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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위한 예수(James D, G. Dunn)

2008.05.24 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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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mes D. G. Dunn은 더함대학교(University of Durham) 신학부 교수로서, 그의 저서들은 The Evidence for Jesus(1986), Christology in the Making(1989), Jesus' Call to Discipleship: Understanding Jesus Today(1992), Commentary on Romans(1988) 등이 있다. 이 글 “Jesus for Today"는 Theology Today, vol. 52, no. 1, (April, 1995)에 수록되어 있다. - 편집자주

 

현존하는 최고의 신약학자인 그는 기독교 기원에 대한  방대학저작 (삼부작)을 쓰고 있는데 제1권 Jesus

 

Remembed은 이미 나왔고 지금은 사도행전부분과 초기 기독교 분야를 쓰고 있다고 합니다. 아래의 글은

기독교연구소에 있는 것을 가져왔습니다.

 

 

 

예수연구



오늘을 위한 예수



제임스 던1)  .  

박대순 譯



나사렛 예수는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신앙과 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이 질문은 우리들로 하여금 갈릴리의 나사렛 출신으로서 1세기 20년대 후반 혹은 30년대 초반까지, 이스라엘 전역에서 설교하셨고 치유하셨으며, 로마 총독인 본디오 빌라도의 명령에 따라 십자가에서 처형된 예수에게 향하게 한다. 또한 이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3일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확고한 기독교 신앙도 포함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예수에 대한 우리의 신앙고백을) 멈추는 것이 좋겠다. 바울의 고양된 주, 히브리서의 영원한 대제사장, 신조들 상의 그리스도,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하나님, 빛 중의 빛” 등을 포함하기 위하여 이 논의를 확대한다면 지면이 부족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갈릴리의 예수에 대해, 그의 생애 30년간과 그의 목회 3년간에 대해 특별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이 (나사렛) 예수의 의미에 대해 말할 수 없다면, 우리가 “부활절 이후의 예수”(post-Easter Jesus)에 관해 말하고 싶어하는 것들은 그다지 큰 의미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사렛 예수와 일치하지 않는 신앙의 그리스도는 신앙의 승인을 요청하기에는 역부족이다.

기독교 신앙이 계속해서 나사렛 예수의 실제 역사에 뿌리박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기독교인들에게 항상 따라 다니는 유혹은 자신들이 원하는 예수를 찾고 싶어하는 유혹이다. 즉, 자신들이 믿는 이상을 가르치는 예수, 자신들의 감정적, 사회적 요구를 충족시켜 주는 예수, 20세기의 선한 미국인 혹은 유럽인(혹은 아프리카인이나 아시아인)이 되었으면 하는 예수를 찾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우리 자신의 이미지를 통해 재구성된 예수는 우리들에게 그다지 영향을 줄 수 없으며, 단순히 우리 자신의 편견을 더욱 강화시키고, 우리 자신의 모호한 행동들을 정당화시키는 도구가 될 수 있다. 우리가 언제나 대면할 필요성이 있는 분은 바로 1세기 팔레스틴에서 영향을 미치신 바로 그 예수이다. (우리들의 요구에 따라) 현대화된 예수는 결국 우리들을 정직하지 못하도록 만들 것이다. 물론 신약성서의 기록을 통한 나사렛 예수와의 만남은 일반적으로 주의 깊은 역사적 연구를 필요로 한다. 과거는 현재와 매우 다르다. 1세기 팔레스틴은 우리의 시대와는 매우 다른 사회이다. 우리가 역사적 연구를 하지 않는다면, “나사렛 예수”는 단지 우리 자신들이 이미지화한 환영, 즉 우리들의 정치철학을 축복하는 행렬에 등장하는 우상이 될 것이다. 만일 우리가 나사렛 예수는 우리(우리가 그려내고 싶어하는 예수)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는 우리에게 영향을 줄 수 없다.

매우 다른 시대와 문화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나사렛 예수는 누구인가? 나는 지면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단지 이 질문에 대해 가장 중요한 세 가지 대답을 간략하게 설명할 것이다.

