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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신학의 준거틀

2008.03.17 08:25

윤사무엘 조회 수:1327 추천:43

"한국신학의 준거틀“ (The Frame of Reference of Korean Theology)

                                               윤사무엘 (감람산장로교회)

     신학(神學)이란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聖書)를 철학적(哲學的)으로 해석(解釋)하고 변호(辯護)하고 조직(組織)하여서 학문적 체계(體系)를 세운 것이다. 따라서 신학은 시대(時代)와 환경(環境)과 시대상황(social ethos)에 따라 체계화(體系化)해왔고 오늘날도 새롭게 수립(樹立)할 수가 있다. 최초의 기독교 신학자는 바울이라고 할 수 있다. 로마서, 갈라디아서를 위시(爲始)한 바울서신(書信, Pauline Epistles)에서 바울의 신학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예수의 교훈을 이중문화권(二重文化圈)인 헬라권 문명 속에서 재해석(再解釋)하여 토착화시켰다.

     바울 후에도 초대교부(初代敎父)를 비롯한 많은 기독교 사상가와 목회자들에 의해 신학은 발전(發展)되고 변천(變遷)되어져 왔다. 고대기독교 때에는 어거스틴, 중세시대에는 토마스 아퀴나스, 교회개혁시대에는 마틴 루터와 요한 칼빈같은 분이 신학을 꾸준히 발전시켰다. 교회개혁 후에는 영국의 자연주의(自然主義)와 대륙(大陸)의 합리주의(合理主義)의 영향(影響)을 받아 자유주의 신학이 나오게 되었다. 쉬라이어마허(Schleiermacher)나 리츨(Ritschl)등 19세기에 자유주의신학이 연구되다가 1차세계대전(世界大戰)이 발발(勃發)한 후 칼 바르트(Karl Barth)가 나와서 말씀중심의 변증법적 신학(辨證法的 神學)과 위기신학(危機神學)을 주창(主唱)하였다. 그의 신학을 신정통주의(新正統主義 Neo-Orthodox)라고 부른다.

     2차 세계대전을 전후해서 불트만(R. Bultmann)같은 학자가 실존신학을, 60년대의 몰트만(J. Moltmann)은 희망의 신학, 떼아르드 샤르댕(T. de Chardin)의 오메가 포인트 신학, 정치신학, 70년대 남미의 해방신학, 한국의 민중신학, 80년대 미국의 여성신학, 생태계 및 환경신학, 영성신학 등, 90년대 현대후기신학(Post Modernism, Post Ideology, 포스트 산업사회등), 종교다원주의(宗敎多元主義)의 연구는 계속되고 있다.  이런 세계신학 동향 속에서 한국 교회는 세계에 무슨 신학을 내어놓아야 하는가 ?  세계 교계가 한국신학을 주시하고 있다.


      1. 토착화(土着化) 신학의 필요성

     필자는 선교학적(宣敎學的)으로 한국신학에 대해 오랫동안 계속 관심(關心)을 가져왔다. 피(被)선교국에 지속적(持續的)인 교회성장과 교인양육(敎人養育)을 위해서는 반드시 그 나라에 걸맞는 신학이 나와야 한다. 아예 선교를 시작할 때에 선교 받을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잘 연구하여 복음에 대한 오해(誤解)가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 우리나라에 복음을 심어준 선교사들은 한국신학 수립에 얼마나 많은 관심(關心)을 가졌을까 ? 내가 신학을 배웠을 때만해도 여기에 대해 무관심했다. 그래서 한국신학은 우리 한국인이 체계화해서 서구에 가르쳐 주어야 한다. 사도 바울의 선교정책도 바로 토착화(土着化, Indigenization)에 있었다.      토착화 논쟁에 대해 다음 자료를 참고하라. 이장식, “그리스도교 토착화는 역사적 과업,” 기독교사상, 제66권 (1963. 6); 이종성, “기독교 토착론에 대한 신학적 고찰,” 기독교사상, 제 70호 (1963. 11); 윤성범, “한국적 신학,” 기독교사상, 제 160권 (1970. 11); 유동식, 기독교의 토착화론 (서울:대한기독교서회, 1978); 한국의 신학사상, 기독교사상 편집부 편 (서울:대한기독교서회, 1983); 김경제, 한국문화신학 (서울:한국신학연구소, 1983). 김광식, “토착화 재론,” 한국신학연구소편, 신학사상, 제 45집 (1984); 유동식, 한국신학의 광맥 (서울:전망사, 1986); 이보철, “국악과 찬송가의 토착화”, 기독교사상, 429호, (1994. 9), pp. 53-62.
그는 가는 곳마다 그 지방의 문화(文化)와 풍습(風習), 사상(思想)을 고려해서 복음을 가장 효율적(效率的)으로 전파하려 노력했다. 가령 고린도전서 9:20-23에 보니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는 자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
   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
   코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 하고자 함이라”
고 쓰고 있다.

