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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아나

2008.04.23 09:29

김성찬 조회 수:1441 추천:55

우리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아나
  

“침대는 가구가 아닙니다. 침대는 과학입니다.”  이 광고 문구가 규제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국민학교 저학년 학생들이 이 광고 문구로 인하여 침대를 가구가 아닌 것으로 잘못 알게 되었다는 학부모의 민원이 교육부에 접수되자, 교육부는 이 광고 문구가 사물과 사회 현상에 대한 개념이 형성되어 가는 어린 국민학생들에게는 비교육적일 수 있다는 판정을 내린 것입니다.그러니까 이는 광고심의의 기준이 되는 두 입장, 하나는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제품이 아닐지라도 어린이가 그 광고를 봄으로써 정서와 지각 형성에 장해를 받는다면 마땅히 규제해야 한다는 입장과, 다른 하나는 이성적 판단력을 지닌 집단이, 사실(문자적)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광고적 표현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입장 중에서 전자의 견해를 보다 중시한 결정이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침대는 가구가 아닙니다.  우리가 다 아는바와 같이 침대는 물론 가구이지만, 인체공학적 검증을 거친 과학의 산물일 때만 진정한 가구일 수 있다는 역설적인 강조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아이들에게 있어서는 말입니다. 이 역설적 메시지의 전체적 의미를 파악할 능력이 없는 이들에게 있어서는,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한 침실 문화에 대한 과학적 인식을 새롭게 해 준 이 교육적(?) 문구가 비교육적(?)문구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저는 이 이야기가 오늘 이 땅,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해 봅니다. 전체가 아닌 부분, 숲이 아닌 나무, 둘이 아닌 하나 밖에 볼 줄 모르는 편협하고, 단선적인 시각을 소유한 이는, 비단 침대는 가구가 아니라고 받아 들인 그 아이들만이 아니라 생각 되기 때문입니다.  


부분적으로 안다는 것은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고전13:9).” 그렇습니다. 이 말씀은 여전히 오늘도 진리입니다. 오늘 이 시대 우리의 문제는 이 세상이 ‘부분적’으로 아는 것과 부분적으로 예언(예견,전망)하는 것들로 꽉 차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부분적으로 안다’는 말의 뜻은 먼저, 어쩔 수 없는 인간 능력의 한계 즉 근시적(近視的),미시적(微視的) 안목을 지닌 인간의 본질적 한계라는 말이며, 다른 하나는 자기중심적인 세계관을 지닌 인간들의 한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정신과 상황은 바로 이같은 말씀의 비밀을 뒷받침해 주고 있습니다.


전체성의 단절

먼저, 어쩔 수 없는 인간 능력의 한계 즉 근시적(近視的),미시적(微視的) 안목을 지닌 인간의 본질적 한계를 보여 준 실예를 몇가지 들고자 합니다.  

그동안의 데카르트식 기계론적 세계관은 정신과 육체를 분리하고 물질적인 세계를 하나의 기계로 이해 했습니다. 그래서 동물이나 식물도 일종의 기계로 간주하여 보면 훨씬 효과적으로 ‘분석’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즉, 살아 있는 유기체도 근본적으로는 그들을 구성하는 기관들의 상호 작용으로 유지 되는 것이므로, 그것들이 서로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 하는 기계적인 원리만 알아내면 결국 모든 비밀이 밝혀진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런 환원주의식 발상은 생물학과 의학에도 극대한 영향을 끼쳐, 인간 신체의 서로 다른 부품(장기)를 나누어 수리함으로 인간의 질병을 완치 시킬 수 있다는 믿음은 선사한 것입니다.  

심리학에 있어서도 이른바 구조주의 학파(structualism)에서는, 인간이 스스로 내적인 성찰을 통해 자기 자신을 관찰함으로써 자기의 마음을 구성 요소별로 쪼개어 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행동주의(behaviorism)학파에서는 그와 대조적으로, 오직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 양식만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아 마음의 존재 자체를 완전히 부인하고 무시해 버렸습니다. 이같은 ‘작은 조각으로 나누어 보기’는, 결국 오늘에 와서 ‘전체성의 단절’이라는 심각한 문제를 파생 시킨 것입니다.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견한 결과 총체적 이해를 결여해 버린 것입니다.