1. 위대한 선생님으로서의 예수

우리가 나사렛 예수에 관하여 달리 말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 그는 한 사람의 위대한 선생님이었다. 비록 그가 (우리가 알 수 있는 한에 있어서) 형식적인 훈련을 전혀 받지 못했다고 할지라도, 가장 일반적으로 그를 불렀던 호칭은 “선생님”이었다. 복음서들도 우리들에게 그의 가르침의 스타일에 대해 명백한 인상을 준다. 우리는 단지 우리가 산상수훈(마 5장-7장)에서 발견하는 많은 짧고도 간결한 말씀들(지혜로운 말씀들), 아니면 우리가 마 13장 혹은 눅 15장에서 발견하는 것과 같은 그런 생생한 비유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의 가르침의 권위와 위엄은 분명히 종종 주목을 받았다(예를 들면 막 6 : 2 ; 11 :28). 복음서들이 그의 가르침들을 그토록 많이 보존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는 분명히 그가 나중에 청중을 매료시키는 연설가라고 불려질 것이었다는 점을 가리킨다.

“그래서 어쨌다는 말인가?”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라는 질문을 할 때, 그 대답은 세 부분으로 할 수 있다.

첫째, 그의 가르침의 스타일의 문제이다. 분명히 이것은 그가 성공한 비결의 큰 부분이었다. 그는 가장 뛰어난 화술가였다. 우주의 신비를 설명하면서도 그는 모호하고 전문적인 표현을 사용하거나, 복잡한 철학적 논문들 혹은 신학적 강연은 전혀 없다. 오히려 청중의 관심을 사로잡고 아주 쉽게 기억 속에 남게 되는 강력한 은유들과 기억할 수 있는 비유들을 사용했다. 그리고 그 가르침(의 재료들)은 일상적인 경험들, 즉 소금과 빛, 새와 꽃들, 집을 짓는 일, 장터, 동전 한 닢을 잃어버린 여인, 특별한 의식을 거행하는 식사, 탐욕과 빚, 등으로부터 온 것들이다.

그는 효과적인 화술의 모델이다. 큰 붓을 단지 몇 번 휘둘러 그린 그림이 수백 개의 명제들보다 더욱 기억에 남는 경우가 허다하다. 더욱이 일상 생활에서 끌어낸 이미지들을 사용하는 것은 오늘날 성례전적 우주라고 불리는 것에 대해 말한다. 들을 수 있는 귀와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들에게 있어서, 자연과 사회적 관계는 분명히 놀라운 하나님의 은총에 대해 말할 수 있으며, 이것이 양심과 헌신을 촉구함으로써 인간의 어리석음과 책임에 대한 가르침을 줄 수 있다. 전문용어들과 딱딱하고 진부한 사조들의 홍수 속에 빠져들어 가고 있는 사회에서, 예수 선생님에 대한 이러한 회상만으로도 생명과 해방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예수의 가르침들 중에는 여전히 오늘날에도 우리의 관점을 새롭게 하며, 우리의 영을 살찌게 해주는 많은 가르침들이 있다. 마 6장은 이런 가르침들을 여러 개 포함하고 있다. 예를 들어,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마 6:1)는 가르침 같은 것이 그것이다. 마 6장 9-13절에 있는 주기도문도 그렇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네 보물이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 6:19-21).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 할 수 있느냐?”(마 6:27).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33). 또는 율법을 한 마디로 요약하여 “네 모든 존재를 가지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막 12:29-31)는 한 쌍의 명령으로 요약한 것에서 종교적 의무에 대한 간결하고도 도전적인 가르침을 볼 수 있다. 혹은 누가복음 10장30-37절의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처럼, 곤경에 처한 인간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보다는 오히려 체제를 유지하는 일에 더 많은 관심을 두는 종교적 관료주의(제사장과 레위는 그냥 지나갔다)에 대항하고, 인종적 편견과 독선에 대항하는(이야기의 주인공은 바로 경멸받는 사마리아인이다) 강력한 저항도 우리의 시각을 바로잡아 주는 가르침 중의 하나이다. 인간의 무관심과 차별대우에 대해 안면몰수하는 것을 문제로 삼아, 예수 이후 역사적으로 다른 인물들을 등장시켜 이 비유가 계속 전해지고 있다는 사실은 이 가르침이 우리를 더 좋은 사람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셋째, 우리는 예수를 논쟁가의 모델로 생각할 수 있다. 그가 그 시대의 몇몇 종파들과, 특별히 바리새파들과, 논쟁에 연루되어 있었던 것은 복음서 이야기들 중 더 일관된 특징들 가운데 하나이다. 예를 들면 안식일에 관한 논쟁(막 2:23-3:5), 이혼에 관한 논쟁(막 10:2-9), 그리고 로마 제국에 세금을 내는 것의 타당성에 관한 논쟁(막 12: 14-17)들을 상기할 수 있다. 이러한 이야기들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예수가 하나의 주장과 그에 반대되는 주장, 하나의 해석과 그에 반대되는 해석의 세부적 논쟁점을 돌파하여 근본적인 원리에로 나아가는 방식인데, 이 근본적 원리는 직접적인 방식으로 그의 태도와 실천을 전달하는 원리로서, 특수한 상황 속에서도 실천할 수 있는 원리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에게는 원리는 있지만 변하지 않는 규칙은 없다.

