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예수 빼고 놀기

2007.11.03 11:48

김성찬 조회 수:5053 추천:164

예수빼고 놀기 - 요21장 명상
  
                    
탄일종이 울리던 어느 겨울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십이, 삼 년 전의 일입니다. 나는 그때, 광화문을 돌아 사직터널을 지나는 버스에 타고 있었습니다. 미처 자리도 잡지 못한 상황에 황급히 버스가 출발했기에 나는 뒤뚱거리다 그만, 엉겁결에 한 좌석에 주저앉게 되었었습니다. 순간 연한 알콜 내음이 풍겨났습니다. 한 청년이 거기 같은 좌석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습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그때만 해도 지금보다는 더 순수한 마음과 열정이 있었던지, 누구라도 마주하게 되면 예수를 전하고 싶은 열망으로 꽉 차 있었던 가 봅니다. 어떻게 말을 붙여보나 망설이고 있는데, 그 청년이 몸을 뒤척거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한잔하셨군요?"
이렇게 건낸 말 한마디가 도화선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내 대화를 시작했고, 그 대화는 거두절미하고 신앙에 대한 이야기로 발전되어 갔습니다. 몇 마디를 주고받던 사이 버스가 사직공원 앞에 정차하는가 하는 순간 우리는 그 버스 안에서 공 튀듯 튀어 나왔습니다. 누가 먼저랄 것이 없이 의기투합된 도원의 결의라도 할양으로 그런 일을 결행한 것입니다. 깊어가던 세밑 차가운 밤, 싸늘한 바람이 우리의 옷깃을 추스리게 했지만 우리는 삶과 죽음, 그리고 영생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서로가 서로에게 쏟아 부었습니다. 그러다가 한순간 답답해지던 가슴.  그 청년은 나에게 이렇게 반문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면 됐지, 예수를 굳이 끼어 넣을 필요가 어디 있느냐고? 마호멧도, 예수도 다 빼버리고, 하나님으로 직통하면 상호 공존의 그늘이 조성되지 않겠느냐고? 그렇게 하자고 꼭 좀 그렇게 하자고" 그 청년은 너무도 심각하게 너무도 간절하게 나에게 호소해왔던 것입니다. 그것이 진심이라 느끼게 된 것은  그가 차츰 술기운에서 벗어나고 있었고, 그의 초롱한 눈빛이 별빛 아래서 유난히도 빛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헤어졌습니다.

그 후에도 나는 광화문을 돌아서 사직터널로 빠져 무악재를 넘는 버스에 자주도 몸을 실었고, 그때마다 그 청년의 간절한 호소를 기억해 내곤 했습니다.

"마호멧도, 예수도 빼버리고 하나님만!"

나는 그 후로 그 청년을 다시 만나보지 못했었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발생한 것입니다. 그 청년의 그 절규가 파편처럼 내 가슴에 와 박힌 것입니다.

모태신앙으로 인하여, '오직 예수 이름으로만!' 살아왔던 나에게 그 청년의 간절한 호소가 좀체 가시지 않는 분노와 갈등으로 내 가슴에 자리 잡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분노했던 것은, 그 청년의 '오직 예수 이름으로만?'이라는 비아냥에 '예수 이름으로만!!'이라고 설득할 수 없었던  나의 부족한 신앙변증이었다면, 다른 한편으로 더 문제가 된 것은 '예수도 말고, 마호멧도 말고 오직 하나님만!'이라는 그의 호소가 나의 신앙의 기반을 조용히 흔들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에 적이 당황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부담스러워하고 있었습니다. 내 속사람이. 난생처음으로.

