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영혼일기 333: 설교자 신만교 -그 ‘실천’이 ‘적용’된 강력(强力).
2009.07.05(주일)

오늘은 맥추감사주일이다. 하여 맥추감사절의 성경적 유래와 영적 의미에 대해 설교를 했다. 나는 설교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그 감사는 이웃과 나눔으로 완성되는 것’이라 상투적으로 강조했다.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 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히13:16)”는 히브리서의 말씀도 인용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내 안에서 예정에 없던, 이런 무책임한 언사가 터져 나오려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께 드린 예물 전부를 외론 병상에 누워계신 아무개 성도님께 전하려합니다.’

그동안 왕왕 우리는 절기헌금을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에게 전하겠다는 공동의 결의를 한 후, 몇 주 동안 주보에 광고를 싣고는, 그 의미 있는 실천을 해 왔었다. 그러나 이번 맥추감사 예물에 대해서는 그런 공동 결의를 미처 하지 못했었다. 하여 난 그 즉흥적 감동을 순간 절제했다. 그래선지 뭔가 미완의 메시지를 선포한 듯, 진한 아쉬움이 설교 후 내내, 내 맘속에서 일었다. 그래 난 구체적인 적용이 미진한 메시지를 선포했던 것이다.  

                    
오전 예배 후, 공동식사를 마친 다음 나는 존경하는 신만교 목사님께서 보내주신 그분의 두 번째 설교집,『셀교회 전도비전 - The Evangelical Vision in the Cell Church』을 펼쳐 들었다.

산뜻했다. 물인가 하늘인가? 표지부터 그랬다. 설교 없는 설교집 같은 상큼함이 풍겨났다. 서문을 펼쳤다. “말씀 요리하는 시간이 재밌습니다.” 그 한줄 고백에 나는 무릎을 쳤다. 아니 무릎을 꿇었다. 요리가 재미있는 주부. 말씀 요리가 재미있는 목사.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나는 그 설교집을 더 이상 읽어나갈 필요가 없다 생각되었다. 그분은 사람 기죽이는 그런 제하(題下)에 자신이 말씀 안에서 누린 재미난 말씀 요리의 전과정을 서문으로 장식하고 있었다.

월요일부터 시작하여 매일 3-4시간을 투자하며, 그 완성도를 20%씩 높여가다가, 토요일 아침 설교문을 최종마무리를 한다며, 그분은 그 완성의 기쁨을 옥동자 출산에 비견했다. 내안에서도 감흥이 일었다. 비록 나라는 사람이 본문만 들고 강단에 올라가는 게으르고, 준비성 전무한 설교자이지만, 그런 석녀(石女)같은 나도 그 ‘준비의 기적’을 이룬, 신만교 목사님의 토요일 오전, 설교문 출산의 희열을 다소 감지할 수 있었다. 그런 감각이 내 안에서도 살아난 것은, 내 안의 평생 열망이 그 ‘날마다’에 있기 때문이리라.

그랬다. 그분의 오늘 개척목회의 승리는 그 ‘날마다’에 있었다. 우리는 흔히들 폭발적 성장을 이룬 특정한 개척목회자를 개척목회의 모델로 삼는다. 그러나 나는 오늘날 개척목회의 전범(典範)을 꼽으라면, 한 걸음 한 걸음 그 날마다의 승리에만 관심을 갖고 오늘에 이른, 신만교 류(類)의 개척목회스타일을 그 표준으로 삼고 싶다. 그분의 목회일지 첫 장에는 아마도 다음과 같은 성경 구절이 적혀져 있을 것만 같다.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편119편105절).”

그래, 그분의 개척목회는 그의 발의 등 되신, 딱 한 걸음 내딛을 만한 지경만 밝혀주시는 성령의 조명을, 그분의 인내로 인내하며 좇은 27년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날마다 그 말씀의 빛을 밝혀 자신을 점검하고, 그 말씀의 진수를 캐내어 한편의 설교로 각색해 나아가는 ‘재미’로, 그분은 27년을 하루같이 보내셨을 것이다.

나는 설교를 해오면서 그 누구나 그렇듯이 나도 많은 설교자들의 설교를 대했다. 그러나 그 많은 설교자의 설교 중 내가 범접할 수 없는 설교가 있다. 그것은 그 목회적 ‘실천’이 ‘적용’이 된 설교다. 그런데 그 적용점이 개인적 실천이 아닌 그 설교자가 속한 공동체의 실천인 경우, 그 설교를 흉내 내기가 제일로 힘들다.

예를 들어 김선도 목사님의 설교가 그런 류(類)에 속한다. 그분은 거의 항상 설교 말미에 자신이 섬기는 광림교회라는 신앙공동체가 행한 사랑의 실천을 말씀 적용의 사례로 들고 있다. 그래서 그 설교는 그 누구도 따라할 수없는 실천적 강력(强力)이다. 논리적 말씀 구사를 현란하게 해대는 곽선희 목사님의 설교는 그 구절양장 같은 논리를 따라가기가 쉽지 않아 다소 힘들지만, 그래도 잘만 숙지하면 그런대로 어설프게나마 베껴낼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김선도 목사님의 설교는 맘먹고 베껴내다가도 꼭 ‘그 공동체적 실천이 적용 사례가 된 강력’ 앞에 왕왕 백기를 들곤 했다. 레전드 조용기 목사님의 신유의 실천이라는 무시무시한 적용 사례 앞에 두 발, 두 손 든 것처럼.

그런데 나는 오늘 신만교 목사님의 설교를 읽다가 그런 공포(?)를 느꼈다.
신만교 목사님의 설교는 한마디로 ‘그 ‘실천’이 ‘적용’이 된 강력’이다.
이런 말씀이 눈에 들어왔다.