     유동식교수에 의하면 토착화는 “복음이 일정한 문화적 환경의 고유성을 인정하고 이에 적용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적응하면서도 그 현실에 도전하여 새로운 삶을 창조해 나가는데 복음의 토착화의 의미가 있다”고 언급했다.      유동식, 기독교의 토착화론, p. 68.
복음의 본질은 결코 변화되어서는 안된다. 단지 복음이 길가, 돌짝밭, 가시덤불 혹은 옥토 등 (마 13:3-9) 어느 환경(環境)에 뿌려지느냐에 따라 선교전략(宣敎戰略)을 수립해야 한다. 복음이 잘 뿌리내리도록 그 나라의 역사, 사상, 문화, 분위기를 잘 연구해야 한다.
  

     2. 한국신학의 필요성

     세계문화사(世界文化史)의 발원지(發源地)는 서구(西歐)라기 보다는 동양(東洋)이다. 세계4대 문명이 모두 동양권에 있지 않는가 ?  동양문화가 서양문화보다 훨씬 심오(深奧)하다. 본래 문화의 빛이 동양에 있었는데 이 광채(光彩)이 서양에 갔다가 이제 동양으로 돌아왔다. 복음선교사(史)를 보면, 지중해 시대에서 대서양시대에서 이제 태평양시대로 왔다. 과거에는 서양신학을 가지고 동양을 선교했지만 그 성과(成果)는 매우 적었다. 비근(卑近)한 예로 우리나라에서 10년 전부터 서구선교사를 더 이상 ‘선교사’라고 부르지 않고 ‘선교동역자’(Mission co-worker)라고 부른다. 이제 한국교회에 선교사의 영향은 거의 없다.  중국에서는 한때 미국선교사들이 8000명까지 있었으나 1979년 이후 선교사가 없이도 교회와 신학교가 활발히 재건되며 지금도 놀라운 속도로 복음이 전파되고 있지 않는가 ? 인도지역도 인도사람들에 의해 복음이 활발하게 전파되고 있다고 한다. 중국이나 인도, 인도네시아 같이 많은 인구를 가진 나라일수록 서구신학이 들어갈 자리가 없다. 동양 문화의 중심지였던 중국은 일찍부터 기독교를 토착화 하는 운동(accomodation, adaptation)있어 왔고, 현재 삼자교회도 외세를 배제한 토착적인 교회를 이루자는 정신이 밑바닥에 깔려 있다. 인도교회도 토착 음악을 예배에 과감히 도입하였으며, 일본에서도 토착화 운동이 여러 형태로 시도 되었다 (음악, 의식, 무교회 운동 등). 이제 10/40 윈도우(window) 선교를 위해서라도  우리는 보다 깊은 동양의 신학을 수립(樹立)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 한국민족에게 120년 전 복음의 씨앗을 심어주셔서 하나님의 은혜로 한국 땅에 교회가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 지난날동안 많은 악조건 속에서도 기독교 교회는 자라왔다. 앞으로 우리 나라의 교회가 계속 성장되고 제대로 양육되기 위해서는 서구신학(西歐神學)만 수입(輸入)해서는 안 된다. 한계(限界)가 이미 드러났다. 이제 2세기를 맞이하는 한국교회는 우리에게 맞는 옷을 찾아야 할 때이다. 한국교회는 세계적으로 성장했지만 세계에 내놓을 신학은 민중신학(MinJung Theology) 이다. 미국 교수를 만나 이야기 해보니 한국에는 민중신학만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과연 민중신학만이 우리의 신학인가 ? 우리 나라의 모든 교회와 신학이 민중신학에 움직이는가 ? 그렇지 않다. 민중신학은 한국신학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 이미 실천신학 분야에서는 한국교계가 세계적으로 공헌하고 있는 것이 많다. 부흥회 신학, 기도운동, 성령운동, 영성운동, 전도폭발, 심방학 등 들수 있다. 성서신학분야에서는 매년 11월에 개최되는 미국성서학회(Society of Biblical Society)에서 발표되는 한국 학자들의 논문들과 한국 국내 구약, 신약성서학계의 논문들에서 볼 수 있지만 서구의 내용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이제 서양 학자들의 연구를 답습하는 수준에서 벗어나 보다 한국적이며 창의적인 연구가 많이 나와야 겠다. 조직신학 분야에서는 지난 20년간 한국신학과 토착화 신학 부분에 많은 연구가 진전되어 오고 있다.      다음 홈페이지를 참고하라. www.theologia.pe.kr (허호익 교수)
이를 잘 정리하여 영문, 독일어, 일본어, 중국어, 스페인어로 번역하여 세계에 소개할 일이 남아 있다. 역사신학 방면에서 한국 교회사 분야에 많은 연구가 진전되고 있다. 특히 한국교회의 경건 인물들과 교회의 역사를 역시 세계에 소개하기 위해 번역을 해야 한다.