그러므로 안식일 논쟁에서, 그는 안식일에 허용되는 일과 되지 않는 일에 관한 주장을 돌파하여, 안식일이 주어진 목적에 대해 언급함으로써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한다(막 2:27). 마찬가지로, 그 다음의 이야기에서 예수는 그가 안식일에 선을 행하거나 생명을 구하는 것을 막는 어떤 규칙이나 전통도 상상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막 3:4). 이혼에 관한 논쟁에서도, 그는 이혼에 관한 모세의 가르침에 대한 주장 (신 24:1-4)을 뛰어넘어 최초의 결혼 제도와 목적(창 2:1-4)에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문제에 관해서도, 그는 우선 순위와 실제에 대한 고전적 통합으로 응답한다. 즉 비록 실제 세상에서는 황제가 언제나 자기 몫을 요구할 수 있을 지라도, 최고로 우선하는 것은 하나님이시다(막:12:17).

따라서, 복음서가 아주 확고하게 기독교 경전의 선두 자리에 서 있는 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복음서들은 단순히 흥미 있는 역사적 생애에 대한 흥미 있는 역사적 기록이 아니기 때문이다. 복음서가 나사렛 예수에 관해 보존하고 있는 그 가르침들은 여전히 다음 세대에게도 “복음적 효과”를 지니고 있다. 예수를 위대한 선생으로 보는 것, 그가 가르친 방식과 그가 가르친 내용은 모두 오늘날을 위해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기능할 수 있고, 진리를 추구하는 구도자에게 여전히 의미가 있으며, 보다 인간적이며 성숙한 인생의 유형을 여전히 제공할 수 있다.


2.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는 이


예수의 가르침이 아무리 심오하고 삶을 변화시켰다고 할지라도, 기독교는 예수를 단지 선생으로서 생각한 것에 만족했던 적은 물론 없다. 기독교를 독특하게 만든 것, 그리고 너무 빨리 기독교와 유대교를 갈라서게 만든 요인은 기독교인들이 그리스도 자신에 관하여 주장한 내용 때문이었다. 처음에 예수의 첫 추종자들은 십자가에 처형된 예수에 대한 믿음을 그의 부활과 고양된 그리스도에 관한 언급에 의해 경험했고 자신들의 신앙을 표현했던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를 들면, 사도행전에 있는 설교들 속에서, 예수의 부활이 핵심적이며 가장 극적인 사건이라는 주장이 최초의 복음 전도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행 2:24-36; 4:2, 10-12; 10:40-43;등). 마찬가지로, 최초의 신약성서 기자인 바울에게 있어서도, 예수에 대한 가장 빈번한 호칭은 “주님”으로서, 이 호칭은 예수의 부활과 고양에 일치되는 그의 지위를 의미한다(예: 롬 10:9; 빌2:9-11). 그리고 바울 자신의 선교 사역과 신학은 그리스도의 긴박한 재림에 대한 확신에 의해 철저하게 영향을 받은 것 같이 보인다(예: 고전 4:9; 7:26-31; 16:22; 살전 4:17).

