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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말하게하라

2007.11.03 11:40

김성찬 조회 수:3633 추천:121

  성경이 말하게 하라


  메아리는 산(山)의 노래인가. 산에 올라 호기롭게 산을 향하여 목청껏 소리를 질러봅니다.
  “야ㅡ호”
  한참 후 물결치듯 번져가던 함성이 메아리 되어 다시 돌아옵니다.
  “야ㅡ호”
  “야! 산이 노래한다. 산이 노래해.”
  우리는 어린아이들처럼 기뻐 소리칩니다.
  ‘메아리’ㅡ 그런데 이 메아리는 과연 산의 노래일까요? 이 산울림이 정녕 산의 소리일까요?
  신기루입니다. 허상입니다. 그렇습니다. 정작 인간의 소리일 뿐, 메아리가 산의 노래라는 말은 사실과 거리가 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인간들의 소리일 뿐입니다. 우리는 산의 소리를 듣기 위해 산에 올라가지만, 결국은 자기 소리에 도취되어 돌아올 뿐입니다. 그것은 산의 소리도, 그 산의 인격적 응답도 아닙니다. 산은 단지 침묵만 하고 있었습니다.
  
  “산이 말하게 하라!”
  “산의 소리를 들으라!”
  인간들이 소리쳐대는 아우성 속에는 산의 언어가 없습니다. 산은 침묵하는 사람에게만 말하기 시작하고, 귀 기울여 듣는(to listen) 사람에게만 자신의 노래를 들려줍니다. 정녕 그 생명의 고동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 한, 우리는 결코 산이 주는 메시지를 들을 수 없습니다.
  “성경이 말하게 하라!”
  “성경의 소리를 들으라!”

  홍수 속의 기갈

  현대 문명의 이기(利器)는 메시지(massage)의 홍수(洪水)를 이루었습니다. 앉으나 서나 길을 걸을 때나 누워서나 들려오는(to hear) 말씀이 천지에 가득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요즘들어 부쩍 제 2의 종교개혁이라도 맞은 양, ‘성경으로 돌아가자’라는 구호를 외쳐댑니다. 성경 읽기, 성구 암송, 성경 연구 등 성경과 관련된 각종 출판물과 세미나, TV, 라디오 방송을 통한 다양한 메시지가 봇물 터지듯 넘쳐댑니다. 마치 홍수(洪水) 끝에 먹을 물(食水)이 없어 기갈이듯, 교회는 메시지의 홍수 속에서 말씀의 생수(生水)를 찾고자 성경적 갱신에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 주변에서 범람하는 적지 않은 메시지는, 성경의 언어가 아니라 사람들의 아우성일 뿐입니다. 그것은 나르시스적 자기 도취이며, 자극과 반사라는 ‘영혼 없는 심리학’, 아니 더 나아가서 포유동물의 신경작용을 분석하는 ‘인간 없는 심리학’의 산물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오늘 우리의 공허한 메시지들은, 신(神)의 응답도, 성경의 언어도 아닌, 자기 확신이거나, 그릇된 신학 이야기, 또는 심층 심리학적 사고의 표출이라는 것입니다. 도그마와 편견 주고받기일 뿐입니다. 공허한 메아리일 뿐 생명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메아리 같은 메시지에는…….

  성경에 관해, 성경에서

  왜 우리는 이 시점에서 ‘성경이 말하게 하라’는 성경적 언어 갱신을 이야기하는 것일까요? 하이데거(M. Heidegger)는 로고스의 근본 의미를 ‘드러내 보임’ , ‘보이도록 해줌’을 의미하는 말이라고 했습니다. ‘보이도록 해줌으로써의 말’은 존재자를 열어 밝히는 것을 뜻합니다. 진리는 시초에 감추어져 있는데 애써 찢었음을 의미했습니다. ‘말함’이라는 동사의 매개적 성격은, ‘누구에게 어떤 것을 보이도록 해준다.’ 또는 ‘자기를 밖으로 드러내어 말한다.’ 등등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게 하라.’ 라는 말은 하나님에 관해(Uder Gott)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von Bidel) 성경을 말하는 일은, 오직 성경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명백히 인정하면서도 말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말이 아니라 인간의 아우성, 그 공허한 메아리로 천지를 메운 이 메시지들은 무엇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까? 무엇이 말씀이 말씀 되는 것을 가로막고 있는 것입니까?