     서구신학은 한계(限界)에 다다른지 오래된다. 서구신학교의 교수들은 동양사상에 관심을 많이 가지며, 비교종교학 같은 학문을 통하여 동양에서 무엇인가 새로운 신학틀을 배워보겠다고 노력하는 이들이 날로 늘어가고 있다. 한국학생들로부터 한국적 신학틀을 발표하라고 주문하며, 그런 방향의 논문을 쓰도록 권장하고 있다.      하버드 신학부의 하비 콕스, 보스톤대학의 앤더슨, 호레이스 알렌, 올슨, 프린스톤신학교의 사켄펠드, 밀러, 시아오, 클레어몬트의 캅스 등 부지기 수이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에도 토착화 논의가 꾸준히 있어왔다. 감리교의 최병헌(崔炳憲)의 종교변증론을 효시(嚆矢)로      최병헌의 종교변증론(宗敎辨證論) (1916-20)을 들 수 있다 (한국기독교문화연구소 편, 韓國敎會와 神學의 課題, 서울:연세대학교 출판부, 1985), pp. 22-45; 윤사무엘, 한국교회의 경건인물들, 서울:보이스사, 2002, 175-182.
송창근(宋昌根)의 사회참여적 신학 (기독교윤리문제, 1933), 채필근(蔡弼近)의 비교종교학적 접근      채필근, “동양사상과 그리스도,”  기독교사상, 1958. 1, pp. 54-56.
, 배철수의 태극신학, 윤성범의 성(誠)의 신학, 서남동의 방외(方外)신학, 김정준의 한(恨)의 신학, 유동식의 풍류도(風流道)신학, 현영학의 민중신학, 문동환의 생명공동체신학, 김광식의 토착화(身土不二)신학, 김상일의 한사상(Hanism), 허호익의 천지인신학 등 한국신학 수립을 위해 기초작업을 많이 하였다.