"말세에는 사랑이 식어집니다. 이때 우리는 사랑의 영성을 깨뜨리지 맙시다. 작은 사랑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사랑의 영성도 간접전도입니다. '사랑의 은행'을 활성화하여 어려운 이웃과 함께 하고 나눔을 실천해야 합니다. 특히 금년은 '무료급식 10주년의 해'를 맞아 사랑의 영성회복을 위해 힘써야 하겠습니다." (사랑의 영성이 살아있습니까? 중에서) 


'무료급식 10주년의 해' - 이것이 그분의 설교의 '그 실천이 적용된 강력'이다.


그리고 그 설교집은 그의
목회 실천, 실천 목회 사례집 같다. 그 책에는 그 원색적 사랑의 실천 현장을 찍은 사진들이 즉  12년째 계속해 온 사랑의 무료급식봉사 장면, 예수천당 불신지옥 - 그 불타는 노방전도 장면, 의정부 성시화 전도 발대식 장면 등등이 삽입되어 있다.

또한 책 뒤표지에는 ‘셀교회 전도는 공동체적으로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전도합니다.’라는 셀교회 전도의 특징을 발문해 놓고 있다. 그러나 신만교 목사가 목자 된 화평교회는 셀목회 이전에 이미 그 공동체적 사랑을 실천하고 있었다. 화평교회는 이미 벌써 셀교회 목회를 할 만한 자격이 있는 교회였다. 그리고 그의 이력은 전적으로 광의의 목회적 관심에 집중된 사역들로 화려하다. 의정부 기독교연합회 회장, 의정부 인권선교 위원회 위원장, 믿음 신용협동조합 부이사장, 사랑의 무료급식 위원회 위원장, 의정부 성시화 운동 본부 총재 등등. 허명이 아니다. 그 사랑의 실천을 위한 기꺼운 감투다.

그의 한 가지 소원은 이것이다.

“ ‘하나님의 사람’ 이 얼마나 위대한 이름입니까? 저에게 한 가지 소원이 있습니다. 내 평생에 이 소리를 듣지 못하면 나의 장례식장에서라도 누군가 ‘신만교,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었다’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싶습니다. 그렇게 양육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 모두 이와 같은 거룩한 소망을 갖기를 바랍니다. (그의 위의 책 중, ‘여주동행(與主同行) 중에서’).”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본질에 충실한 사람이다.

“꼭 기억하십시오. 주님이 여러분을 부르신 목적은 주님과 함께 하는 교제를 갖기 위한 것이요, 그 다음은 전도와 치유의 사역을 위해서입니다. …… ‘내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요15:4). 이렇게 주님과 같이 사는 것을 여주동행이라고 합니다.”

나는 모처럼 맛난 밥을 먹은 기분이다. 그의 설교는 밥이다. 모두들 그 유별난 별미만 양떼에게 먹이려드는, 자기 현시욕 충만한 상업적 경쟁력이 각광을 받는 이 시기에도, 그는 여전히 밥만 짓고 있다. 그 평생을 먹어도 물리지 않는 생명의 양식을 날마다 짓고 있다. 그가 밥을 날마다 지을 수 있는 비결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것은 그의 성실하고, 철저한
성경 메시지의 ‘복원작업’에 있다.

성경 메시지 복원작업은 물리지 않는 밥을 짓는 비결이다. 현란한 수사학, 말장난이 그의 설교에는 없다. 알레고리도 없다. ‘알레고리’란 성경 본문을  제대로 해석하지도 않고 자기 상상에 따라 해석을 집어넣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복원’은 성경의 문맥과 논리를 살려 철저하게 본문을 주해한 후에, 그것을 가지고 저자의 의도를 추론해 내는 것이다.

유물을 발굴하는 유적조사단이 살살, 가만가만, 그 천 년의 세월을 반추하듯 조심스레 인내하며, 붓끝으로 묵은 흙을 털어내며 유물의 온전한 복원을 염원하듯, 그분은 한 편의 설교를 위해 하루 3-4시간씩 여섯 동안 ‘성경복원’ 작업을 해왔다는 거다. 놀랍다. 그래서 그 즐거운 노역인 ‘성경복원’ 작업을 통한 그분의 설교 작성은 양떼들이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밥’을 짓는 소중한 작업이다. 그의 설교문 곳곳에 주제어로 제시된 성경구절은, 그의 설교가 말씀의 쌀로 지은 밥임을 증거하고 있다.
 

나는 오늘 주일예배 설교에서 그 공동체적 사랑의 실천을 빠뜨려 버리고 말았다. 아니 대충 얼버무리고 말았다. 그것도 그 은혜로 우리에게 주신 땅의 소산을 마땅히 이웃과 나누어야할 맥추감사주일 설교에서 말이다. 그런 무거운 맘으로 나는 오후 예배 후, 병원 심방을 갔다. 그러나 신 목사님의 설교를 읽은 감동의 은혜였던지, 나는 일정한 예물을 그 외론 성도의 병상 머리맡에 놓고 왔다.

그런데 밥을 먹을 수 없는 그 늙은 신자의 유일한 그 병상의 바람은 밥 먹게 되는 거였다.
돈이 아니었다.
그래 사람은 밥심(힘)으로 산다지 않던가?

그 늙은 신자는 밥이 그립다는 거다.
맹한 죽이 아니라, 일어서 걸을 수 있는  힘을 주는 밥심이 그립다는 거다.
그동안 나에게 얻어먹지 못한 밥.
군것질로만 헛배 불린 목자에게 그분은 제발 밥 좀 달라고 당부하는 듯 했다.

흰 쌀 고봉밥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