  무엇이 말씀이 말씀되지 못하게 하는가

  말씀이 말씀되지 못한 그 연유는 다음과 같은 원인에서 기인된 것이라 생각됩니다.

  첫째. 근데 정신 사조가 성경관에 끼친 영향의 결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소위 말하는 역사비평 방법은 성경본문을 객관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대상으로 간주하고 접근합니다. 이러한 방식은 계몽주의에서 시작되었으며, 19세기에 활발했던 낭만주의 사조가 본문 해석에 적용한 객관적, 과학적 이해의 모델에 근거한 것입니다. 이러한 모델에 의하면, 본문은 문헌학 뿐만 아니라 근대의 문학적, 역사적 방법을 포함하는 ‘고등비평(higher criticism)'의 모든 도구를 사용하여 분석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분석의 일차적 목표는 본문에서 본문을 창출해 냈고, 또한 그 본문이 언급하고 있는 고대의 인물, 사건, 종교적 이해에 대해 역사적으로 정확한 지식을 추출해 내는 데 있습니다. 이러한 목표의 영향 아래, 성경 주석은 지난 수세기 동안 더욱 더 전문화된 학과목이 되었으며, 그 연구 결과는 더욱더 가설적이며 불가해한 것이 되어 갔습니다. 결국 성경은 평범한 기독교인들에게서 점점 멀어져 갔으며, 대단히 어려운 과정을 통해 본문의 의미를 해독할 수 있는 학자들만의 전유물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더욱이 학자들이 밝혀 낸 것은 역사적으로는 점점 더 정확해질지 모르지만, 영적으로는 점점 더 빈곤한 것이 되어 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 성경이 편파적, 배타적 연구대상이 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에도 그 원인이 있습니다. 사회 행동주의자들이나 율법주의자들은, 성경을 단지 개인이나 집단의 행동지표로만, 신비주의자나 경건주의자들은 특정 종류의 종교 경험을 고무하고 정당화하는 경우가 아니면 어떠한 성경 사용법에 대해서도 경계하며, 근본주의자들은 성경의 과학적 정확성을 옹호하고 있지만, 그 반대자들인 성경 비평가들은 모세나 예수 시대에 실제로 무엇이 일어났고, 무엇이 가르쳐졌는지를 재구성하는 일련의 단서로만 성경을 취급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셋째, 세속적 교육철학에 바탕을 둔 어떤 행동들을, 성경적으로 합리화하려는 수단으로서 성경을 사용하고 있는 데도 그 원인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오늘 우리 사회에 지배적인 ‘하면 된다’라는 캐치프레이즈로 대변되는 행동주의적 교육 모델을, 교회가 성경말씀을 수단 삼아 자극하고 반응케 함으로써, 소기의 성공지상주의적 신앙목표를 이루어 가는 신앙집단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성경이 문화적 제국주의의 도구로 전락했다고 분개하면서, 성경교육을 통해 사회를 꿰뚫어 보는 눈을 밝혀 주자는 급진적인 방법의 교육 모델 등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넷째, 근대 후기(post-modern)의 이미지의 영향입니다. 그들은 이 세계를 상대적이요, 모든 존재 또한 철저하게 상대적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스스로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진리 또한 인식 주체들의 공동체에 따라 상대적이기 때문에, 모든 지식은 불완전하다. 언제나 말할 수 있는 그 이상의 것이 있다. 창조 작업에 있어서 그 누구보다 중요한 참여자가 하나님이심은 틀림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만이 유일한 창조 행위자인 것은 아니다. 성육신 사건도 오직 나사렛 예수에게만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다. 물론 성경도 진리를 말하는 유일한 책이 아니다. 성경은 근대 후기 세계를 위해서는 생명을 줄 수 있는 메시지를 간직하고 있지 않다.” 라는 것입니다.