      필자의 부친이 되시는 윤응오목사는 한국신학을 무궁신학(無窮神學)이라고 표현했다.      윤응오,  광야40년 목양생활, 서울: 보이스사, 1997.
이 “무궁”의 개념은 하나님의 속성에 속한 것으로 성육신 정신을 살펴 세계문화에 적용되면 세계선교의 패러다임이 될 수 있다. 2005년 현재 세계 165개국에 한국 선교사들이 나가서 열심히 선교를 하고 있으며, 대부분 나라에서 한국인 선교사들을 존경하고 환영하는 일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물론 한국 교회가 그만큼 성장하고 물심양면으로 지원하는 것도 있지만, 지원을 받지 않고도 자립 선교(tent making mission)를 하는 이들도 많이 있다. 태권도가 세계적으로 퍼지며, 한류가 동남아, 중국, 일본, 미주, 유럽으로 퍼지고 있는 것도 무엇인가 우리의 문화틀이 세계인과 통하는 것이 있음을 반증하고 있다.  모든 족속의 사상과 문화를 포용하면서도 무리 없이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무궁신학은 시간과 공간과 문화를 초월해서 전해지는 구원의 메시지를 담는 신학틀을 제공한다. 온 세상의 언어가 갈라지기 전의 공통언어를 찾아서 대화가 되는 틀을 찾는 것이다. 모든 인류가 함께 품을 수 있는 신앙을 성경말씀 속에서 찾아 전하는 것이다. 세계선교는 한국교회가 맡아야겠는데 이 무궁신학을 가지고 가면 반드시 효과있는 선교사역이 이루어질 것이다.

     3. 무궁신학 (無窮神學)

     무궁신학은 생명신학과 멋, 창조신학이며 십자가와 부활의 신학을 표현한 것이어서 우주(宇宙)의 신학이다. 비이원론적 (非二元論的, non dualistic) 변증학(辨證學)의 한국적 표현이 무궁이다. 무궁은 바로 한국의 사상틀로서 한국이념(理念)을 요약하는 말이다. 한국의 국화(國花)는 무궁화이다. 영한사전에 보면 Lily of Sharon을 무궁화로 번역하고 있다. 이스라엘과 한국의 공통점을 몇가지로 든다. 먼저 인사말이 ‘안녕’ (살롬)이라는 것이다. 지정학적 위치가 비슷하기에 전쟁을 많이 경험했고 남의 나라의 침략을 많이 받았고 나라가 없는 때가 많았다. 그래서 늘 평화를 그리워하며 이것이 인사말이 된다. 둘째,  유일신 하나님 사상이 있다. 한국의 하나님 사상은 성경이 가르치는 하나님과 거의 일치한다. 그래서 애국가에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만세라고 되어 있듯이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간구하는 신앙이 있다. 셋째, 무궁화를 좋아한다. 언더우드 선교사가 국어사전을 편찬할 때 무궁화를 사론의 수선화로 번역한다.(아 2:1)  사론은 이스라엘 중부 해안지방을 지칭하는데, 사론이란 말은 들풀이라는 말이다. 들풀 속에 피어나는 꽃을 무궁화라 한다. 죽음 속에 생명을, 가난 속에 풍요로움을, 약함 속에 강함을, 고난 속에 내적 평안을, 혼돈 속에 질서를 창출하는 꽃이 무궁화이다.
    김성일장로는 밝히기를 ‘무궁화는 산해경 해외동경에 훈화초(薰華草)로 나와 있고, 고조선에서는 이를 천지화(天指花)라 하였으며 신라에서는 화랑의 머리에 꽂아주던 꽃이었다. 이스라엘에서는 이 무궁화가 메시야를 상징하는 꽃이며,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꽃이었다.’고 한다.      김성일, “기독사관으로 본 한민족의 정체성,”  미주복음신문 (1119호, 2001년 4월 8일자), 국민일보에서 발췌함.
하얀 분홍색의 노라스럼한 꽃술, 파란 잎 파리 등이 수수하고 은은한 멋을 자아낸다. 무궁화는 지는 듯하면서도 피어나고, 피어나는 듯 지다가 또 피어나고, 넘어지는 듯하나 일어나고, 있으면서도 없는 것 같고 없으면서도 있는 것 같고, 죽는 것 같으나 다시 사는 율동적(律動的)인 멋이 있다.  우리 찬송가 89장에 실려 있는 ‘샤론의 꽃 예수’ 찬송은 본래 ‘무궁화 꽃 예수’로 되어 있던 것을 일제  시대에 무궁화란 단어대신 샤론의 꽃으로 바꾸도록 했다.  길선주 목사는 매일 새벽제단시간에 ‘무궁화꽃 예수’로 계속 불렀다.  우리 민족(民族)이 무궁화처럼 여러 번 죽었다가 살아났다. 그렇게 많은 외침(外侵)을 당하고도 다시 살아났다. 무궁화처럼 끈질긴 민족이다. 고난을 극복하면서 한 멋진 삶을 창출한 민족이다.      ‘한 멋진 삶’의 표현은 유동식의 풍류도 신학에서 인용함. 유동식, 풍류도와 한국신학 (서울: 전망사, 1992); “풍류도외 기독교,” 신학논단 16집 (1983년 11월); “한국문화와 신학사상: 풍류신학의 의미,” 신학사상, 47호 (1984 겨울); Andrew Sung Park, "Minjung and Pungryu Theologies in Contemporary Korea: A Critical and Comparative Examination," dissertation, Graduate Theological Union, Berkeley, CA, 1985; 박철호, “유동식의 신학사상 연구 - 풍류도와 한국신학의 접목 가능성을 중심으로,” 석사논문,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1991.