그러나 우리는 처음 기독교인들이 곧바로 기이한 발걸음을 내딛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즉 그들은 그리스도가 천지 창조에 관련되었다는 점을 말하기 시작한다. 바울은 주가 되시는 그리스도 예수에 관하여 말하면서 “그를 통하여 모든 만물이 생겼고 그를 통하여 우리가 존재한다”(고전 8:6)고 말한다. 골로새서 1장 15-17절에서는, 그리스도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칭송된다. “그 안에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만물들이 창조되었다... 모든 만물은 그를 통하여 그리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모든 만물이 유지된다.” 이와 유사하게 히브리서 1장 2-3절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이 “그 아들을 통하여 세상을 창조”하셨으며, “그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시며 바로 그 존재의 정확한 모습이시다....” 또한 요한복음 서문에 나오는 잊을 수 없는 말씀에서, 우리는 “태초에” 계셨고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하나님이셨던” 말씀에 관해 직접적으로 소개 받는다. “모든 만물은 그를 통하여 생겨났고, 그리고 그가 없이는 어느것 하나도 존재하지 못한다”(요 1:1-3).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이 주제는 우리의 주제(나사렛 예수)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를 통하여 창조가 일어난 그리스도는 또한 나사렛 예수이기 때문에, 전자에 관해 말한 것은 후자에 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예수가 부활과 고양을 통해 이루어진 것은 그의 생애의 다음 단계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나사렛 예수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직접적으로는 별 관련이 없는 것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사렛 예수이기 이전의 그리스도에 관한 주장 역시 나사렛 예수 자신에 관해 말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선재(先在) 단계에 대해 주의를 기울여야만 이런 언어들이 나사렛 예수의 생애와 사역에 대해 갖는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신약성서 학자들 가운데 대다수는 창조와 관련된 그리스도의 역할에 대한 언어가 구약성서와 신구약 중간기 유대 문헌의 지혜 신학으로부터 나오게 되었다는 주장에 대해 동의하고 있는 것 같다. 학자들은 예수 이전의 여러 세기의 유대 신학에서, 하나님의 천지창조 행위에 관해 말하는 가장 빈번한 방식 중 하나는 그가 지혜를 통하여 창조했다고 말한다는 사실을 증거로 제시한다. 예를 들어, “주님은 지혜로 땅에 기초를 놓으셨다”(잠 3:19). “누가 모든 만물을 이루는 분인 지혜보다 더 귀중한가?”(지 8:5). “지혜를 통해 우주가 생겨났다” (Philo, On Flight and Finding, 109)

