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종교다원주의 - 모든 것이 길된 절망

2007.11.03 12:03

김성찬 조회 수:1126 추천:50

현란한 설악(雪岳), 그 가을 숲은 실로 아름다웠습니다. 만산 홍엽으로 물든 단풍나무 숲을 헤치고 들어서자, 연분홍 빛 물보라가 일고, 풍진에 찌든 속살과 파리한 영혼이 그 산 기운에 소생하고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저절로 터져 나오는 찬양. 깊은 산 속에 칩거한 우리 일행이 하루 하루를 마냥 즐겁고 값지게 보내고 있었는데-.

하늘이 무릎 만치 내려앉고, 대기에 습기가 충만하여 우중충했던 셋째 날. 우리는 감당키 어려운 위기에 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걷는 시간만 무려 13시간이라고 하는 ‘오색 약수-대청봉-비선대’ 코스를 등반 목표로 삼아, 새벽 5시부터 단잠을 설쳐 가면서, 우리 일행 중 일부인 용기 충천한 알피니스트(?)들 열대여섯명이 험한 산행을 감행하였던 것입니다.  男. 女. 老. 少 두루 구색을 갖추어서 말입니다.

그런데 오후 4시쯤이면 하산하게 될 것이라는 호언을 뒤로하고 산행을 감행한 이들을, 일찍이 땅거미가 깃들이기 시작한 산자락에서 그들을 기다리던 우리들은, 그만 깊고 험한 산 속에서 사분 오열되어 각개 약진으로 일관한 그 일행들이 벌이는 숨가쁜 숨바꼭질의 포로가 되어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수동태로. 시간이 갈수록 더 심각하게. 오후 3시경쯤 되어서야 겨우 그 일행중 단 두사람만이 뭔가에 쫓기듯, 불길한 예감을 몰고 내려 왔을 뿐이었습니다.

함께 산행(山行)을 감행했던 이들 중 일부가 낙오되어 조난의 위기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첫 두사람이 하산한 이후 무려 두 시간이나 지난 시각, 짙어진 어둠 속에서였습니다.

        한 사람이 있었네/사십이점일구오 킬로미터를 단숨에 뛰어
        죽음으로 핀 아테네의 전령처럼/
        하늘이 거꾸로 돌고 한 입 거품 이는 줄달음으로
        SOS/우리는 살아 있다/구원을 요청하는 황급한 목소리

를 접하고 난 후였습니다. “연로하신 한 분 목사님께서 주저앉으셨습니다. 그들에게 우의(雨衣/)도,랜턴도 없습니다. 그들이 만일 양폭산장까지 이 어둠이 내리기 전에 도착하지 못했다면 아마도 그들은---.”

깊은 가을산 어둠은, 그 위용을 더해 가고 시린 가을 비는,촉촉이 절망으로 젖어 들었습니다. 산(山)은 산(山)이었습니다. 그렇게도 곱고 아름답던 설악이 절벽으로,절망의 늪으로다가 왔습니다. 수식어가 필요 없이 산은 산이었습니다. 사람은 사람이었습니다. 천하를 호령한다지만 대자연의 위용 앞에 발가벗고 떨고 선 사람은 사람이었습니다.

       길을 잃었네
       깊고 푸른 설악(雪岳) 비 내리는 가을 숲
       산도 그대로요 길도 여전했으나
       향방 없이 휘날리는 바람 끝 한 점 티끌 되어
       우리는 길을 잃었네

       힘을 잃었네
       모두가 길된 절망
       산이 산으로 다가오는 외경(畏敬)
       무한(無限) 칠흑 바다 장엄한 설악 천길 벼랑 앞에서
       무너져 내린 육신
       녹아 내리던 마음
       우리는 힘을 잃었네
      
        - 後略-
        - 本人의 拙詩 ‘산보다 더 큰 산들에게 드리는’ 중에서 -


모든 것이 길된 절망

단풍나무숲을 향하여 난 외길(유일한 길(the Way))은 어둠이 짙어지자 시야에서 사라지고 사방은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칠흑 바다로 변하며 모든 것이 길(a way)로 변하고 있었습니다. 어디로든 갈 수 있으나 그 어디도 길이 아닌 절망. 모두가 길 같으나 길이 아닌 길. 그렇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의 영적 현실입니다.시대의 영적 어둠이 모든 것이(구원의) 길 인양하여 우리를 미혹하듯 우리는 지금 ‘모든 것이 길된 절망’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네 남편을 불러오라.”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모든 이가 남편된 절망.
모든 것이 길된 절망.