  우상(idols)

  우리는 성경이 말하도록 하기 위하여 앞에서 열거한, 성경을 대하는 우리의 일체의 편견, 관습, 전승된 사상들이라는 우상을 버리는 작업을 선행해야 할 것입니다.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은 이러한 일체의 편견과 전해져 오는 관습들을 우상(idols)이라고 하여 네가지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본성과 결부된 종족의 우상(idols of tribe), 전승된 선철(先哲)의 사상인 극장의 우상(idols of theater), 개인의 성격, 교육, 관습에 따른 편파성을 지칭하는 동굴의 우상(idols of cave), 인간 상호관계에서 나타나는 시장의 우상(idols of market)을 들고 있는데, 자연을 연구함에 있어 이러한 우상들을 버리고 허심탄회하게 자연에 순종하는 것이 자연계를 아는 법칙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우리의 신앙이 계시 중심, 말씀 중심에 서야 하는 것이라면 현재 우리의 신학과 신앙을 이러한 이성중심주의나 물질중심적인 세속철학의 틀에서 벗어나게 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말씀에 바로 서고 소위 교권주의, 교파주의라고 하는 편견적 견해나 신학의 몽매주의에서 탈피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리라 생각합니다.
  여기에 우리는 성경이 말하도록 하기 위하여 이제, ‘누가 진정 비신화화(Entmythologisierung) 되어야 하는가’, ‘무엇이 정녕 비신화화(悲神話化)되어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분명한 답을 제시해야 합니다. 정작 벗겨 내야 할 껍데기(우상)는 ‘말씀’이 아니고 말씀을 둘러싸고 있는 화려한 인본주의적 포장물들이며, 본질이 아니라 비본질적인 것이고, 그 분이 아니고 바로 죄성에 물든 추악한 우리 인간 자신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살아 남아야 할 것은 인간의 욕망으로 인한 아우성이 아니라, 그 진실하고 영원한 모음(母音)입니다.
  베이컨은 순수한 귀납법에 의해 자연 안에서 참된 진리를 발견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진리를 아는 길은 초등학문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안에, 말씀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 있는 것”(골2:3)입니다. 중생한 그리스도인은, 오직 성령의 조명하심으로써만 참된 진리를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전제하에 성경을 통하여 성경이 말하게 하는 비밀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봅니다.

  성경이 말하게 하라

  여기서 우리는 앞에서 제시한 네 가지 특성(근대정신의 성경관, 배타적 성경 연구, 세속교육 철학의 영향, 근대후기의 이미지)들이 갖고 있는 허구를 먼저 직시해야 합니다.

  (1) 역사비평 방법은 어떻게(how),라는 헬라적 사고의 틀로 진리를 규명하고 파헤치는 작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마치 ‘어머니의 눈물이 무엇이냐’라는 물음에 물(H₂O)과 다소간의 염분(NaCI)이라는 대답만을 얻고자 하는 것과 같은 신학일 뿐입니다.

  (2) 배타적 성경 연구의 자세는 때때로 진리 수호를 위해서가 아니라, 마치 물 속에 금을 긋고 사는 은어(銀魚)들처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분열하는 교권주의적 언어의 음모입니다.

  (3) 세속 교육철학에 바탕을 둔 행위나 언어는 가끔씩 자기의 이기심, 자신의 욕망 성취를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에고이스트들이나 현세구복적 실용주의자들의 언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 그리고 근대 후기의 이미지는, 저 유명한 「이솝 우화」에 나오는 ‘포도와 여우’의 이야기에 대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탐스런 포도송이를 따먹으려고 온 힘을 다했으나 결국 포도송이를 따지 못한 여우란 놈이 체념하여 내뱉은, “저 포도는 시다.”라는 말은 모든 것에 절망한 근대 후기의 이미지와 흡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포도를 먹어 보고 시다는 사실을 안 것이 아니라, 다다를 수 없는 자신의 한계를 그렇게 변명한 것뿐이듯, 근대의 철학과 과학의 신념체계가 무너져 내리고, 그들이 신앙(信仰) 아닌 이성(理性) 위에다 전통적인 도덕과 사회를 세우려 했던 시도들이 허사로 끝나 버렸으며, 계몽주의를 떠받쳤던 한 기둥인 불가피한 진보(inevitable progress)를 믿는 믿음이 퇴색되어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계몽주의의 또 하나의 신념인 ‘지식이란 본래적으로 선한 것이다.’라는 가정이 새로운 남용의 가능성을 보여준 유전공학, 핵무기 등 파괴적인 무기들의 위협에 직면하면서 ‘지식은 선한 것’ 이라는 가정이 여지없이 허물어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근대 세계의 흔들리는 신념체계  때문에 허탈해진 시대정신을, 근대정신의 말기적 증상이라고도 하고 근대 후기로 넘어가는 징조로도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근대후기(post modern)에도 여전히 기독교는 그 지적인 면에서 적절한 응답을 갖고 있습니다. 인간의 절망이 신의 출발이듯. 모든 것이 구원의 길된, 절망적 상황에서 하나님의 존재와 필요성이 더욱 절실히 요청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절망의 언어. 아니 키에르케고르가 지적한 대로 ‘절망을 모르는 절망’의 언어로가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말씀이 더 절실한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여기서 성경에서 성경을 말하도록 하는 필요성을 요청받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책망하시는 은총