이같은 사실은 신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한 예로 서구의 문예부흥 이후부터 교의신학의 시녀 노릇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근대 성서학은 과학적인 역사연구의 방법론을 채택하면서 점차적으로 독보적인 연구의 길을 개척했던 것입니다. 그 가운데 성서를 하나의 문학작품으로 보는 궁켈(Hermann Gunkel)의 양식비평사를 들어 볼 수 있습니다. 양식 비평사의 한 창시자로서의 궁켈은 타고난 문학가로서 자신의 저술을 통해 고대 히브리인들의 문학성과 감수성을 파악하는 뛰어난 재능을 보여 주었고, 성서의 ‘문학성’을 체계적으로 발굴하는 지대한 공헌을 끼쳤으나, 결국 그는 성서에서의 미학적이고도 예술적인 요소에만 너무 집착한 나머지 성서해석의 최고 목표가 신앙인의 믿음과 삶의 법도를 올바르게 밝히는데 있음을 간과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의 일관성 있는 성서가 양식(form)들의 조각들로 분해되는 위험을 안게된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궁켈과 그의 학파는 성서를 무수히 많은 단편(斷片)으로 쪼개 버림으로써 책 전체의 메시지를 파악하는데 실패한 것입니다.


자기중심적 세계관

다른 하나, 우리가 ‘부분적으로 안다’고 말할 때 이말은, 자기중심적인 세계관을 지닌 인간들의 한계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현실 상황이 그러하고, 개개인의 삶의 모습들이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김일성 사후 이 시간까지 이 땅을 뒤덮은 각양 각색의 주의 주장들이 그러했습니다. 우리 한국 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와 그에 맞선 대항 이데올로기가 그러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모두 부분적으로 아는 자신의 주의 주장만이 온전한 것인양 떠들어 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땅의 정치 현실은 온 사회를 피폐화 시켜 버렸습니다. 왜냐하면 극단적인 주장이란 그것이 단지 주의 주장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주장을 관철 시키기 위해 사회 전체를 피폐화 시켜 버리기 때문인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이 땅에는 비록 (인간 실존적 한계상) 편파적일수 밖에 없을지라도, 나름대로의 보편성을 지니고 따라서 다른 세력에 대해서도 일정한 설득력을 지니는 본래적 의미에서의 지배 이데올로기가 존재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주체사상 같은 황량한 이데올로기나 기타 과격 이데올로기의 범법에 대한 처벌은 당연한 것이로되, 보다 근본적인 해결의 실마리는 보이지 않습니다. 언론의 센세이셔널한 보도나 정부의 권위주의,학계의 불분명한 정의관이 판치는 세상에서는 결코 건전하고 양식있는 집단이 사회의 무게 중심을 이룰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성적 판단력을 지녔다고해도 좋을 듯한 이 사회가 지나치게 극단으로 치달아 내리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전폭적인 지지가 아니면 전면적인 비판만이 있을 뿐입니다. 전체를 이해하려 하지 않습니다. 남의 말을 끝까지 들어 주는 인내심이 지나치게 결여 되어 있습니다. 지나치게 단선적이고,근시안적이며,부분만 이해하는 비정상적인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닌가 심히 우려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마치 이 글 첫머리에 예로 든 어떤 광고 문안을 부분적으로만 이해하여 ‘침대는 가구가 아니다’라고 믿는  유아적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착취,파괴,불화

