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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0: 그 믿음에 서서

2009.10.04 20:45

김성찬 조회 수:3204 추천:68

영혼일기 390: 그 믿음에 서서
2009.10.04(주일)

그녀도 울고, 나도 울었다.구체적 사례를 들진 않았지만, 그 상실감을 건드린 설교 내용을 그녀는 이내 자신을 위한 메시지라 여긴 듯, 설교 시간 내내 눈물을 찍어내고 있었다. 그녀만을 위한 설교였지만 결과적으로 나를 위한, 모든 이를 위한 설교였다.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낙원을 잃은 자들이기에.

큰 물결 일어나 나 쉬지 못하나 이 풍랑 인연 하여서 더 빨리 갑니다 ♫
내 걱정 근심을 쉬 없게 하시고 내 주여 어둔 영혼을 곧 밝게 합소서 ♫

설교 전 함께 부른 이 찬송 가사에, 깊이 매몰됐던 속울음이 내게서 비쳤다.

새우젓 장수 아줌마 이야기로 설교는 시작됐다. 별나게 무식한 아낙 내 소싯적 한 교회 성도였던 새우젓 장수 아줌마는 새벽마다 교회당 마루에 주저앉아, 펑펑 울며 부요하신 아버지 하나님께 매어 달렸었단다. 우리 어머니의 증언이다. “아부지, 아부지 하나님   아부지 흑흑 줬다가 다시 뺏어가도 존께 우리 자식들에게 복 한번 줘 보쑈. 돈 벼락 한 번 줘 보쑈, 엉 엉.” 그랬단다. 그랬었단다. 새우젓 장수 아낙네가. 부요에 충만하신 아버지께.

얼마나 절박했으면, ‘반드시 줘야 한다’는 말을 “줬다가 뺏어가도 좋으니께 한번만 돈 벼락을 내려 달라”는 억지 말로 내뱉었을까? 그래 그녀는 “반드시, 꼭, 꼭, 꼭 줘야합니다. 주님.” 이런 말을 그녀는 그렇게 부도 예정 어음으로 치환했던 거다. 그만큼 간절했고, 절박 했다는 말이다. 작고하신 어머니 말씀에 의하면, 우리의 간구에 응답하시길 기뻐하시는 하나님께서 그녀의 기도에도 응답하셨다고 한다. 그 새우젓 장수 아들들이 부자 됐다는 소문을 들으셨단다. 그러나 우린 알지 못한다. 그녀의 아들들에게 선물로 주신 돈복을 하나님께서 그녀가 발한 약속 어음에 의해 한시적으로만 허락하셨는지 우린 알지 못한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께서 그녀의 기도 끝 절을 기억하시어 줬다가 다시 뺏어 가셨다면 그녀는 과연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그녀는 내가 언제 그런 기도 약속을 했었느냐고 하나님께 따져 물었을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속히, 그렇게 모질게 앗아가시느냐 그녀는 야속해 했을 것만 같다. 간구 응답이 절박한 만큼, 그 상실감도 심각했을 터이기에. 부요한 자리에서 다시 곤궁한 자리로 내려앉는 일은, 거지가 왕 되는 일보다 더 힘들고, 어렵다기에.

그렇다.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 견딜 수 없는 어려움 중의 하나가, 우리들의 그 절박했던 간구에 응답해 선물로 주신 하늘 복락을, 그 주께서 다시 앗아가 버리셨다고 느낄 때가 아닐까? 언약의 아들 이삭을 다시 달라고 하신 하나님의 음성을 듣던 아브라함의 망연자실함처럼.

