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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의 현대적 조명과 타당성

2008.07.11 03:32

윤사무엘 조회 수:3925 추천:113


<깊은 곳에서> 2008년 8월호 기고

<성서의 현대적 조명과 타당성>

                                         윤사무엘 목사(뉴저지 감람산장로교회, Ph.D.)

                                 Geneva College, Professor of Old Testament Study


1. 시작하는 말

2008년 초에 별세한 하버드대 신학부의 신약학 교수였던 스탕달(Kristal Stendahl)은 성서신학의 두 가지 차원을 언급하면서 성서가 기록될 당시 ‘성서본문이 무엇을 뜻했는가 ?’ (what it meant)와 오늘날 우리에게 ‘성서본문이 무엇을 뜻하는가’ (what it means)로 구분했다. 즉 정확한 본문연구(meant)를 하여 오늘날 청중들에게 하나님의 메시지(means)를 전해야 하는 것이 목회자와 신학자의 사명이다. 그의 두 가지 구분은 오늘날까지 성서학에서 자주 인용되고 있다. 성서가 기록된 당시와 오늘날 이 말씀이 어떤 의미와 타당성(relevance)이 있는지에 대한 질문은 어느 시대든지 항상 존재했었다.

본 소고에서는 이 문제를 현대인과 21세기에 성서 해석학의 방향을 살펴보려고 한다


2.  몸말

성서는 처음부터 한 권으로 주어진 책이 아니라 오랜 세월동안 여러 손길을 통해 씌여진 자료들을 모아 편집하여, 정경화 작업 후 공의회에서 정경으로 확정된 책이다. 원문은 이미 존재하지 않으며 그 사본 가운데서 제일 오래된 것으로 사해사본, 수도원에서 보관하고 있는 파피루스 및 양가죽 사본들, 레닌그라드 사본 등이 있다. 그리고 이를 아람으로 번역한 탈굼역, 헬라어로 번역한 70인 역을 비롯한 여러 헬라역, 라틴으로 번역한 불가타 등이 있다. 그래서 그 해석 작업도 복잡할 수 밖에 없다.

성서학에서 크게 두가지 방향으로 성서를 이해해 왔다. 첫째는 신약과 구약의 관계성을 살피면서 신구약의 통일성을 찾는 방향이었다. 언약(계약)이란 주제로 이를 역사적으로 살피기도 하며(diachronic approach), 통전적으로 살피기도 했다(synchronic approach). 또한 비평학이 도입된 후로는 역사-문학 비평학이 주도를 했는데, 고등비평학인 본문비평, 저등비평학인 문학비평이었다가 새로운 문학 비평(New Literary Criticism)이 등장한 후 설화비평, 독자반응비평으로 본문을 입체적으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둘째는 네덜란드 신학자와 미국 칼빈신학교에서 구속의 역사(Redemptive History)로 해석하는 방향이었다. 여기서는 창세기 1-11장의 전역사(Primeval History, 원역사)를 제외하고 창세기 12장부터 계시록 22장까지를 구속의 역사로 살핀다. 죄문제를 해결을 위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선민을 통해, 메시야를 통해 이뤄짐을 살핀다. 그래서 구속사라는 용어가 설교학에까지 유행어처럼 사용되어졌다,

이런 성서학의 약점을 보완하여 목적사(Divine Purpose History)로 보아 출애굽기 5:22-23을 전후로 하나님께서 침묵을 깨뜨리시고 직접 역사에 개입하셔서, 하나님의 목적대로 역사를 주관하시고 섭리하심을 연구하는 경향도 있다.


