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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의 해석학(The Hermeneutics of Suspicion)

2008.04.23 09:45

김성찬 조회 수:2320 추천:67

                         의심의 해석학

                   (The Hermeneutics of Suspicion)



  

  유아자폐증


  정신 분석가 에릭 에릭슨(Erik Erikson)은, 인간 발달의 단계를 8개로 구분하여 그것을 인생주기(life cycle)이라 부르고, 그 각 단계마다 자아(自我)가 발달시켜야 하는 ‘발달과제’(developmental task)가 있다고 말합니다. 에릭슨이 구분해 놓은 인간 발달 8단계중 첫단계가 유아기(乳兒期)인데, 이 시기에 형성해야할 발달과제는 ‘신뢰와 불신’(Trust vs. Mistrust)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신뢰’라는 적극적 요소와 ‘불신’이라는 부정적 요소가 인간 내부에서 상호 갈등을 통하여 어느 한편을 획득해 나아가게 되는데, ‘신뢰’라고 하는 적극적인 요소를 획득한 경우, 그 사람은 이 유아기에 알맞은 자아형성을 이룬 것이라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형성된 신뢰를 ‘기초적 신뢰’(basic trust)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이 시기에 기본적 신뢰가 형성되지 못하고

부정적 요소인 ‘기초적 불신’(basic mistrust)이 형성될 경우, 에릭슨은 이런 경우 ‘유아 자폐증’에서 볼 수 있는 여러 현상들이 나타난다고 말합니다.


  나는 의심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H.M 콰이어트의 ‘모든 것이 정치이나, 정치가 모든 것은 아니다’라는 말에 동의하면서도, 우리는 ‘정치가 모든 것인 세상’에 살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불행한 것은 정치가 모든 것이 되게끔 한, 이 땅의 정치 수준이 아직도 정치적 ‘유아기’에 머물러 있다는 것입니다. 유아기, 그런데 더 심각한 문제는 이 유아기적 정치 현실이 기본적 신뢰를 형성치 못하고,‘기초적 불신’(basic mistrust)만이 형성된 유아기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여기에 다시 그 정교한 밑그림을 그려 볼 필요도 없이, 정치가 ‘불신’(不信)때문에 의장공관에 스스로 갇히는 ‘자폐’(自閉)증상을 만천하에 드러내 보인 것입니다.  그래서 ‘기초적 신뢰’의 단계를 거쳐야 형성될 수 있는 자율성, 자발성, 생산성 등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오히려 불신, 의혹, 열등감등 정치적 퇴행을 거듭해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 국민 모두가, 이런 퇴행적 정치의 희생물이 되고 말았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 모두가 상호 불신 덩어리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의장 공관 해프닝이 드러내 보인 이 시대 문제는, 마치 의심이라는 씨줄과 불신이라는 날줄로 엮어 짠 천과 같은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장일치의 합의도 믿을 수 없는 사회. 그래서 매사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사회. 처처에 불신이 죽음의 늪처럼 도사리고 있는 사회. 그래서, 일단 의심해야 득을 보는 사회. 그러기에, ‘나는 의심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가 시대정신의 명제가 되어 버린 사회에 우리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의심(疑心), 의심함으로만 존재 가능한 이 정신 병리학적 사회 현상은 어떻게 형성되어졌는가? 여기 ‘의심의 해석학’이란 말이 있습니다.

  의심의 해석학(The Hermeneutics of Suspicion)


  흑인 신학자 제임스 노엘(James A.Noel)은 ‘아프로-아메리칸(Afro-American)영성에 있어서 명상과 사회행동’이라는 소논문에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끌려 온, 아프리카 노예들의 기독교화에 대해 고찰하면서 ‘의심의 해석학’(The Hermeneutics of Suspicion)이란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아프리카 노예들이 기독교화 되어 가는 과정에서 생산된 용어인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노예들의 기독교화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빠른 속도로 이뤄진 것이 아니었다. 아프리카 노예들은, 그들이 1619년 아프리카에서 제임스타운으로 강제로 끌려온 후 1740년 ‘대각성 운동’이 시작될 때까지는 대부분은 그대로 버려져 있었다. 그런데 아프리카 노예들이 기독교를 이처럼 더디게 받아들이게 된 기본 요인은, 기독교 신앙이 노예들에게 자유에 대한 갈망을 부추길지도 모른다고 의심했던 노예주들의 선교에 대한 반대 때문이었다. 노예들은 안식일에,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주중(週中)의 저녁 2부 모임에서 설교를 들었는데, 대부분의 주(州)들이 법으로 노예들의 읽고, 쓰기를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르침은 구두(口頭)로 행해졌다. 설교와 가르침은 천편일률적으로 주인을 섬기는 것이 곧,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같으며, 노예들은 자신들의 처지에 만족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전했다.