세상에 치사한 것이 ‘줬다가 빼앗는 것’이다. 뭔가를 건지려 미끼로 그 무엇인가를 줬다가 빼앗는, 세상사 비일비재한 사기행각 같은 것은 여기서 말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그 누가, 그 누구에게 뭔가를 ‘줬다가 빼앗는 행위’는 분명 그 당하는 이에게는 쩨쩨하고, 남부끄러운 치사(恥事)를 넘어, 숨넘어가게 할 치사(致死)일 수도 있다. 단적으로, 돈은 물론이고, 사랑을 줬더니 배신한 대상에 대한 증오심으로 죽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는 일들이 얼마나 이 세상엔 많은가? 그리고 엄밀히 우린 크고, 작을 뿐, 우리도 이미 치정살인의 당사자들이 아니던가? 그래서 차라리 당신만은 만나지나 말~것을♫ 님에 속고, 돈에 우는, 그 저자거리의 통속(通俗)에 우린 한통속이 아니던가?

물론 이런 경우도 있다. 하도 아이가 보채서 그 어린애에게 잠시 칼을 내어준 엄마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한 그 엄마는 이내 그 칼을 그 아이에게서 빼앗을 것이다. 아이가 울든 말든 개의치 않고, 그 아이의 투정에 말려든 자신의 어리석음을 이내 후회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지혜의 원천이시다. 위험한 줄 뻔히 알면서 그의 자녀에게 칼을 내어 줄 분이 아니시다. 그리고 더 더군다나 우린 적어도 영적 유아가 아니다. 우린 칼도 부릴 줄 알고, 불도 다스릴 줄 아는 영적 성인이다.

그렇다면 왜 주께서 우리에게 그 양지(陽地) 선물을 줬다가 다시 빼앗으신 걸까?

그것은 믿음 때문이다. 우리가 그분을 믿는 믿음보다 더한, 그분이 우리를 믿는 믿음 때문이다. 그분은 알고 계신다. 내가 어떤 믿음의 소유자인지 알고 계신다. 그렇다 그분이 알고 계시는, 아니 그분이 믿는 나는, 그 무엇을 빼앗기더라도 하나님만은 빼앗기지 않는 자 임을, 그 어떤 것을 잃어도 하나님만은 잃을 수 없는 자 임을 주께서는 아시고, 또한 믿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지 아니하며 /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함이라 고린도후서 4장 7-10절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권능이 우리를 그 사랑에서 끊을 수 없음을 아시기 때문이다. 질그릇 같은 우리가 지닌 그 보배, 예수의 힘으로 우리가 그 믿음을 배반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음을 하나님께서는 익히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의인 욥에 대한 하나님의 믿음도 그러하셨다.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이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사단이 곧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니라 욥기 1:12

그 절대자에 대한 절대적 믿음을 지닌 욥의 고백 또한 그러했다. 모든 것 끝난 뒤에도, 그는 절대고백을 발했다.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리려 경배하며 /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욥기 1장 20-22절-

욥의 리얼한 현실은 우리도 당할 수 있는 실제상황이다. 그러나 그 욥의 환란은, 하나님의 욥에 대한 믿음에 근거하고 있다. 그래서 그 환란은 그 믿음을 넘어서지 못한다. 결코 그 환란이 믿음을 넘어 설 수가 없다.

이 믿음, 예수 안에서 우리를 믿어 주시는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믿음은 우리가 하나님께 대해 지닌 믿음이 비록 퇴색되더라도, 결코 빛바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믿음은 절대불변의 믿음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가 믿어야 할, 절대 불변의 진리이다. 하나님께서 변치 않으심으로 우리가 변할 수 없다. 하나님이 온전하심으로 우리 또한 온전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한다.

27 야곱아 네가 어찌하여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하여 이르기를 내 사정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원통한 것은 내 하나님에게서 수리하심을 받지 못한다 하느냐 28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29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30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3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이사야 40장 27-31절-

그분을 앙망하라 - 인간적인 오해를 벗어버리고, 그 분 편에 서서, 그 믿음으로 그분을 앙망하라 는 권면의 말씀이다. 오늘 우리가 받은 줄 알았으나 다시 빼앗긴 선물은 그 믿음에 이르는 연단의 도구다. 모리아 산행 그 사흘 길을 묵묵히 걸어 나간 아브라함의 그분에 대한 절대 믿음도 하루 아침에 얻어진 것이 아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야고보서 1장 2-4절-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란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로마서 5장 1-4절-

고난을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시119:67-

끝으로 그분은 반드시 우리에게 그 선물을 주신다. 오늘 내 눈 앞에서 사라진 선물이 아닌, 참으로 돕는 하나님의 선물을 주신다. 참으로 돕는 더 좋은 사건이 나를 위해 예비 되었다는 말이다. 이사야서 41장이다.

