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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의 구원, 그 확신과 의미

2008.05.12 21:27

김성찬 조회 수:1213 추천:56

                                      이 시대의 구원, 그 확신과 의미

 

 


그 ’70년대에 나는 우체부도 하루 걸러 오는 시골 소학교에서 훈장 노릇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작은 학교에 한 여선생님이 계셨는데, 그녀는 그 시기 한국 교계를 들끓게 했던 소위 구원파 교도였습니다. 이 오동통하게 생긴 처녀 여선생은 매우 열성적인 구원파였는데, 문제는 그녀가 거의 매일같이 수업만 끝나면 내 교실로 찾아와 열심히 나를 구원 시키려고(?) 무던히도 애썼다는 사실입니다.


“구원 받으셨어요?” “그렇다면 언제 구원 받으셨어요?” 이렇게 시작되는 그녀의 끝없는 질문은 나를 거의 몸살 나게 할 정도였습니다. 그녀는 모태 신앙인이며 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살아 왔던 나의 신앙고백이 가짜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단지  구원 받은(거듭난) 날짜를 모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지금이라도 당장 자기를 따라 나서기만 하면, 즉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나를 설득해댔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류(類)의  구원의 확신 말고도 나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던 것은 그녀의 해박한 성경 지식과 똑 떨어지는 (?) 말씀 해석이었습니다. 요한 계시록이 어떻고, 다니엘서가 어떻고, 그래서 예루살렘 정북(正北)에 있는 모스크바가 어떻고, 유대계 미국인인 헨리 키신저가 적그리스도며 등등. 날줄과 씨줄로 엮인 말씀과 상황을 쾌도난마(快刀亂麻)처럼 명쾌하게 풀며, 종말을 예언해대는 끝간데없는 그녀의 설득과 해박한 성경지식이 나를 적이 당황케 했던 것입니다.


‘믿음의 증언’ 그 시대가 가면서 - - -


1960년대 까지만 해도 한국교회는 심령부흥회를 통한 부흥사들의 ‘믿음의 증언’에 대한 무조건적인 ‘믿습니다’ 일변도의 신앙으로 성장을 거듭해 왔던 것입니다. 이런 ‘믿음의 증언’은  선교 초기의 부흥 사역의 기본이며 필수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초대 교회가 ‘믿음의 증언’의 시기를 한동안 계속해 가다가 ‘기록된 말씀’의 시대로 옮겨 갔듯이 말입니다. 그러다가 ‘70년대에 이르러서 C.C.C로 대표되는 체계적인 성경공부 운동이 대학 켐퍼스에서 날로 확산되어 가고 있었지만, 기성 교회는 대학생 선교 단체들이 개교회 대학생들을 빼앗아 간다고 불만이나 터트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공백을 비집고 소위 구원파 일당이 그들 나름대로 정선된 말씀의 체계를 세워 가지고 기성교회를 위협해 왔던 것입니다. 마치 호적초본 들여다 볼 필요 없이 순박하게 ‘믿습니다’식의 신앙고백으로 살아 온 성도들에게 느닷없이 생년월일를 따져 묻고, 주민등록번호를 대라고 추궁해대는 수사관처럼 말입니다. 이러한 추궁에 말씀의 무지가 탄로 난 이들은 그들이 불러 준대로 다시 태어나는 기현상을 연출해 냈던 것입니다. 태어 난 날이 생일이 아니라, 면사무소 서기를 만난 날이 생년월일이 되는 기이한 현상이 말입니다.