그러나 이 “지혜”란 무엇인가? 때때로 지혜는 인격적인 존재처럼 보인다. 지혜는 잠 8:27-30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가 하늘을 세우셨을 때, 나는 거기에 있었다... 마치 조수(혹은 조그만 어린이) 처럼 그의 곁에... 있었다.” 그리고 유대의 철학자이며 예수와 거의 동시대인이었던 필로는 종종 지혜를 ”“모든 만물의 어머니”라고 말한다. 때로 지혜는 우주 전체에 있는 일종의 실체, 혹은 힘과 같은 것으로 표현된다. 예를 들어, 지혜서 7:25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혜는 하나님의 권능의 숨결이며, 전능자의 영광의 순수한 유출이다.” 이처럼 지혜를 다양한 이미지로 표현한 수수께끼에 대한 해결은 아마도 지혜가 우주 안에, 그리고 우주 전역에 걸쳐 내재하는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창조력, “하나님의” 현존에 관해 이야기하는 방식이었다는 점이다. 하나님 자체는 인간의 정신 혹은 상상력에 의해서 인식되거나 이해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을 드러내셨고, 자신의 창조 활동의 특성을 지혜 안에, 그리고 지혜로서 드러내셨다. 하나님의 지혜는 모든 지혜의 척도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지혜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가 창조 안에서, 그리고 창조를 통하여 알려지는 한에 있어서, 하나님에 관하여 말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세상을 창조하는데 있어서의 분명한 합리성은 하나님의 합리성이다. 하나님의 영,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영광 등은 유사한 기능을 한다. 그것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될 수 있는 실체가 아니라, 다양한 시대에 그리고 여러 방식으로 하나님의 자기 계시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이다. 우리는, 예를 들자면, 지혜서 10장에 나타나는 지혜에 대한 광범위한 표현에서, 족장들과 이스라엘을 보호한 하나님의 활동이 지혜였음을 주목할 수 있다.

고대 세계에서 이러한 신적 지혜는 일반적으로 의로운 삶의 열쇠로 간주되었다. 그것은 선한 삶의 비결이었다. 신적 지혜에 대한 갈망은 욥기 28장에 있는 잊을 수 없는 말에서 표현되어 있다. 그들은 지혜가 어디에서 발견될 수 있는지를 알았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토라 즉, 모세의 율법에서 신적 지혜를 주셨다. 그래서 벤 시라(ben Sira)는, 그의 위대한 지혜의 찬양시를 이렇게 결론짓는다. “이 모든 것은 가장 지고한 하나님의 계약의 책, 즉 모세가 우리에게 명령한 율법이다.... 그것은, 비손강처럼, 지혜로 흘러 넘친다”(Sir. 24:23-25). 그리고 바룩(Baruch)도 이와 마찬가지로 지혜가 이스라엘에게 주어지지 않았다면 감추어져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기뻐한다. “그녀(지혜)는 하나님의 계명의 책, 즉 영원히 지속되는 율법이다”(Bar. 4:1). 결과적으로 그들은 다른 구도자들에게 경건한 삶을 추구하도록 제시한다. 즉 만일 당신이 정말로 하나님의 지혜를 원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토라에서 찾을 수 있으며, 우리가 그것을 피조물 속에서 분별할 수 있을지라도, 모세의 율법에서 가장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다는 말이다. 다른 말로 해서, 그들은 신적 지혜가 이제 이스라엘의 율법에서 구체화되었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이전에는 비밀에 싸여 있던 하나님의 지혜가 토라를 통해 알려지게 되었다는 말이다.

이러한 배경에 비추어 볼 때, 신약성서의 기자들이 그리스도에 관하여 지혜의 언어를 사용한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가 더 분명해진다. 요컨대, 그들은 유대 기자들이 이미 토라에 대해서 주장했던 것을 그리스도에 대하여 주장한 것이다. 그리스도가 천지창조에서 역할을 수행했다는 말은 일차적으로 그리스도의 계시적 중요성에 대한 주장이다. 즉 그리스도는 우주를 창조한 신적 지혜를 표현하고 구체화하며, 정말로 그는 바로 그 신적 지혜라는 말이다. 이스라엘이 신적 지혜에 대한 가장 명백한 표현이 율법에 있다고 결론을 내린 반면에, 기독교인들은 똑같은 그 지혜에 대한 가장 명백한 표현은 이제 나사렛 예수 안에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 주장은 요한복음 1: 17-18과 히브리서 1:1-2에서 대체로 명백하게 나타난다. 이스라엘의 변증가들이 담대하게 하나님은 신적 지혜를 한 권의 책을 통해 이스라엘에게 주셨다고 주장한 반면에,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지혜가 한 사람의 인간을 통해 인류에게 주어졌다고 훨씬 더 과감하게 주장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놀랍게도 단순한 말로 나타낼 수 있다. 즉 신적 지혜는 하나님에 관하여 말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가장 심오한 분석을 통해, 우주에는 뜻, 즉 하나님의 뜻이 있다. 결국, 이러한 지혜를 성육한 사람은 하나님을 드러낸다는 것으로서 이것은 지금까지 표현된 것보다 훨씬 더 잘 파악할 수 있는 표현이다. 다시 말하면, 다른 그 어떤 사람도 그렇게 하지 못했지만, 예수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지를 보여준다. 모든 우주는 하나님에 관해 말한다. 율법과 예언자들은 훨씬 더 분명하게 하나님을 계시한다. 그러나 모든 계시들 중에서도 가장 분명하게 하나님을 계시하는 사람은 나사렛 예수이다. 예수는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가장 분명하게 이해하도록 한다. 기독교인들은 예수와 같은 하나님을 믿는다. 그는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거짓된 생각과 참된 생각을 구별하는 척도이다.

