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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장경동 변증

2008.08.27 15:21

김성찬 조회 수:3792 추천:124

영혼일기 46: 장경동 변증

2008.08.27(수)



< 이런 기사가 어제(2008.08.26(화)) 중앙일보에 게재됐다.

   "불교 들어간 나라 다 못살아" 목사 설교 … 조계종 큰 반발


'종교 편향' 문제로 27일 '범불교도대회'를 앞두고 있는 불교계가 장경동(대전 중문침례교회 담임·사진) 목사의 '불교 비하' 발언으로 다시 들썩이고 있다. 25일 서울 조계사 대웅전 앞뜰에는 각종 종교 편향 사례와 함께 장경동 목사의 사진과 불교 비하 발언을 담은 패널이 큼지막하게 세워졌다. ……


장 목사는 지난 11일 미국의 뉴욕순복음교회에서 열린 집회의 설교에서 "내가 경동교(장경동교)를 만들면 안 되듯이 석가모니도 불교를 만들면 안 되는 것 이었다"며 "원불교나 통일교도 만들면 안 되는 것 이었다"고 말했다.


그의 '불교 비하 발언'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또 "스님들은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빨리 예수를 믿어야 한다"며 "불교가 들어간 나라는 다 못 산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자신의 발언에 대한 반박을 염두에 둔 듯 "(나의 이런 발언이) 불교를 비하한다고 하는데, 나는 바른 말을 한 것이다"고 주장했다.  …… >



이 기사를 대하며,

먼저, 나는 왜 중앙일보가 이 기사를 대문짝만하게 실었을까 생각해 봤다. 내가 보기엔 대문짝만하다. 삼성사태 때 지독한 축소, 편파보도를 강행하던 중앙일보가 말이다. 그 비리폭로의 방패였던 정의구현사제단이 미워서, 그 가톨릭까지 포함한 기독교가 미워서 그런 게 아닐까? 그렇지 않다면, 먼 미국에서 우리네 교우들끼리 모인 자리에서 행한 설교내용까지 들먹이며 시시비비를 증폭시킬 이유는 뭔가?


그네들은 체질상 반기독교적인 특정 종교를 변호하는 언론매체인가?
그런 혐의를 내가 더 진하게 갖게 된 것은, 오늘 그 신문 사설을 읽은 까닭이다.


그네들은 어제 그 고발적 기사에 연이어 한술 더 뜬 사설을 게재했다.
오늘 8월 27일자 ‘종교 간 불화 확대돼선 안된다’ 라는 제하의 사설에서는,
이 정권이 들어선 이후, 그들 나름대로 정리한 종교편향 발언 일지를 장황하게 나열하다가,
이렇게 말도 안 되는 결론을 맺고 있다.


“설혹 대통령의 의도가 그렇지 않았다 해도 불교계가 그런 의심을 가졌다 하면 대통령이 사과하는 것이 좋다.”


이게 무슨 말인가? 단지 그 어떤 이들의 터무니없는 의심에 국가 원수인 대통령이 고개를 숙여야 한다? 그 삼성비리, 그 의심 아닌 명백한 증거에도 함구하며 변명을 일삼던 그들 아닌가? 근거 없는 의심에 굴복하라? 논리가 없다. 하니 설득력도 없다. 공익을 구현해 내야할 매체로서 자격도 없다.


그리고 오늘 범불교대회라는 것은 또 뭔가? 그 이유와 성격이 뭔가? 그게 공익과 보편타당한 진리 구현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그동안 누리던 기득권을 빼앗긴 허탈감의 표출인가? 전통 문화재 같은 종교로, 기천년 동안 문화재 수준급으로, 그 가치와 평가와 대우를 받아온 종교 아닌 종교가 아니었던가?


온 산천이 거의 다 저들 불교 문화재라면서, 그 문화재라는 명분하에 그 얼마나 많은 국가적 혜택을  누려왔는가? 도대체 뭐가 부족해 대의명분 없는 일에 올인하며 물 건너 작은 교회당에서 목사가 행한 설교, 그 말꼬투리를 물고 늘어지는 것인지?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교회가 몸 바칠 때, 그 독재 권력이 목회자들을 백주대낮에 테러하고 잡아 가둘 때, 그네들은 과연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었는지? 우린 너무도 잘 알고 있다. 불교도인 대통령과 그 부인이 특정 불교를 노골적으로 도와 일세의 부흥의 전기를 마련 해 줬을 때, 기독교가 이런 식의 자기 탐욕을 드러낸 적이 있었는지? 자기 반성적 입장에서 비유하자면, 사학법 재개정 투쟁 때 목회자들이 그 광장에서 집단 삭발식을 강행함으로 교회를 이익집단화해 버린 추악한 몰골이 오버랩 되어 온다.