     일본이 우리 민족을 처음에는 우습게 보고 무단정치(武斷政治)를 하다가 3.1운동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그 후 문민정치(文民政治)로 바꾸었다고 한다. 일본에게 다 죽은 듯했지만 다시 살아 피어난 민족이다. 4,300년 동안 우리 나라의 모습이 항상 이러했다. 애국가에서도 우리 나라 땅을 “무궁화 삼천리 화려 강산”으로 표현함을 깊은 뜻이 담겨 있다. 우리 나라 국토의 대명사가 “무궁화 동산” (The beautiful land of Korea)이다. 태극기에도 무궁선이 한가운데 있다. 선(선)을 자세히 살펴보라. 물결치듯, 바람불 듯, 물이 흐르듯, 살아 움직이는 맵시가 그대로 나타난다.  자연의 멋 그대로다. 우리의 무궁선은 생명선이요 생기(生氣)를 불어넣어 주는 호흡의 모양이다. 삼태극(三太極) 무늬가 북, 부채, 장고, 대문 등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는 문양(文樣)이다.

     중국의 태극(太極)은 음양(陰陽)의 2분법에 기초하였지만 우리의 태극은 음도 양도 아니면서 음양을 끌어안는 중화(中和)의 모습으로 무궁선이 이를 잘 나타내고 있다.      이에 대하여 백광하, 태극기(太極旗): 역리(易理)와 과학(科學)에 의한 해설(解說) (서울: 동양수리연구원출판부, 1965)를 참고하라 (pp. 9-11, 25-33등).
삼태극은 천부삼인(天符三印)에서 기인(起因)되었다. 최수운(崔水雲)이 100일간 특별기도한 후 활모양의 천부삼인경(天賦三印經)을 받았다는 것이다.      上帝曰 吾有靈符하니 其名仙藥 其型太極 又型曰弓이라 (즉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게 영부가 있으니 그 효력은 명산의 양효가 있고 그 모양은 태극이며 활같이 생겼느니라”)
최치원의 현묘지도(玄妙之道)도 무궁의 표현이다.      “우리나라에는 현묘(玄妙)한 도(道)가 있으니 이를 풍류(風流)라 한다... 이는 실로 3교(三敎, 儒, 佛, 仙)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며, 뭇 사람들에게 접해서는 그들을 교화(敎化)한다.” (<三國史記>, 新羅本紀, 第四, 眞興王條)
아이쉬타인 (Albert Einstein, 1879-1955)은 말하기를 “우주(宇宙)는 무한하면서도 유한하며 유한하면서도 무한하다...모든 물질의 운동은 나선형(螺線型)이다”고 한 것도      아인쉬타인은 상대성이론에서 중세 브룬노(Brunno 1548-1600)는 우주무한론을 주장하다가
무궁운동을 지적했다고 할 수 있다. 자연의 선이 무궁선(S선, 나선)이다. 강이 흐르는 모습, 산의 곡선, 자연적으로 난 산길의 모양, 바람의 기류방향, 구름의 형태 등을 보라. 우리나라 고전무용은 손끝의 무궁선, 치마의 날리는 선에서 아름다움과 함께함(공동체 의식)을 만들어 낸다. 물결의 모습, 달이 차고 일그러지는 모양, 초가집, 기와와 처마끝의 문양, 마고자등 무궁선을 도처에서 발견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빛의 입자(粒子Particle)와 파장(波長wave)의 관계, 달걀의 두 알끈(two chalazae in egg which connect yolk and shell, 영어사전)이 연결된 모습, 지구의 두 축의 끝을 잇는 자오선(子午線 Meridian) 모습을 자세히 관찰해 보라. 