‘구원의 확신’의 열풍은 불고 - - -


이런 충격 속에 한동안 헤매이던 한국교회는 ‘구원의 확신’의 열풍에 휘말리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80년대는 ‘구원의 확신’으로 대표 되는 성경공부 붐이 이 강산을 뒤덮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구원이 아닌 것, 믿음이 아닌 것 등을 논하는 ‘구원의 확신’에 대한 ‘선명성 논쟁’과 이것이 진정한 구원이며, 진정한 믿음이다 라는 ‘구원의 확신’에 대한 ‘차별성 논쟁’까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입니다. ‘전도폭발’이 한국교회의 전도 훈련에 끼친 공헌을 나름대로 인정하지만, 그들은 ‘믿음’의 선명성을 강조하면서 ‘믿음 아닌 것’을 분류 하는데, ‘병낫기를 간구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라는 식으로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쩌면 신유의 복음을 강조하고, 체험적 신앙을 보다 중시하는 이들에게 지나친 열광을 피하라는 경고로도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사실 그 드러난 현상은 신유의 복음을 강조하고, 체험적 신앙을 보다 중시하는 교회들의 신앙을 은밀히 파괴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이와는 정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어느 기도원에서는 우리는 강아지만 빼고 방언 못하는 사람 없다며 방언의 은사를 구원과 일치 시키려는 듯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정한 은사가 곧 구원이라는 방정식 말입니다. 그러나 이 모두가 구원과 믿음 그리고 구원의 확신에 대한 건전한 이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다시 간략히 정리하자면, 한국교회는 소위 구원파식 ‘언제?’라는 함정과 믿음과 구원에 대한 선명성 내지는 차별성 논쟁에 휘말려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직까지도 말입니다.


칭의론에만 머물어서야 - - -


그런데 이와 같은  백가쟁명식 구원 방정식은 유별나게 바울과 같은 극적인 구원의 확신과 칭의론에만 강조를 둔 구원론에 그 근본 이유가 있다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리는 사도행전 9장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난 바울 같이 보다 분명한 거듭남을 주로 강조하고 있으며, 구원을 이야기 할 때 우리는 지나치게 구원의 출발인 칭의론에만 머물고 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식의 구원 방정식에서 벗어나야 할 시기에 이르렀습니다. 한국교회 선교 2세기를 맞는 오늘, 우리는 여기서 바울이 아니라 베드로를, 칭의론을 넘어 성화론에 보다 깊은 관심 둔 구원을 말해야 할 것입니다.


구원의 확신과 구원은 별개일 수도- - -


이 물음에 한번 답해 보십시오. 바울은 언제 거듭났습니까?  그렇다면 베드로는 언제 거듭 났습니까?  베드로가 예수님을 맨 처음 만난 요한복음 1장(40-42)일까요? 죄인 됨을 고백한 누가복음 5장일까요? 신앙고백을 주께 드린 마태복음 16장일까요? 아니면 부활 후 주님을 만난 요한복음 21장일까요? 오순절 성령 충만 사건 때일까요?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베드로에게서는 바울과 같은 극적인 거듭남의 역사(행9:)를 발견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의 중생의 시기는 분명히 알 수 있지만 베드로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가 받은 구원이 가짜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의 신앙 일대기에서 많은 교훈과 감동을 받곤 합니다. 그리고 사도 베드로의 일시적인 실수에도 불구하고 그가 완전한 구원에 이른 사람임을 그 누구도 부인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라는 단서를 붙이는 ‘구원의 확신’은 없어도 되는 것입니다. 잘 이해 하셨으면 하는데, 어떤 의미에서 구원의 확신과 구원은 별개 일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말을 바꾸자면, 구원의 확신이 없다고, 구원 받지 못하는 것입니까? 구원의 확신이 구원 받은 자로서의 삶에 헌신을 더하게 하는 것은 틀림이 없지만, 그 확신이 자칫 위로부터 내리는 아가페 종교적 은총과는 거리가 먼, 내 공로나 적극적 사고방식으로 말할 수 있는  에로스 종교적 신념으로 전락할 가능성도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천국에 가면 놀랄 일이 세 가지라고 합니다. 하나는, 내 기준으로는 도저히 구원 받지 못할거라 생각 했던 사람이 와 있다는 것이고, 둘째는 꼭 올 것 같던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며, 마지막으로는 나 같은 죄인이 와 있다는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구원 받은 날짜는커녕, 방언 한마디도, 구원의 길에 관한 말씀의 근거 한 귀절도 기억치 못했지만,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자손들의 복 받기를 빌었던 우리들의 할머니들께서는 분명 저 하늘나라에 가 계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저 예수를 구주로 믿기만 하면 가는 천국을, 너무 어렵게 안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단순한 구원을 너무 어렵게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의 확신에 대한 선명성 경쟁이나 일삼으면서 말입니다.