󰡔 이 시대의 어둠(세속화)은 우리의 신앙의 기초를 송두리째 잡아 흔들고 있다.이른바 사회 결정론 또는 상대주의가 그 원인 중 하나이다. 상대주의는 모든 신념 종교적 신념을 포함하여 역사 안에서 형성된 것이기에,절대적인 것이 거부되는 것이다. 모든 것이 상대적이어서 절대성과 그의 수반되는 신성성의 베일을 벗겨 버리는 것이다./진리 또한 인식 주체들의 공동체에 따라 상대적이기 때문에 모든 지식은 불완전하며 언제나 말할 수 있는 그 이상이 있다.(밀러(J.B.Miller))/

하나님은 오직 기독교인들의 기도만을 들으시는 기독교인만의 하나님은 아니다.(변선환)/신앙의 모든 개별적인 강과 개천은 단 하나의 큰 저수지로 통한다.(라쉬케(Carl Raschke))/ 이런 종교들은 앞으로 공존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좀 더 밀접하게 접근하기를 힘써야 하고 공동의 삶과 공동 행동에 의해 궁극적으로 하나인 절대자(the One)-이 절대자의 이름은 각 종교마다 서로 다르지만-에 대한 충성(Commitment)을 드러내 보여야 한다. 아직 어떤 신앙도 궁극적으로 하나인 절대자에 대한 완전한 이해에 도달해 본 적은 없다.(맥쿼리(John Macquarrie))/

그리스도교는 서구 종교,불교는 동남 아시아 종교,이슬람교는 중근동 지역의 종교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제는 현실에 맞지 않는다. 사람들은 도처에 흩어져 산다. 캄보디아에는 원주민 출신 장로 교인이 있고,미국에는 삼대 째의 불교 신자가 있으며, 카브리 해변에는 힌두교 사원이 있다. 게토(ghetto)화된 종교들-살아남기 위해 각자의 고립적 요소에 의지해 온-은 사라져 가고 있다. 종교 다원 주의는 기정 사실화된 엄연한 현실이다.(하비 콕스(Harvey Cox))/

하나님 나라가 온전히 실현되어 믿음의 주께서 만유 가운데 영광으로 드러내실 때까지는 하나님의 동산인 이 우주에는 다양한 꽃들이 피어나게 허락하실 것이다. 꽃밭의 꽃이 다양한 것은 정원사의 무능의 표시가 아니라 오히려 그의 솜씨의 표징일 것이기 때문이다.(김경재)/

근대 후기가 어떠하리라고 정확하게 예측할 수 없다. 이 시대는 세속화가 만연하고, 종교가 몰락해 가는 대신 종교가 부흥하고 성스런 측면이 복귀하는 시대라는 것이다. 현대 신학의 과제가 종교가 쇠퇴하는 시대에 있어서의 신앙의 사수였다면 근대 후기 신학의 과제는 종교가 사라지기 때문이 아니라 새롭게 등장하기 때문에 가장 심각한 문제들이 제기되는 시대에서 그리스도교의 메시지를 해석하는 것이다.(하비 콕스(Harvey Cox))󰡕              

서구 문명의 세계관이 근본적인 전환을 맞고 있으며,새롭게 등장한 세계관의 주요 구성 요소들이 바로 이전 시대,즉 근대시대의 관점과는 날카로운 대조를 보이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예를 들면 “가장 근원적이요 가장 포괄적이며,창조 작업에 있어서 그 누구보다도 중요한 참여자가 하나님이심은 틀림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만이 유일한 창조 행위자인 것은 아니다”라는 식입니다. 철학과 과학과 신학이 갈 때까지 갔다가 길 잃은 절망의 형국이 아닌가 싶습니다.

     한때는 선지자의 예언처럼 고독했던 그러한 절망이
     이제는 도처에서 천방지축으로 장미처럼 요란하게 꽃피고 있는 시대
                
                                                     -이형기, 전천후 산성비에서

     모든 것이 길된 절망, 절망의 만성화엔 묵시론적 비전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촌놈의 종교

우리는 우리의 신앙 중심에서 예수를 내몰고, 다양한 구원의 길을 말하면서 새롭게 등장하는 종교(견해)를 가만히 앉아서 환영할 수만은 없습니다.한때 자유주의 신학에 대해 성경적 입장에 서서 타당한 질문을 제기했고 각종 전파 매체,문서 등을 통해 우리가 지켜야 할 성경적 기본 진리들을 널리 알리는데 성공하여 자유주의 신학의 몰락에 크게 기여했던 복음주의는 이제 ‘모든 것이 길된 절망’에서 이 시대를 구원해야 할 엄숙한 사명을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하비 콕스는 “계몽주의 후예들이 한때, 교회의 몰락의 징조를 보고 이는 무지와 맹신으로부터의 해방이라고 기뻐하였고,신학자들은 ‘신의 죽음’의 의미를 깊이 숙고하기도 했으나 오늘은 종교가 현대 사회로 되돌아 왔는데 그 까닭은 촌놈 종교의 부흥”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촌놈 종교’, 이는 다른 말로 표현하면 ‘성경대로의 종교’라는 말인 것입니다. 현대성의 의미에는 걸맞지 않은 입장이라는 것입니다. 근본주의,복음주의,보수주의자들의 칙칙하고 답답한 종교라는 말입니다.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눅24:43).” 그렇습니다. ‘촌놈 종교’는 성경을 풀어 주실 때 마음이 뜨거워진 이들의 종교입니다. ‘그리스도교 제국주의’라는 말로 계속적인 비난의 대상이 된 서구 사회가 아닌 ‘촌놈’(redneck:흑인이나 유색 인종들의 별명으로 사용되고 있는), 우리 한국 복음주의자들의 신앙고백이 이 시대의 절망을 극복케 해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