이런 이유로 인해, 예수가 자신의 사역에서 강조한 것들은 단지 예수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위해서도 중요하다. 예를 들면, 예수가 자신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가져오고,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눅 4:18; 막 2:17)는 것을 강조할 때, 그것은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우선적 관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요한복음은 예수에 대해 보다 발전된 상을 보여주는데, 예수는 아버지를 계시하는 아들로서, 또한 “나는 ...이다”는 지상에서의 그의 생애의 일차적 의미가 하나님을 계시하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이런 통찰력은 단지 30여 년의 예수의 생애에만 적용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주후 30년경의 이 예수는 계속해서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창문을 제공하고, 하나님의 인간적인 얼굴을 계시하며, 기독교인들이 믿는 하나님의 표준과 정의를 제시하고, 그리고 여전히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참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3. 죽음의 정복자


우리가 오늘을 위한 예수에 관하여 말할 수 있는 세 번째 방식은 전통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또한 그것은, 놀랍게도, 가장 어려운 것이다. 이것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것이다. 이 문제의 어려움은 나사렛 예수의 생애의 정점에 대해 기독교 전통들이 서로 다른 점을 강조한다는 사실에 나타나 있다.

어떤 기독교 전통들은 예수가 인류에게, 적어도 그를 믿는 사람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은 바로 예수의 죽음이다. 이것은 예수의 죽음이 (인류의) 죄를 위한 희생제물로서, 하나님과 화해(at-one-ment)를 시킨다는 확신이다. 그것은 단 한 번에 인간의 죄와 허물의 문제를 해결하고 그것들을 없애 버린다. 이것에 대한 가장 분명한 본문들에는 롬 3:25(“하나님은 그의 피에 의한 속죄의 희생 제물로 그를 주셨다”), 히 9:11-12(“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단 한 번 지성소에 들어가셨는데, 염소나 송아지의 피를 가지고 들어간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피를 가지고 들어가셔서, 영원한 구속을 이룩하여 주셨다”), 요한 1서 2:2(“그는 우리의 죄를 위하여, 그리고 우리의 죄 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죄를 위하여 구속하는 희생 제물이 되었다”) 등이 있다.

동물의 희생 제사의 이미지에 익숙하지 않은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러한 언어의 의미를 오늘날 어떻게 설명하는가의 문제이다. 거의 2천년 전에 한 사람의 죽음이 어떻게 지금 나의 죄에 대해 영향을 미치는가? 하나님은 용서하시기 전에 피의 희생 제물을 필요로 하시는가? 이 문제는 부분적으로 구약성서에 희생 제사와 구속에 대한 신학적인 이론적 해석이 결코 명료하게 나타나 있지 않다는 점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시대의 상황에 대해 추측할 따름이다. 예수의 죽음이 단순히 최고의 사랑에까지 도달하는 고무적인 본보기라고 말하는 것은 명백히 불충분하다. 비록 신약성서가 적어도 어느 정도까지는 이 입장을 따른다고 할지라도 말이다(예: 막 10:43- 45; 요 15:13; 롬 5:5-8). 또한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의 일부분은 인간의 죄의 심각성을 인정하고, 인간의 육체에서 죄를 제거하기 위하여는 근본적인 수술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그러나 예수의 죽음이 어떻게 구속으로서 작용하는지는 여전히 모호한 채로 남아 있다. 또한 동물의 희생 제사의 이미지에 대해 당혹감을 느끼는 사람들은 그 이미지를 처음 사용하였을 때보다 그리스도의 죽음의 완전한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죽음에는 기독교인들이 기도와 예배에 있어서 그것에 매달리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마음속에 간직할 만한 그 어떤 것이 있다.