두 모습으로 나타나나 시작과 끝이 하나임을 볼 수 있다. 이것이 달팽이 모양의 선인 나선(螺線)인데 바로 무궁의 모습이다. 역리(易理)는 나선에 이르는 길잡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역(易)은 생명의 자리인 무궁으로 인도하는데 도움을 준다. 예수는 바른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무궁의 원형(原形)이다.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이 복음의 핵심이며 무궁의 완성이다. 그래서 새하늘과 새땅이 예수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동과 서가 만나고 남과 북이 만나는 장(場, loci encounter)이 무궁의 자리이다.

     무궁은 역리(易理)적인 용어이다. 이 단어에는 묘미(妙微)의 율동(律動)이 있다. 성서적 입장(立場)에서 보면 무궁(無窮)이란 끝이 없음(endless), 가이 없음 (boundless), 무한함 (無限Infinite), 영속함(永續 eternal)란 말이다.      표준국어사전, 신기철.신용철 편저, (서울:을유문화사, 단기 4291), p. 489. 엣센스 한영사전, 민중서림 편, 제 3판 (서울:민중서림, 1997), p. 689.
  시간과 공간 크기 넓이 깊이를 초월하는 무한성이 무궁이다. 그래서 경계가 없다 (boundless). 이를 강조하는 말이 무궁무진(無窮無盡, infinitude, endlessness)하다는 말이다. 끝과 시작이 통한다. 시작하는 듯 끝나고, 끝나는 듯 시작한다. 태극선(太極線)을 보라. 나는 이 선을 무궁선(無窮線)이라고 부르고 싶다.

      하나님 자신을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나중, 시작과 끝이라고 소개함도 바로 무궁하신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사 41:4, 43:10, 44:6, 계 1:8,17, 21:6, 22:13). 즉 하나님의 영원성을 무궁이라고 할 수 있다.  멜기세덱는 시작도 없도 끝도 없다고하여 무궁을 말했다 (히 7:1-3). 무궁이란 시작도 끝도 없다 (無始無終).  그리스도 사건의 핵심이 십자가와 부활(갈 2:18-20)인데 이 둘의 상관성(相關性)도 무궁이라 할 수 있고 영생(永生)도 무궁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누구든지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 (요 11:25) 하셨듯이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아리하리라는 표현이 무궁이다. 재림하실 예수는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라” (계 22:16) 함으로 무궁을 의미한다.

