하는 신앙의 자리에 서서, 이 신생(新生)의 봄을 맞이 해야 할 것입니다. 하늘 아버지께서는 ‘오직’(only)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이들에게,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마6:33)

  그리고 이 봄의 신생(新生)은 또 어떻습니까? 따사로운 햇살,맑은 공기, 시원한 바람, 영롱한 별빛이  이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만을 낼 뿐(창3:18)입니다. 해 아래 새 것이 없습니다.(전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