기독교인들이 사실상 그리스도의 죽음에 연연한 주요 방식은 성만찬, 즉 예수에 대한 배반의 밤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단순한 의식(막 14:22-25; 등)과 우리에게 알려진 기독교인 예배의 최초의 전승들(고전 11:23-26)을 통해서이다. 이것은 예수의 죽음이 여전히 오늘날 우리에게도 영향을 미치는 두 번째 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주의 만찬은 주로 예수의 죽음에 아주 정확하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에, 거의 모든 기독교 제의에서 중심적이기 때문이다. 떼어진 빵은 그의 찢어진 몸에 관해 말한다. 또한 쏟아 부은 포도주는 그가 흘린 피에 관해 말한다. 바울이 표명한 것처럼, “그러므로 여러분이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님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선포하는 것입니다”(고전 11 :26). 이처럼 처음부터 예수의 죽음을 기독교 제의 안에 간직한 것은 예수의 죽음이 계속해서 중요성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할 뿐 아니라, 예수를 개인적으로 알지 못했거나 그가 죽는 것을 보지 못한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의 죽음을 새롭게 이해하는 방식을 제공한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성만찬이 여전히 기독교인의 일치를 가져오는 초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기독교인의 분열의 초점이라는 사실은 슬픈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만찬의 중요성에 대해 사실상 모든 기독교 전통들이 새롭게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은 성만찬의 계속적인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이 왜 그렇게 힘을 발휘하는지는 여전히 모호하다. 그러나 성만찬에 관한 신학적 논쟁이란 과거의 세대들에 의해, 그리고 현재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여전히 경험되는 실재보다 덜 중요한데, 이들이 경험하는 것은 신의 은총과 인간의 의존성, 그리고 효과적인 상징의 강력한 상호작용이다. 어떤 면에서, 쪼개진 빵과 부어진 포도주가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그러나 이해할 필요가 없는 방식으로, 거의 2천 년 전에 가르치시고 죽으신 나사렛 예수와 하나가 되도록 만든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 됨은 여전히 상처를 치유하고 깨어진 조각들을 하나의 몸으로 재통합시키는 힘을 갖고 있다. 예수는 그의 죽음을 통해 여전히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예수의 삶의 클라이막스가 영향을 주는 세 번째 방식은 좀 더 파악하기가 쉽다. 왜냐하면, 모든 기독교인들의 증언과 전통에 따르면, 예수의 죽음은 그의 끝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십자가는 영광스러운 실패가 아니었다. 예수는 단순히 위대한 비극적 영웅으로서 그의 추종자들에게 남아 있지 않았다. 처음부터, 그리고 기독교인들을 구분 짓게 만든 복음서의 바로 그 중심에, 하나님이 그를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키셨다는 담대한 주장이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오늘날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 전부는 부활절 신앙의 발생에 관한 것, 즉 예수의 부활에 대한 놀라운 신앙의 출현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에 대한 증거는 시초부터 확고하고 만장일치적이다. 즉 예수의 부활은 예수에게 일어났던 것이지 단순히 그의 제자들에게 일어났던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기독교 복음의 중심에 있는 말씀은 예수가 죽음을 정복했다는 말씀이다. 즉 죄와 죽음이라는 악하고 사람을 노예로 만드는 관계는 깨어졌다. 바울이 로마서 6장에서 주장하는 중심적 내용이 바로 이것이다. “죽은 자는 누구든지 죄로부터 자유롭게 되기 때문에.... 죽음은 더 이상 그를 지배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로 하나님에 대하여는 산 자로 살 수 있다(롬 6:7-11). 바울은 고전 15장에서, 더 웅변적으로 예수 부활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만일 그리스도가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다면, 우리의 선포는 헛된 것이며 여러분의 신앙도 헛것이 됩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희망한 것이 이 생만을 위한 것이라면, 우리는 모든 사람들 중에 가장 불쌍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고전 15:14-19). 그 희망은 그리스도가 최후의 적, 죽음을 정복했다는 사실 위에 확고하게 근거해 있다(15:26, 54-57). 이와 마찬가지로 강력한 선언은 히브리서 2장에서 예수를 그 제자들로 하여금 자신을 따르도록 하기 위해 죽음을 통과하는 길을 열어 놓으시고, “죽음의 두려움에 사로잡혀 노예로 붙잡혀 있는 사람들”을 자유케 하시는 선구자와 전위 부대로서 선포한 것이다(히 2: 9-15).