"그래! 하나님이면 됐지, 하나님이면!" 이런 말이 자꾸만 생각 키워 졌었습니다. 그 청년과의 만남 이후로 나의 번민은 계속되어 갔지만, 나는 나의 신앙의 유산, 그 전통에서 한 걸음도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내가 말을 배우기도 전에 익혔던 찬송. 내가 늘 예수 이름으로  먹었던 그 맛난 꽁보리 밥 속에 계셨던 그분 예수를 부인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율배반적인 삶이 한동안 계속되어 갔습니다. 그렇다고 이런 번민을 그 누구에게도 토로할 수 없었습니다. 뭔가 물어 본다는 것은 신앙모범생으로 자처했던 나의 자존심이 결코 허락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왜 예수여야만 하는가?" 계속되던 번뇌를 안고 방황을 하다가, 어느 금요일 밤 나는....

불화덩어리(?) 예수

그런데 오늘 '90년대에 들어 서면서,우리 사회는 종교적으로 내가 이전에 겪었던 그 풍랑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물론 '오직 예수 이름으로만'에 대한  회의가 어느 시대에나 있었고, 앞으로도 끊임없이 계속될 문제이지만, 특히나 이 시기가 이 문제로 더욱 큰 곤혹을 치루고 있는 듯해 보입니다. 그러니까 한국교회사적으로 볼 때  '70년대를 민중 신학, '80년대를  통일신학, '90년대를 종교다원주의 신학의 시대라고 구분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더 더욱 그러 합니다. 이 시기 '90년대가 달리 표현하면 대표적으로 '예수'를 부담스러워하는 시대라는 말입니다. 마치  이 한 사람 - 예수만  빠지면, 이 지구촌 주민들이 태평성대를 누리게 될 것들처럼 '예수 몰아내기'에 혈안이 된 듯 보입니다. 화평케 하는 자(peace-maker)로 오신 예수께서 불화덩어리(trouble-maker)로 전락한 천덕꾸러기가 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 빼고 놀자!"는 구호가 만발한 시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 빼고 놀기

그래, 속 시원하게 우리의 사전에서  예수를 한번 빼내봅시다. 엄밀히 말하자면, 종교 다원주의라는 말이 의도하는 음모는 '예수하고도 같이 놀자'라는 의미보다는, '예수만 빼고 놀자'라는 의미가 더 깊이 감추어져 있는 것만 같습니다. 19세기를 시작으로 '예수 나누기'(분석하고, 쪼개기)에 혈안 된 세계가, 이제 그 분석과 해부로도 도려낼 수 없는 '오직 예수!' 신앙을 아예, 송두리째 제해(-) 버리자는 음모를 전개하고 있는 것 입니다. 그래 엉거주춤 하지 말고, 양 다리 걸치지 말고 예수를 한번 빼내 봅시다. 톡 까놓고, 솔직하게. 그래서 예수 없는 항해를 시도해 봅시다. 자, 소망의 닻을 올리십시오. 힘찬 항해를 합시다.

어떤 항해

한번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항해를 하고 있었습니다.
큰 바다도 아니고, 작은 호수에서 말입니다. 그들은 모처럼 예수 없는 항해에 긴장과 모험을 즐기게 된 것입니다. 누구나 '선장 예수'가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그들은 맞게 되었던 것입니다. 특히나 베드로가 그랬습니다. 자기 혼자만이 아니라 작당을 해가지고 '고기나 잡으러 가' 버렸던 것입니다. 예수 빼기의 삶을 실천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21장의 사건입니다. 그들은 부활의 주님을 만났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를 따르지 않았습니다.

19 세기의 자유주의 신학이 공헌한 최대의 일은 '역사적 예수(historical Jesus)'의 발견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의 후예들은 이제 그 '역사적 예수'에 시비를 걸면서 이젠, 예수의 제자들처럼 어리석게도 예수빼고 놀기를 시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어 집니다. 예수 빼고 놀기를 결행한 제자들의 갈릴리의 항해는 모든 것이 헛수고였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 처음 예수를 만난 베드로가 거의 6개월여 동안이나 예수 밖에 살다가, 헛된 수고의 그물질을 해대면서 밤이 맞도록 수고한 누가복음 5장의 사건을 그는 여기서 어리석게도 다시 재현하고만 것입니다. 그 후로 세상에는, 이러한 베드로의 교훈을 망각한 일들이 역사를 통해 꼬리를 물고 일어났습니다. 그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한마디로 어부 베드로처럼 그물질하는 기술은 현란하지만 거기엔 소득 없다는 것입니다.