장경동 목사는 그동안 국내에서도 그런 류의 발언을 서슴치 않았다. 더군다나 그런 설교를 기독교국가라 말할 수 있는 미국에서 행한 것 아닌가? 물만 건너가면 멀쩡한 사람도 그 분위기에 눌려 아부성 발언을 늘어놓지 않던가?  한 때, 재야 반미주의자연 했던 노무현 대통령조차도 물 건너가자마자 이해할 수 없는 망발을 늘어놓지 않았던가? 


로마에 가면 로마 사람이 되듯, 쇠고기 파동 등, 분출하고 있는 이 땅의 반미정서로 인해 저 땅 이민생활에 더한 어려움을 겪는 교포들에게,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느라 보다 더 우호적인 발언을 쏟아냈을 것이고, 무슨 큰 이유를 알 수 없이 판을 벌인다는 ‘범불교대회’로 곤욕을 치루는 기독교 장로인 대통령을 비롯한 기독교 공직자들을 위해 목사로서, 부흥사(부흥사들은 통상 그 말본새가 과장되고, 거칠다)로서,  그런 단어를 구사하지 않았겠는가?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공직자의 말도 아니고, 목사가 교회 내에서 행한 교리적 설교내용을 가지고 시비한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행4:12)다.


우리는 이런 말씀을 전해야 할 설교자로 부름을 받은 사명자이다.
이런 입장에서 그는 바른 말을 했다.

기독교만이 칼 발트의 말대로 타종교를 진리로 이끌어 내야 할 선교종교다.

이 생명의 말씀을 밝히는 것이 목사의 의무다.
우리네 선배들은 이 말씀 증거에 목숨을 걸었다.

장경동 목사는 바로 이런 순교자적인 전통에 굳게 서서 성도들을 위무 격려한 것이다.
그리고 그 헛된 신앙에 일생을 건 이들에게, 그 허망한 일(짓)을 제발 관두라고 읍소한 것이다.


장경동 목사만이 아니라 나도, 우리네 목회자들 특히 숱한 부흥사들도 장경동 목사가 발한 그런 류의 말을 설교시간에 흔히들 말해 왔다. 일본 같은 나라를 제외하고 불교국가치고 잘사는 나라가 과연 얼마나 되는지?


청년시절 법구경을 읽다가 무릎을 쳤다. 각 게송(偈頌) 끝에 역자가 붙인 토막글(斷章) 때문이었다. “원수를 사랑하라(마5:44)…… 예수. 그러나 우리에게는 사랑해야 할 원수도 없다.” 그 단장은 기발했으나, 난 그런 그네들의 비아냥거림이 얼마나 뜬구름 잡는 이야기인가 이내, 알아차렸다. 하여 속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그 구름 잡는 명상을 위해 버릴 가족은 있어도, 실존적 고뇌로서의 부양해야할 가족은 없다. 실존적 고뇌에서의 무책임한 도피. 그런 체념적 철학에 물든 이들이 어떻게 삶을 개척해 나갈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기독교는 다르다. 이 땅에서도 부요한 삶을 누릴 수밖에 없는 신앙신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막스 베버(Max Weber)는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오늘날 서구 선진 자본주의에서 인간의 직업(Beruf or Calling)관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것이고, 노동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으로 생각한 청교도의 윤리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직업은 신앙인의 도덕 훈련의 수단이며, 노동을 한다는 것은 어떤 공리주의적 동기보다도 노동 자체가 목적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그들은 직업을 소명으로 생각했다. 이런 윤리에 기초한 청교도들의 근검(근면과 검소), 염직(청렴과 정직)이 재물을 쌓는 것으로 변모하면서 자본주의의 발전에 도움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렇다. 이런 특별하고, 고등한 신앙윤리에 기초한 기독교국가가 선진 자본주의의 부요를 누리고 살고 있다.


장경동 목사는 옳았다. 바르다.


우린 그의 설교에 아멘 해야 한다.

비교종교운운하며, 종교 간의 대화 운운하는 이들이 지닌 신학적 입장과 신앙고백은 진리에서 한참 벗어나 있다. 그들은 기독교 이단자들이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고린도전서 6:14-16).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에베소서 3:10).



아프칸 선교도 계속 되어야 하고, 저 산속의 절간도 복음화해야 한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딤후 4:2), 땅 끝까지(행1:8) 복음을 전파해야할 의무가,
우리 믿는 자에게 있다.


그런 비난에 동조하지 말고, 제발 기죽지 말고, 머리 조아리지 말고, 우아하게 대처 말라.

당당히. 그들에게 전하라!


왜 그네들이 참 부요를 누리지 못하며,

의미 없는 행사(짓)를 벌이며,

왜 참 진리의 길로 돌이켜야 하는지를.


반성하고, 회개하노라.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내 자신을.

세속적인 비판에 움츠린 내 영혼을.

바울의 옹골찬 고백을 다시 듣는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1:16).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