그러나 성서에 대한 이해와 그 권위성 문제에 대해 크게 달라진 것이 없는 것이 현실이다. 오늘날 현대인에게 성서는 얼마나 중요하며 설득력 있으며 영향력이 있을까? 그리고 그 말씀이 현대 생활속에 얼마나 타당할까? 라는 질문을 염두에 두고 성서에 대해 바른 이해를 시도해보자. 성서는 66권으로 구성된 하나님의 말씀을 소개하는 거룩한 책(The Holy Bible)이다. 세상의 책과는 구별된 말씀이 기록되어 있어 구원, 예배, 성화, 선교, 십자가와 부활, 약속과 언약을 다루고 있어 크리스천에게는 매일 필용한 영적인 양식이다. 성경(聖經)은 중국성경에서 따온 것으로 사서삼경(四書三經)에서와 같이 ‘거룩한 종교적인 경전’이란 뜻이고 성서(聖書)는 영어, 일본성서에서 따온 것으로 ‘거룩한 책’이란 문학적인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한국교회에서는 성서와 성경이란 말을 혼용하는데, 아직까지 한국교회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고 있는 개역성경(1956년의 한글판, 1964년의 국한문판)의 聖經全書를 따라 성경이란 말을 선호(選好)한다. 구약성서는 세상과 인생이 창조된 이야기, 인간이 범죄한 이야기, 참된 예배의 순서 및 정신, 우상숭배와 심판, 회개운동, 하나님의 구원의 이야기 등이 소개되어 있으나 궁극적으로 예수그리스도의 오심을 예언하고 있다 (300회 이상). 신약성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사업, 구원사업, 사도들의 복음전도사역, 및 교회생활지침, 종말계시 등이 기록되어 있는데 구약성서의 약속과 예언이 성취된 것을 보여 주고 있으며, 예수님의 재림 약속을 믿고 생활하는 초대교회 성도의 윤리를 많이 배울 수 있다. 그래서 우리가 성서를 읽을 때 항상 염두해 두어야 할 것은 다음 세 가지이다.

 1.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책으로 중심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요5:39, 20:31, 눅 24:27, 27:44)

 2. 성서는 하나님의 사랑이 소개되고 있는데 창조/심판/용서/구원/메시야 약속 및 성취가 주된 내용이다 (사 41:10, 43:1, 마 22:37-40, 눅 16:29-31)

3.성서는 신앙공동체를 위한 책인 동시에 개인의 신앙에 유익한 책이다.

 마 7: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롬 13:10 “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딤후 3:16-7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경건훈련과 신앙생활에 가장 중요한 표준을 제공하며, 오늘도 살았고 운동력있는 생명의 말씀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오시고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로 나아간다.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가지고 당신의 백성들을 고치신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과 신뢰, 그리고 그 말씀에 대한 공부와 성경적 원리의 적용 없이는 교회성장을 기대할 수 없다. 그러기에 조직이나 행정 또는 신비적 방법으로 양적인 확장만을 꾀하는 것은 참다운 교회성장이라 할 수 없다. 오직 교회가 성서에 뿌리를 내리고 성서적인 원리 위에 세워질 때, 그 교회와 교인들은 성령으로 충만하여 구원받은 감격을 계속 전할 수 있어 교회가 건강하게 성장되는데 이것이 참된 교회 성장이다.


당연히 믿음은 말씀의 실천을 포함하고 있다. 창조시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셨다. 여기서 말씀이란 히브리어로 ‘다바르’(Davar)인데 말씀과 함께 그대로 이루어진 사건이란 뜻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또 헬라어로 ‘레마’(정확한 발음은 흐레마 HRema)도 실천적인 말씀이란 뜻이다. 믿음의 본질은 하나님의 뜻과 말씀과 계획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믿는 것을 말한다. 노년에 자식이 없었던 아브람에게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주실 것을 약속하시면서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 15:4-5)하시니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창 15:6, 롬 4:9, 22, 갈 3:6, 약 2:23). 지금은 눈에 보이는 것이 없어도(nothing), 하나님의 약속대로 자손이 뭇별처럼 셀 수 없이 많음(everything)을 믿는 것이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 (‘믿음의 장’)은 믿음의 정의로 시작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히 11:1) 성경의 인물들은 믿음의 사람들이다.