  그런데 ‘성경이 말하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앞서 언급했듯이 오직 성령의 조명하심만이 진리를 깨닫게 해준다고 할 때, 성경이 말하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에 전적으로 의지해야 합니다. 저는 이를 ‘성령의 책망하시는 은총’ 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내가 말하지 않고 성경이 말하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는 성령의 책망하시는 은총에 귀를 기울여야(to listen)만 합니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요16:8).
  ‘성령의 책망하시는 은총’, 이는 ‘말씀 앞에 진실하게 서라’는 명령입니다. 말씀 앞에 진실하게 섰을 때만 성경은 우리에게 말하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흔히 성경을 ‘읽는다’고 말합니다. 바로 이런 관점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습니다. 자기의 생각과 자기 방식대로, 그래서 얻어진 사상과 욕망의 언어로 가득 찬 메시지를, 자기 감정으로 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이 없습니다. 감동이 없습니다. 능력이 없고 확신도 없습니다. 언젠가 저는 어느 한 책임 있는 신앙인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나는 여태껏 성경에서 예수를 만나지 못했다.”라고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깊은 뜻을 제가 다 헤아릴 수는 없었지만 문자적으로만으로도 다가온 느낌이 ‘전율과 공포’였습니다.

  성경이 하는 말을 들으라

  “언어는 말한다. 말이 있기 때문에 언어가 있는 것이지 그 반대는 아니다.”(하이데거)
  한 번도 성경의 언어가 자신에게 말해 본 적이 없는 그리스도인은 성경을 소유한 것이 아닙니다. 한 번도 성경이 말을 걸어 온 적이 없는 성도를 ‘성도’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남들이 감동을 받아 적어 놓은 몇 줄의 에세이에만 의지하는 이들과 성령의 책망하시는 은총 앞에 온전히 굴복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는 은총 속에 거하는 이들과의 사이는 그 신앙의 거리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신앙의 선배 제현들게 송구스러운 고백이지만 언젠가 저는 “설교마저도 진실하게 할 수 없느냐?”라고 책망하시는 성령의 은총 앞에 철저히 굴복하여 비로소 ‘말씀의 대언자(代言者)’로 서게 되었던 축복된 체험을 기억하며 목회의 원동력으로 삼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일에는 확고부동하지만,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는 일에는 매우 인색한 신앙의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언젠가 저는 정통 알피니스트들과 높은 산을 정식으로 등반한 적이 있었습니다. 모든 장비를 철저히 갖추고 자일도 타고 나침반을 손에 든 채 독도법으로 약진하면서 산에 올랐었습니다. 지금도 그때의 고통스러웠던 일들이 기억나기도 하지만, 그 유일무이한 깊은 산행이 남긴 가장 큰 인상은, 산에 오르고 내리는 이틀 동안 우리 중 누구도 먼저 다른 이에게 말 한마디 건네느 일마저도 철저한 금기로 여겼다는 사실입니다. 무엇 때문이었겠습니까?

  묵묵히 아무 말도 주고 받지 않고 사흘 동안의 먼 산행을 침묵 속에 걸어 간 아브라함과 이삭의  모리아 산행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귀 기울여 듣는 순례자의 지혜를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거기에는 변명도 흥분도 없습니다. 그 아버지와 아들 사이엔 오직 성령의 교통하시는 언어만 뜨겁게, 불타는 순종의 언어로 오고 갔을 것입니다. “주께서, 내 주께서 그리 하라시면, 죽으라시면…….” 말씀 앞에 경건하고 진실하게 서는 용기, 그것은 신(神)의 웅변이요 인간의 침묵입니다.
  “성경이 말하게 하라!”
  “성경이 하는 말을 들으라!”
  듣고 말하십시오. 들은 것만을 말하십시오. 성령조차도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는 분” (요 16:13b) 이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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