" ? " 냐, " ! " 냐

마찬가지로 학문하는 기술과 방법은 예리하고, 논리적인데 거기에 생명이 없다는 것 입니다. 예수 없이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오늘도 바벨탑 쌓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까?

요즘 각광을 받고 있는 책들은  예수만 빼버리면 이 땅에 화해와 일치의 파라다이스가 건설 된다고 강조하고 있으며, 그런 책들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대표적인 책이 이런 노골적인 음모를 제목에서부터 드러내고 있는 '오직 예수 이름으로만?(No Other Names?)'입니다. "예수 이름 외에 구원 받을 다른 이름이 있는가?"라고 묻는 니터(Paul F.Knitter)는 그의 비범한 철저성과 공정성(?), 그리고 논리적 명료성을 가지고 다른 종교들과 그리스도교의 관계에 대한 그리스도교 내부의 연구와 토론을 조사, 정리하여 창조적 신학을 전개하였고, 그의 이 진지한 작업이 그리스도교적 신학의 토론에 기여하는 부정할 수 없는 공헌을 한 것이라고 그 책의 번역자는 찬사를 보내고 있습니다. 부정할 수 없는 공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니터는 자신의 결론을 이렇게 말합니다.

"성육신은 한 시대의 사건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모든 것을 위한 이상이고 하나님의 한 보편적인 로고스 혹은 지혜에 대한 고대 기독교 신앙에 기초를 둔 이상이었다."  "최소한 우리는 예수 안에 발생하였던 것은 다른 곳에서도 발생하였거나 발생할 수 있다는 가능성 또는 개연성까지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거슬러 올라가서 그의 스승 가톨릭의 신학자 칼 라너(Karl Rahner)는 이렇게 자신의 신학의 출발점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전 인류를 구원하려는 의지를 갖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기독교 밖의 구원의 가능성이 아무리 적고 또 오류가 많다고 할지라도 구원의 가능성을 낙관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그리스도교적 관점에서 볼 때 그리스도의 은혜는 제한될 수 없다. 하나님은 인간의 본성이나 교회보다 크다." 이러한 관점에서 '익명의 그리스도인(anonymen Christen)'의 논리가 전개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1960년대 초 이후, 세계 종교들 사이의 일치를 주창하며 이른바 '범세계적 일치운동(ecumenical ecumenism)을 역설해온 파니카(Raimundo Panikkar)는 '예수는 그리스도이다'라는 명제와 '그리스도는 예수다'라는 명제를 동일시하지 않습니다. 무슨말인고 하니 그는 전자는 사실이 아니고, 후자만이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신, 인간, 우주의 전체성에 대한 살아 있는 실재요 동시에 그 역동적인 통일성에 대한 상징이자 본질입니다. 그리스도는 '아들이신  하나님, 로고스'와 동의어입니다. 즉 그리스도는 모든 종교의 절대자라는 것입니다. 그는 그리스도가 나사렛 예수 안에서 성육신되었다는 것을 긍정합니다. 그러나 다시 말해서 그 성육신이 나사렛 예수 안에서만 유일하게, 궁극적으로, 최종적으로 발생했다는 사실을 거부한다는 것입니다.

이상에 인용된 내용들은 그 책이 소개하거나, 니터 자신이 주장하는 신학적 입장들의 편린들입니다. 결국 그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을 얻는 길은 다양하다. 모든 종교는 상대적이고,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회성, 예수는 과연 역사의 종교적 인물들 중에 유일회적인가?에 의문을 제기 하면서 이렇게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예수 이름으로만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다."