구원이란 - - -


그래서 오늘 우리에게 보다 중요한 것은 구원에 대한 올바른 이해라고 생각 합니다.구원은 과거의 구원(--영생을 얻었고(요5:24)),현재의 구원(---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2:12)),미래의 구원(--가까왔음이라(롬13:11))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표2참조요) 그리고 이를 중생(重生 거듭남,Regeneration/칭의,양자됨), 성화(聖化:Sanctification),영화(榮化:Glorification)라고 부릅니다.


그 가운데 중생은 칭의, 양자됨등 여러 말로 사용되고 있는데, 중생은 생물학적 출생에 비유한 주관적 내면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고, 칭의(稱義)는 법률적 설명으로 하나님과 객관적인 법적 관계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는 변화이며, 이것을 가족관계에 비추어서 양자(養子)됨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의 사건을 어떤 방법으로 설명하느냐의 표현상의 차이일 뿐입니다. 이는 회개하고 믿는자(막1:15)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의롭게 하시며(칭의,롬3:21-28),동시에 위로부터 내리는 은총으로 거듭난 새 사람이 되게 하시는(新生,New Birth) 것을 말합니다.(표1참조요) 이 거듭남에는 어떤 느낌이나, 감격, 확신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갓 태어난 어린아이 같이 말입니다.  바울과 같은 환상적인 거듭남의 체험은 매우 특별한 경우일 것입니다. 그러나 자라나면서(聖化) 아버지의 아들 됨을 확인하게(말씀으로) 될 것이고, 그분의 선물(은사)과 사랑에 감격하게 될 것입니다. 날마다 새로운 구원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칭의는 성화의 출발 - - -


그런데 지금까지 우리는 구원의 확신 여부를 말할 때 주로 과거의 구원(거듭남)에 대해 말하곤 했습니다. 주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칭의론에만 머물렀던 것입니다. 그것은 많은 신학자들이 구원론을 말함에 있어 주로 칭의론에 그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칭의는 성화의 과정의 시작인 것입니다. 칭의는 성화의 출발인 것입니다. 그리고 성화는 칭의 받은 사람이 더욱 성장하여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충만 한데까지 이르는 것(엡4:13)입니다. 그러므로 칭의 없이 성화가 있을 수 없으며, 성화 없는 칭의는 무의미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구원의 초보 논쟁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논리적이고 사변적인 신앙에만 머물러 있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온전한 성화를 향하여 - - -


한국 교회가 선교 2세기에 접어들었다는 말에는 무슨 뜻이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까? 이제 한국 교회는 초기 성화의 단계를 이미 벗어나 온전한 성화를 위해 신앙적 정진을 해야만 한다는 사명이 부여 되어 있다는 말인 것입니다. 믿는 것과 사는 것 중에서 사는 것에 보다 강조점을 둘 만큼 성숙 했다는 것입니다. 과연 내가 우리 아버지 아들이냐 아니냐를 확인하기 위해 맨 날 호적 초본이나 뒤적이는 듯한 철부지를 벗어 버리라는 것입니다. 4대째 목사, 장로를 배출한 한국교회의 신자들 중 상당수가 모태 신앙인들일 것입니다.