우리는 그동안 부분을 나누어 봄으로 전체를 파악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 했으나, 지나치게 세분화한 결과 전체를 잃어 버린 허탈한 상황에 이르렀다는 결론을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더 문제가 된 것은 물질의 최소 단위를 발견 할 수 있으리라는 가설이 원자의 내부를 이루고 있는 아원자(亞原子)의 세계를 발견하게 되면서 물질의 최소 단위를  발견할 수 없는 절망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기계적 분석이 한계 상황에 도달하였고, 그 결과 지금까지 사용하던 모든 사상적,과학적 수술 도구들이 무용지물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시대는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가치와 그 가치를 담고 있는 형식이 붕괴된 시대인 것입니다.  모든 것을 쪼개 나가다 보면, 유토피아가 이 땅에 건설되리라 믿었던 인류에게 되돌아 온 것은 착취와 파괴,불화 같은 것이었습니다. 인간과 인간 사이 뿐만이 아니라,인간과 자연 사이에도 심각한 위기가 발생하여 소위 생태학의 문제가 발생하게된 것입니다. 거기다 더하여 자기 만족을 모르는 자본주의의 자기중심적 세계관은, 긴밀한 유대 관계로 일정한 균형을 유지해 가야하는 유기체적인 전체의 생명력을 그 욕심으로 여지 없이 짓밟아 버리고 만 것입니다.그래서 분열되고,독선적이고,일방적인 현대 사회를 창출해 낸 것입니다.


옴살스런(holistic)

그래서 부분적이고,개별적이고,개인적인 것에 대비되는 전체적인 ,통전적인(holistic) 또는  총체성(totality)이란 용어가 그 해답으로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자기중심적이고,독선적이고,착취적인 용어 대신 관용과 아량과 보전이라는 말이 대안으로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홀리스틱(holistic), 이 단어는 그동안 통전적이란 말로 번역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어떤 번역가는 이 ‘통전적’이란 말보다 더 순수한 우리말이 ‘옴살스런’이란 단어라고 지적합니다. ‘옴살스럽다’는 뜻은  ‘모두가 한 몸같이 가까운 사이’라는 뜻의 순 우리말입니다. 이 용어의 출현은 분석을 위주로 하는 종래의 과학이 갖는 한계를 지적하며 개별 요소들간의 보다 유기적인 관계, 그리고 그들 모두가 내면적으로 하나로 이어진다는 관점을 강조하는 말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과학이든,신학이든,정치든,경제든지 간에 이 시대 정신은 우리에게 ‘옴살스럽게’ 살아가기를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가 값비싼 댓가를 치루고서야 발견한, 아니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인정하기 시작한 이 ‘옴살스런 시대 정신’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성경에 이미 말씀하고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전12:12-13).”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의 일을 돌아 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하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2:1-5).”

그렇습니다. 이 시대정신이 말하는 ‘옴살스런 삶’의 모범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예견,전망)하던 인간이 사랑의 완성이신 예수, 그 온전하신 분이 오심으로 부분적으로 알던, 그리고 행하던 모든 일들을 버리게 된(고전13:9-10) 것입니다. 이전에는 나 빼고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 매도하던 입술이, 예수안에서 나같은 죄인 살리신 은혜를 고백하는 참 사람이 된 것입니다. 제 입만 알던 사람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지 않는 자(행4:32)”가 된 것입니다. 부분적으로 안다는 것은 자기 중심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안다는 것은 ‘나’를 아는데서 부터 시작 된다고 한다면, 참 ‘나’를 안다는 것은 내가 아는 ‘나’만이 아니라, 남이 아는 ‘나’까지도 알 때에, 온전한 자기를 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온전히 안다는 것은 남의 눈으로, 타인의 입장에서 자기를 들여다 보는 것입니다. 거꾸로 보기인 것입니다. 아니 예수 안에서, 예수의 눈으로 들여다 보기인 것입니다.

역사에 대한 바른 인식, 종말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진 사람은 그러므로 관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과거의 묵은 원한으로 사람을 대하던 ‘내’가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는 말씀의 경고를 겸허히 받아 들여, 종말론적인 안목으로 사람을 대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50년이나된 묵은 원한과 증오심으로 북녘 땅을 바라보던 사람이, 통일의 그 날에 서서 오늘을 사는 지혜를 발휘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역사는 과거 시제에만 국한 되는 것이 아니라, 미래 시제와도 연이어져 있음을 오늘 이 시간 깨달아 아는 사람은 결코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 수 없을 것입니다. 이 땅의 종말론적 역사가 요청하는 ‘옴살스런 삶’은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자들의 관용과 아량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하기에 로마의 감옥에서도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성도 들에게 이렇게 웅변 했던 것입니다.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빌4: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