그러나 아프리카 노예들이, 비록 대부분이 문맹(文盲)에다 신학적으로도 미숙했지만, 그 노예들은 주인이 자신의 이익을 유지하려는, 인종-계급적 각도에서 성서를 읽고 있다는 것을 금새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 결과 노예들은 그들이 들은 것을 그들 자신의 시각으로 각색하는 지혜를 터득케 된 것이다. 이를테면, 주인이 어떤 것이 좋은 것이라 말했을 때, 그들은 그 반대가 진실일 것이라고 생각케 된 것이다.그러니까 노예들은 선교사가 반란은 나쁜 것이라고 말하면,반란은 좋은 것이거나 도덕적으로 정당한 것이라고 해석하는 ‘의심의 해석학(The Hermeneutics of Suspicion)’을 발전시켰다.”


  거꾸로 읽기

 

  에릭슨은 갓난 아기에게 사회적 신뢰가 최초로 나타나는 것은, 아기가 안심하고 음식을 받아먹고 있다거나, 잠을 잘 자고 있다라는 등의 형태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프로-아메리칸(흑인 노예)의 경우, 그들은 안심하고 받아먹을 만한 메시지가 없었던 것입니다.그래서 안심하고 받아 먹을만한 음식이 없는 유아가 ‘불신’에 기초한 인간상을 형성해 가듯, 아프리카 노예들 그들 또한 인종적,계급적 각도에서 성경을 읽는 백인들의 메시지에 결코 만족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학사 에스라의 권능의 성서 해석학이래, 불행하게도 의심함으로써만 진리에 이를 수 있는 해괴한 ‘의심의 해석학’이 발전하게된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불행하게도 이런 병리적 현상이 아프로-아메리칸들에게만 나타난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사는 이 땅에도 그런 류의 불신이 독버섯처럼 만연해 있다는 슬픈 사실입니다. 언제 우리가 안심하고 먹어도 탈나지 않는 위정자들의 공적 약속을 섭취해 본 적이 있으며, 정녕 우리가 안심하고 잠들어도 ‘날치기’ 하지 않는 정부를 가져 본 적이 있었던가 말입니다.


  서울대 신문학과 박승관 교수는 그의 저서 ‘드러난 얼굴과 보이지 않는 손-한국사회의 커뮤니케이션 구조’에서 안심하고 받아먹을 만한 메시지가 없는 우리 사회의 기형적 ‘커뮤니케이션 구조’에 대해 이렇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권위주의 체제 아래에서 언론과 정보에 대한 권력의 통제가 심화되자, 사람들은 언론의 보도 내용을 그대로 수용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속에 숨어 있는 제 2차적 또는 제 3차적 메시지를 찾아내기 위해 ‘행간 읽기’에 열중했던 경험을 우리 사회는 가지고 있다. 정보의 객관적 의미, 즉 표면적 의미(denotation)보다는, 주관적 의미 즉 심층적 의미(connotation)가 수용자들의 정보추구 행위에서 보다 선호되고 중요시되는 현상이 발생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공식적 경로를 통해 전달되는 메시지에 대해서 이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정반대로 해석하는 ‘거꾸로 읽기’가 한때 우리 사회에서 성행하였다. 예를 들면 정부에서 ‘물가를 올리지 않겠다’는 발표가 있고 나면, 아니나 다를까 오래지 않아 공공 요금 인상이 발표되었고, ‘정부는 이번 선거에서 엄정 중립을 지킬 것이며, 선거 사범은 지위 고하를 불문하고 엄단하겠다’는 발표와는 달리, 선거에서의 관권 개입은 일반화되었다. 그리하여 정부의 발표나 언론의 보도 내용과 일치하는 방향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보다는 이와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이(콩을 심으라하면 팥을 심는 것이), 보다 정확하고 이익이 큰 경우가 무수히 발생하였다. 이처럼 말과 행동이 다른 사회에서 사회성원들의 합리적 커뮤니케이션 행동은 공식적 정보에 대한 전면적인 불신과 ‘거꾸로 읽기’가 될 수밖에 없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아프로-아메리칸의 ‘의심의 해석학’의 형성사가, 또한 숨길 수 없는 우리 사회의 병리적 자화상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흑인 노예들의 성서 해석학(의심의 해석학)이 노예들의 해방을 원치 않는 주인들과, 그에 동조한 백인 설교자들의 왜곡된 메시지에서 유래한 것처럼, 우리 사회의 거꾸로 읽기 또한, 그 동안 이 땅의  위정자들의 메시지가 그 신뢰성과 정통성을 상실한 결과에서 기인된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다 “거짓말을 지어내는 자요 다 쓸데없는 의원”(욥13:4)이었던 것입니다.