     영원하신 하나님에서 무궁하신 하나님으로 바꿔 부르면 어떨까 ? 영원이란 표현은 서구적인 냄새가 난다. 시간의 연장이 영원이 될 수 없다. 창조주의 시간은 무궁에 속하기 때문이며 피조자의 시간은 제한되어 있다. 시작도 있고 끝도 있다. 하나님의 시간은 이를 초월한다. ‘전능하신’(Almighty)라는 말은 다소 전투적인 냄새가 난다. 독재자의 이미지도 있으나 이를 무궁하신 하나님으로 바꾸면 보다 성서적인 표현이 될 것이다. 그래서 사도신경도 “무궁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로 바꿀 수 있다. 영원하신 언약(창 9:16, 출31:16, 사 55:3)보다는 “무궁하신 계약”이란 말로 바꿀 수 있다.

      이외 죽으나 살고, 살든지 죽든지 (live-die) (빌 1:20-21, 롬 14:8),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고 (in-out), 매고 푼다 (wind-unwind) (마 16:19), 두드리고 열다 (open-close) (눅 12:36, 요계 3:20), 대접하고 받는다 (give-take) (마 7:12, 눅 6:31), 현재의 고난과 장래의 영광 (suffering-glory) (롬 8:18),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얻으리라 (계 2:10), 가고 오며(come-go) (눅 7:8) 등의 표현이 무궁적이다. 문학적 기법(技法)인 교차반복법(inclusio)도 무궁이다

     서남동(徐南同)교수는 자신이 연구하는 민중신학을 방외(方外)신학이라고 하였다. 네모 반듯한 강당(講堂)에서 하는 신학, 즉 규격에 맞는 방내(方內)신학을 벗어나서 거리의 신학이란 뜻인 방외신학이라고 하였다. 무궁신학은 방(方)이 없는 모가 없는 신학이어서 방내신학과 방외신학을 모두 포함한 모든 범주(範疇)를 초월(超越)하는 신학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우주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시간의 영원성과 공간의 무궁성, 능력과 지혜와 사랑의 연속성을 말한다.       이성호 편, “무궁,” 성구대사전, 서울:혜문사, 1964, p. 515.

   미스팔 (mispar) 시 147:5  그 지혜가 무궁하시도다
   올람 (olam)     시 102:27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 (단 6:26)
                   렘 31:3 내가 무궁한 자랑으로 너를 사랑하
                   단 12:2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시 106:31 의로 정하였으니 대대로 무궁하리
    욱 에스타이테로스 (ouk estaitelos)
                   눅 1:33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카라 (Kalah)  애 3:22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카빌 (Kabbir) 욥 36:5  멸시치 아니하시며 그 지능이 무궁하사
     아카타류토스 (akatalutos)  히 7:16  오직 무궁한 생명의 능력을 좇아 된 것이니

성경에 나오는 중요 단어는 이런 무궁성을 함축하고 있다. 은혜(Hesed)는 다함없는 사랑(everlasting love) 즉 무궁한 사랑이다. 하나님의 계약은 무궁한 약속이다(everlasting covenant, 노아의 무지개 언약, 창 9:16,  아브라함의 할례 언약, 창 17:7, 모세에게 베푸신 안식일 언약, 출 31:16, 다윗에게 베푸신 확실한 은혜, 사 55:3).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무궁하신 주님이시다 (히 13:8). 영원한 구원을 무궁한 구원, 영원한 대제사장을 무궁하신 대제사장, 영원한 속죄를 무궁한 속죄, 영원한 제사를 무궁한 제사, 영원하신 성령을 무궁하신 성령, 영원한 기업을 무궁한 기업으로 바꾸어 번역해도 좋을 듯하다 (히 5:9, 7:24, 28, 9:12, 14, 15, 10:12)
예수 그리스도의 무궁하신 은혜와 하나님의 무궁하신 사랑과 성령의 무궁하신 교제가 영원무궁히 우리 모두와 함께 하시기를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