죽음은 여전히 “최후의 적”으로서, 삶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모순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을 붙잡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패배로, 빛을 차단시키고 어둠으로 에워 쌓아 여전히 사람들을 공포에 사로잡히게 만드는 것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예수는 죽음을 정복했다. 여기에서 또 다시, 우리의 제한된 통찰력으로는 죽음에 대해 더 이상 멀리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죽음은 두텁고 불가해한 베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죽음 저 편의 삶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아직도 거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또 다시 말하지만,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복음은 여전히 신앙을 공급하고 희망을 고취시키는 힘이 있다.

어제의 예수는 여전히 오늘을 위한 예수가 될 수 있다. 그에 대한 가장 저급한 평가조차도, 그는 여전히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인물, 즉 역사를 바꾸어 놓았고 무수한 대중들에게 등대와 초상을 제공한 분으로서, 역사 안에서 아주 적은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다. 이런 차원에서조차도, 그의 가르침만도 존경심을 불러일으키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여기에 그의 제자들의 평가를 덧붙인다면, 그의 삶과 죽음, 그리고 그후에 일어난 일들은 우리를 놀라게 만드는 주장들이며 가장 중대한 관심을 기울일 가치가 있는 주장들이다. 기독교인 설교자들과 변증가들은 이러한 주장들의 놀라운 특성으로 인해 난처하게 여길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이런 주장들은 예수의 의미를 증거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록 우리가 그 주장들을 충분히 이해할 수 없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진리를 추구하는 진지한 탐구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매혹적인 도전을 제기한다. 즉 “이 나사렛 예수는 누구였는가? 그리고 그가 무슨 일을 하였기에 사람들은 그에 대해 그런 주장을 하는가?”

이제까지 나사렛 예수의 의미에 관해 설명한 세 가지 관점이 함께 연결되어 있다는 점도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예수가 단지 위대한 선생만이었다면, 그는 아마도 십자가에서 처형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가 단지 한 사람의 위대한 영웅만이었다면 그 이전의 다른 영웅들이 전혀 하지 못한 것, 즉 죽음을 정복했다고 생각되었는지를 밝히는 자명한 근거가 전혀 없다. 혹은, 하나님의 지혜를 성육신한 예수로서 그러나 인간의 형벌 가운데 가장 공포스러운 형벌(십자가) 중의 하나로 처형된 예수는 아마도 그의 삶에서뿐만 아니라 그의 죽음에서도 여전히 그 지혜를 체현하셨을 것이다. 이 예수가 핵심이 되는 기독교는 철학이나 혹은 윤리적 체계로 환원 될 수 없으며, 승리주의나 성공을 위한 방책으로 환원 될 수 없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가져오고 죄인들을 부르러 오신 그 분은 또한 하나님이 십자가를 통하여 그분 안에서 세상과 하나님 자신을 화해시키신 바로 그 분이시다. 이 예수는 여전히 오늘날을 위해서도 의미 있는 분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