성서는 믿음의 책이기에 믿음의 눈으로 성서를 믿는 맘으로 읽어야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들을 수 있다. 그래서 성경을 읽기 전에 반드시 기도를 해야 하며, 또 기도하는 맘으로 읽고, 다 읽고는 묵상하며, 이 말씀을 실천해야 성경읽기가 제대로 이루어진다. 바울서신의 중심주제는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이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이신득의, 以信得義). 이것이 바울신학의 핵심이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성도들은 믿음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그래서 바울서신은 항상 교리면(Indicative 직설법)과 윤리면(Imperative 명령법)이 함께 있다. (롬 1-11 교리, 롬 12-16 윤리;  갈 1-3 교리, 갈 4-6 윤리; 엡 1-3 교리, 엡 4-6 윤리; 빌 1-2 교리, 빌 3-4 윤리 등)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을 가르치고 있다 (갈 5:6). “믿음을 겸한 사랑” (엡 6:23)을 말씀하고 있으며,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살 1:3)가 모범적인 신앙으로 소개하고 있다.

바울은 믿음을 강조하고 야고보는 행함을 강조하고 있다는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바울도 행함이 있는 믿음을 가르치며 (고전 13장, 롬 12:8-10), 야고보도 믿음이 수반된 행함을 가르치고 있다 (약 1:6-7, 2:14-26). 성서에 가르치는 믿음이란 사랑의 열매를 맺는 믿음이며 (1) 순종 (창 6:22, 22:12, 삼상 15:22, 눅 1:38, 5:5)  (2) 겸손 (사 7:9, 미 6:8)  (3) 결단 (수 24:15, 사 6:8)  (4) 헌신 (롬 12:1, 눅 7:47-50)  (5) 능력 (마 8:10, 26, 14:31, 행 3:10) (6) 회개 (눅 24:47, 행 2:38)  (7) 중생 (요 3:5, 겔 36:26-28) 등 이다. 믿음은 역사가 따르고, 사랑에는 수고가 수반되며, 소망에는 인내가 요구된다. 믿는 자는 의롭게 되고, 의롭다 하는 증거는 믿음으로 살아가며, 믿음의 경주를 성실히 마친 성도에게 하늘의 면류관이 주어진다(롬 8:29-30, 딤후 4:7).


성도들의 삶속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오며, 하나님의 영광이 묻어 나와야한다. 주일예배때만 크리스찬이 되지 말고, 풀타임 크리스찬의 모습이 중요하다. 하나님께서는 아벨과 그 제물을 열납하셨다.(창 4:4). 제물 이전에 아벨이라는 전인적인 인격, 예배적인 삶, 하나님께 향기로 드려지는 제물적인 삶이 중요하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이처럼 우리의 평소의 삶 자체가 제물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제물은 흠도 없고 티도 없고 정결하고 거룩하며 온전한 것이어야 한다. 심지어 내장에 이상이 있는지 점검하기 위해 제물이 받쳐지는 금요일 삼일전인 수요일까지 제물을 제사장에게 가지고 와서 삼일간 변을 점검한 후 내장의 건강상태, 청결상태에 합격되었을 때 금요일에 제물로 바친 것을 기억해야한다. 

미주한인교회는 제 2의 청교도의 의식을 가지고 철저히 성경말씀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 절대 순종하고, 주님의 말씀대로 교회를 세워나가서 믿음과 행동이 일치하는 생활을 해야 한다. 하나님의 교회를 흔드는 음부의 권세를 철저히 차단하고,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매순간 성화생활을 하여 하나님의 의의 병기가 되어야 한다. 2세나 1.5세 문제가 언어와 문화 문제만은 아니다. 이들에게 바른 성경, 바른 믿음, 바른 교회를 교육하면 하나님께서 이들을 인도해 주시기에 너무 염려할 것 없다.