수단(학문)과 본질(신앙)

그러나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영생에 이르는 학문은 수단이나, 신앙은 본질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수단이 오묘하고 현란한 것이라면 본질은 단순한 것입니다. 수단(상황)은 값싼 휴머니티를 강조하지만, 본질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케 하고 너희는 나를 좇으라(마8:22)"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수단(상황)은 번잡하고, 말씀마다 그럴듯한  해석을 구구절절이 덧붙이지만, 본질은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가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얻음이라(행4:12)," 이렇게 간단  명료한 것입니다.   "?"이 아닙니다. "!"입니다.

주 예수를 깊이 아는 ...

다시 십여 년 전,  "왜 예수여야만 하는가?"  계속되던 번뇌를 안고 방황을 하던  어느 금요일 밤 나는.  시내 모 교회 철야기도회엘 참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한참 충만해지던 찬송의 열기 속에 이 찬송 저 찬송을 계속 불러가던 중 200장(주의 피로 이룬 샘물) 찬송을  불렀던 순간 입니다.  모두 힘차게 이 찬송을 부르는데, 3절 가사를 부르는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어떤 깊은 확신이 임하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주예수를 깊이 아는 놀라운 그 은혜.. "
"주예수를 깊이 아는 놀라운 그 은혜..."

왠지 모르게 자꾸만 되뇌어지던 구절. 뜨거워진 가슴, 흐르던 눈물. 그 순간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 곳에서 작은 탄성이 울려 나왔던 것입니다.

"그래! 이거야, 이거! 주예수를 깊이 안다는 것은   놀라운 그 은혜야! 놀라운 그 은혜!" 나는 무릎을 쳤습니다. 진리를 발견한 기쁨이 날 춤추게 했습니다."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엡2:8)."

거기에 논리도, 학문적 이론도 필요 없었습니다. 아니 인간의 힘으로 다 설명할 수 없기에 그것이 은혜며, 그 은혜를 나에게도 주셨다는데 말할 수없는 감격이 용솟음침을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상하게도, 신비하게도 그날 이후로 나는 지금까지 오직예수 이름으로만 얻게 되는 구원을 단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게 되었습니다. 아니 그 사실을 의심한다는 사실조차도 상상해 보지 못하는 오직예수의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나는 지금도 이해 할 수 없습니다. 강의실에서도, 정갈한 도서실에서도 깨달아 알 수 없었던 진리가, 그 초라한 교회당 칙칙한 철야기도실에서 깨닫게 되었는가를. 그리고 단 한 소절의 찬양이 어떻게 나를 180도 변화 시켰는지를. 그 이전에도 평생을 듣고, 읽어서 알고는 있었던 오직예수, 그의 은혜의 비밀에 대한 상식으로도 해결할 수 없었던 신비를 말입니다. 이것이 나의 올더스케잇이었습니다.

끝으로, 나는 성탄의 신비에 대해 설교한 한 목회자의 권면을 선물하고자 합니다. 크리스마스 찬송시 '오 베들레헴 작은 고을(O little town of Bethlehem)'을 남기고 간, 강단의 왕자 필립스 부룩스(Phillips Brooks)는 그의 대표적 설교중 하나인 '크리스마스'에서 "우리의 의지는 '지금 그에게로 가자'는 단 하나의 강력한 결심으로 꽉 차 있습니다. 우리들이 할 수 있는 대로 그리스도에 관해 깊이 생각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어떤 섬세한 생각이나 깊은 명상으로 말미암아 우리 영혼의 유일한 구세주이신 주님께 향한 최초의 강한 열망이 둔화되거나 무감각해지지 않도록 주의 합시다...크리스마스는 우리들의 영혼이 주님께 나아가도록 허용합니다. 우리들이 우리들의 영혼으로 하여금 주님께 나아가게 한다면 우리들의 영혼은 구세주를 발견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