  불신의 고착화


  ‘불신과 거꾸로 읽기.’ 그래서 이 땅은 의심의 해석학과 기만과 저항의 영성을 자연스럽게 키워 온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어쩌면 이것은 그리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렇게 의심함으로써 자신을 지켜 나아 갈 수만 있다고 한다면, 의심함으로써 진리에 이를 수가 있다고만 한다면, 차라리 그것은 불행중 다행한 현상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불신이 일반화되고, 고착화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이런 현상이 심각한 문제로 대두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너나할 것 없이 이 땅의 사람들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의심하려고만 든다는 데 있는 것입니다. 믿어선 안될 것이 너무 많다 보니까, 정말 믿어야 할 것을 믿지 못하는 세상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남자는 다 도둑이라고 생각하여 시집가는 것을 포기해 버린 처녀처럼 말입니다.


  여기 우리 사회에 단단한 의식으로 고착된 불신의 단적인 한 예가 있습니다. 지난 1993년 가을, 황해 바다에 인 삼각 파도로 전복된 여객선 ‘서해훼리’호 사건 말입니다. ‘백선장’을 기억하십니까?  전복된 배,‘서해훼리’호의 선장(船長)을 말입니다. 수백 명의 승객이 엇비껴 때리는 거친 파도에 휩쓸려 돌이킬 수 없는 나락의 심연으로 수몰되어 가버린 사건의 한복판에 백선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그는 또 하나의 삼각 파도에 부대끼고 있었던 것입니다. 군(軍),관(官),민(民)의 삼각 파도, 그 의심의 해석학에 말입니다. “백선장은 살아 있다. 아무게가 봤다.  치사하게 살아 남은 비겁한 선장, 파렴치한 도피 행각이 무슨 말이냐, 빨리 자수해라,자수해!”  백의 얼굴, 천의 얼굴을 가진 백선장. 한동안 매스컴과 온 국민들의 들끓는 의심의 대상이었던 백선장.그래서 이 불신에 찌든 국민들의 무차별한 의심의 해석학에, 남편과 아버지 잃은 그 유족들은 맘놓고 울지도 못하는 죄인 아닌 죄인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매스컴을 필두도 이 국민 어느 한사람도 자신의 생명 같은 배와 함께 죽어, 황해 바다의 고기밥이 되고 있던 충직한 백선장이, 바로 그 배 안에 있을 것임을 말해 주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의심하지 맙시다. 그는 그 배안에 있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얼마나 부끄러웠습니다. 그 유족들에게 얼마나 미안해했습니까? 죽어 시체된 남편에게 ‘불신의 작살’까지 꽂아, 확인 사살해 마지않던 이 시대의 잔인한 작태. 그래 세월이 약이라지만 그 아내는 그것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 모두가 범죄자가 된 것입니다. 누룩처럼 만연된 의심, 그 고착화된 불신 때문에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불신을 해결해야 합니다. 만연되어 가는 불신의 고착화만은 해소해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건강한 사회를 유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누가,무엇이 이 힘든 일을 가능케 할 수 있겠습니까? 그 해결사가, 이 땅의 선량한 시민들에게 의심의 해석학과 기만과 저항의 영성을 길러 준,‘거짓말하는 지도자들’이겠습니까?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더 얄미운 시누이 같은 ‘쓸데없는 의원들’인 이 땅의 눈치나 보는 알량한 지식인들이겠습니까? 그 누구도 아닙니다.


  에릭슨은 이렇게 말합니다. “종교는 신앙이라는 형식을 통해서 신뢰감을 회복시키고, 인간을 지배하는 악마적 세력을 구체화하여 인지할 수 있게 함으로써 물리치게 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누가 뭐래도 그 책무는 종교의 몫인 것입니다. 진리를 사수해야 하는 교회의 몫인 것입니다. 그래서 에릭슨은 “종교는 유아에게 형성된 ‘기초적인 신뢰’라는 형태의 신앙을 강화해야할 책임이 있다”라고 부연합니다. ‘기초적 신뢰(basic mistrust)’라는 형태의 신앙을 강화해야 합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그가 말하는 이 ‘기초적 신뢰(basic mistrust)’라는 것은, ‘인간이 살고 있는 이 세계가 불신적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세계를 긍정하고 신뢰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받아들이는 감각’을 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렇습니다. ‘신뢰’라는 것은 이 사회가 불신적 현실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어주는 감각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아내가 부정한 ‘고멜’임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용서하고, 믿어 주던 사랑의 선지자 호세아처럼, 그렇게 끝없는 사랑과 믿음을 보여 줘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만이,믿음만이 능력인 것입니다. 그래야만 ‘늑대가 나타났다’고 거짓말을 일삼는 양치기 소년을 살려 낼 수도, 변화시킬 수도 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힘은 위대한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의 신앙적인 삶은 힘이 들고 어려운 것입니다. 믿음의 책,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롬14:1)고 말씀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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