‘생각을 심으면 행동을 거두고 행동을 심으면 습관을 거두고 습관을 심으면 성품을 거두고 성품을 심으면 운명을 거둔다.’ 사무엘 스마일스라는 사람의 말이다. 지금의 생각은 미래를 결정한다는 말이다. 지금 내 마음 이런 발자국을 남기겠다는 생각을 심어보다 결국 행동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란다. 발자국의 운명 말이다. 차세대에게 말씀으로 바른 믿음을 심으면 하나님께서 저들의 운명을 주관해 주실 것이다.


1904년과 1905년 사이에 발표된 Max Weber(1864-1920, 독일의 사회학자, 법학, 경제학, 역사학 등에도 깊은 연구를 한 학자이며, Freiburg 대학, Heidelberg 대학)의 논문  “개신교 윤리와 자본주의의 정신”에서 개신교 중에서도 특히 칼빈주의가 현대 자본주의의 기초를 이루었다고 주장한다. Weber에 의하면 캐톨릭의 전통에서는 교회를 위한 일만이 (예를 들면 신부, 수녀 등의 일만이) 성직이었지마는 개신교 윤리에서는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일을 주셨고, 각각의 사람들을 각각의 직업에 부르셨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다 소명감을 가지고 열심히 일을 해야 된다고 하였다.  Calvinism은 인간의 전적 타락을 주장하고, 따라서 인간에게는 자기 자신을 구원할 능력이 없다고 주장한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에 의해서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구원을 받도록 어떤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하도록 이미 예정을 하셨는데, 그 선택의 표준과 이유에 대해서는 질문할 자격도 권리도 인간에게는 없다고 한다. 일찍이 Milton은 "Though I may be sent to hell for it, such a God will never command my respect." (그것 때문에 나를 지옥에 보낸다고 해도, 그러한 하나님은 나로 하여금 존경하게 만들지는 결코 못할 것이다.)라고 하면서 예정론을 반대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예정론의 시비를 논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의 역사적인 과정에서의 역할을 논하고 있는 것이다. Weber에 의하면 여기에서 문제가 되었던 것은 하나님이 왜 그렇게 예정을 하셨느냐는 것이 아니고, 문제는 내가 구원을 받도록 예정이 되어 있는지 않는지에 대한 psychic insecurity(심령적 불안정), psychic anxiety(심령적 불안)였다는 것이다. Weber에 의하면 부자를 포함한 모든 사람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열심히 일을 해야 되고 여기에서 생긴 부는 절제에 의해서 낭비하지 않고 저축을 해야 되는데, 사람이 이렇게 해서 저축을 하면 그 저축된 부는 그 사람이 구원으로 예정되었다는 표시가 된다는 것을 Calvinism이 주장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렇게 해서 축적된 부가 현대 자본주의의 기초가 되었다는 것이 Weber의 주장이다. Calvinism의 영향이 강한 미국에서 노동과 돈을 존중하고 자본주의를 존중하는 것은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 때문인 것이다.

저명한 신학자인 레인홀드 니버 (Reinhold Niebuhr)는 설파한다. “우리가 우려해야 할 대상은 ‘악한 사람들 (bad people)’이 아니라 ‘선한 사람들 (good people)’이다. 그 ‘선한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정의로움을 너무나 확신하는 나머지, 그들 자신도 악이 될 소지가 있다는 것을 전혀 생각치 못한다. 우리가 참으로 우려해야 할 사람들은 바로 이같은 사람들이다.”고 했다. 성서에 일관되게 나타나는‘하나님 뜻’이 무엇인가? 한 마디로 ‘사랑’이다. 사랑(Ahava, Agape)은 성서의 알파요 오메가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은 온 성서의 요약이다.

사랑은 이단사이비를 가려낼 때 척도가 되며, 가짜 진짜를 판가름할 때 잣대가 되며, 자신의 신앙을 점검하는 온도계 역할을 한다. 말씀 속에 변화받는 사람은 사랑의 사도이다.


이렇게 보면 성서는 오늘날 현실 생활에서 여전히 중요하고 생명력이 넘치는 말씀이다. 달고 오묘한 생명의 말씀인 성서를 더욱 사랑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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