적절한 비유는 아닐지 몰라도, 태어나면서 부터 구원 받은 자라고 믿는 유대인들에게 구약성서가 구원을 위한 책이 아니라 선민들의 세속에서의 삶의 규범이라는 것처럼, (물론 모태 신앙인은 곧 구원 받은 자라는 등식이 성립되는 것은 아닌 줄 알지만) 태어나면서 부터 거듭 났다고 말해도 좋을(?), 이 땅의 믿음의 자녀들에게 칭의만 되풀이 하지 말고 우리는 성화의 (험한) 과정을 설명해 주고 격려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베드로처럼 언제 거듭 났는지도 모르게 예수를 주로 고백한, 이미 예수 안에 있는 이들이 한국교회의 주인공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특히 성화론에 깊은 통찰과 강조점을 두고 있는 웨슬리의 구원론에 서 있는 우리 성결교회의 신학적 입장이야 말로, 유일하게 선교 2세기 한국교회의 온전한 성화를 위한 대안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우리 성결교회의 영적 자부심과 영적 사명과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시몬 베드로


여기 베드로의 일생은 온전한 성화를 이루는 귀한 모델이라 생각됩니다. 그가 구원 받은 신앙인의 삶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이 예수님을 맨 처음 만난 것은, 예수의 공생애 사흘째 되던 날이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 극적인 장면을 요한복음 1장(40-42)에 생생히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메시아를 만나러 왔던 그에게 “장차 게바(베드로)라 하리라(요1:42)”고 말씀 하셨으나, 그는 그 즉시 예수를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최초의 만남 이후  한 6개월 만에, 베드로는  누가복음 5장에서 다시 예수를 만나게 됩니다. 그 게네사렛 호숫가 기적의 만선(滿船) 앞에서 베드로는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5:8)”는 죄인됨을 고백 합니다. 그리고 예수를 좇았습니다. 


그 후, 3년여 예수를 좇다가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라는 신앙고백을 베드로는 예수께 드리게 됩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십자가의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하고 저주하고 돌아서 버립니다. 그러다가 뜻밖에 주님의 극적인 부활을 목도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후로도 작당하여 물고기나 잡으로(요21:2-3) 디베랴 바다로 나아가 버립니다. 하지만 다시 예수께서는 헛 그물질을 해대는 베드로를 그 바다로 찾아 오셔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요21:15-17)”고 세 차례나 물으셨고, 거기서 베드로는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요21:17)”는 부끄러운 고백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주께서 승천하셨고(행1:), 오순절 성령 강림과 베드로의 권능의 사역이 사도행전의 역사를 이루게 됩니다. 성령충만한 사도 베드로는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4:12)”고 힘찬 확신의 언어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광풍과 노도 같은 권능의 사역을 마감한 우리의 위대한 노(老)사도의 소망의 ‘마라나타’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벧후3:18)”는 권면이 그의 서신서(베드로전후서)의 대미(大尾)를 장식합니다. 이것이 베드로의 신앙의 여정입니다. 그의 예수 안에서의 감격과 충만 그리고 실패와 좌절은 한편의 장엄한 드라마입니다.


훈련이 아니라 은혜로 - - -


기적을 보고, 정치적 메시야로 생각하고 따랐던 3년여, 결국은 배신으로 끝난 것 같았지만 그의 회개는 결코 쉬는 법이 없었고(배신 후에도  눈물을)와  그의 믿음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던 것(빈 무덤으로 돌진)입니다. 그는 믿음이 적은 때는 있었으나(물에 빠져 들어 간) 결코 믿음이 없었던 적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시몬(육에서 난)이자 동시에 베드로(영으로 난)였습니다. 여전히 죄성을 지니고 있는 자였습니다. 그런 그가 온전한 성화를 향해 나아갈 수 있었던 가장 큰 힘은 부단히 자기를 쳐 복종하는 훈련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때를 따라 값없이 주시는 은혜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도 우리와 전혀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화도 잘 내고, 칼질도 잘하고, 성급한 그런 위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온전한 성화를 이룬 순교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참 제자가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제자는 훈련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제자는 은혜로 되는 것입니다. 성도도 마찬가지 입니다.훈련이 아니라 은혜인 것입니다. 은혜를 간구 합시다. 순간순간 회개와 믿음으로 살며, 살아서 순교할 수 있는 은혜를. 그리하여 온전한 성화에 이르도록 말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마지막 유언 같은 권면을 함께 묵상해 봅시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지어다(벧후3:18).”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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