8 그러나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나의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

9 내가 땅 끝에서부터 너를 붙들며 땅 모퉁이에서부터 너를 부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나의 종이라 내가 너를 택하고 싫어버리지 아니하였다 하였노라

10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 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17 가련하고 빈핍한 자가 물을 구하되 물이 없어서 갈증으로 그들의 혀가 마를 때에 나 여호와가 그들에게 응답하겠고 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지 아니할 것이라

18 내가 자산(메마른 산)에 강을 열며 골짜기 가운데 샘이 나게 하며 광야로 못이 되게 하며 마른 땅으로 샘 근원이 되게 할 것이며

19 내가 광야에는 백향목과 싯딤나무와 화석류와 들 감람나무를 심고 사막에는 잣나무와 소나무와 황양목을 함께 두리니

20 무리가 그것을 보고 여호와의 손이 지은 바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가 창조한 바인줄 알며 헤아리며 깨달으리라

그분 편에 서서, 그 믿음에 서면, 참으로 돕는 그분의 손길이 우리에게 충만히 임할 것이다. 하나님의 관심은 그 절대적 믿음에 반응하는 내 믿음의 태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무엇보다. 그 믿음에 굳게 서는 은혜를 간구하는 영혼이 되어야 한다.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의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 6:31-33절-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 -고전16장 13절-

영혼일기가 주는 리얼한 그네들의 삶에 대한 성경적 해답을 주는 설교였다. 물론 이상의 내용대로 설교한 것은 아니다. 어제 영혼일기를 중심으로 설교를 해 나갔고, 오늘 설교를 정리하다가 내용이 더 발전한 것이다. 관점은 매사를 인본주의적으로, 사람 편에서, 사람 입장에 서서 바라보지 말고, 매사 하나님 편에 서서 해석하자고 역설했다.

그리고 오늘, 춘천에서 이삿짐센터를 운영하는 양 권사님이 처갓집에 들렸다가, 최근 수입이 넘쳐 그 넘친 은혜를 음지에서 양지를 지향하는 양지교회에 기십 만 원을 헌금하셨다. 재정이 바닥나고, 앞장 서 책임 맡아 감당해야 할 물질적 책무에 대해 다소 염려했더니 주께서 명절을 밝혀주셨다. 그 부스러기의 은혜를 누리는 잔재미의 쏠쏠함. “차라리 완전히 굶기시면 탈출이라도 할 터인데, 죽을만하면 살려놓는 당신은 대체 무슨 속셈으로 날 붙들어 놓으신 건지? 알 수 없어요, 알 수 없어…….” 라고 피골이 상접된 채, 신세 한탄하던 외딴 금식 기도원 목회 동지의 푸념이 눈에 어른거렸다. 나그네 길이 아니라면, 크던, 작던 이 일이 사명의 길이 아니라면.

엊그제도 어느 후배 목사가 뜬금없이 나에게, “교직에 그냥 남아있었더라면 어땠을까요?” 넌지시 내 후회를 이끌어 내려 했다. 그러나 나는 단호히 말했다. 사명이 달라. 사명이. 시카고 UBF 본부교회에 몸담았던 큰애가 일시 귀국했다. 그 아이는 다시 그 본부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했다. 미셔너리의 길로 자꾸만 유도하는 그 분위기가 부담스럽다는 거다. 자신은 제 적성에 맞는 정치학을 공부해서, 한국 정치의 민주화, 선진화에 일조하고 싶단다.

사명이 달라. 그렇다. 사명이 밥이다. 사명을 먹고 사는 존재가 인간 존재다. 사명을 먼저 먹고, 우린 밥을 먹는다. 하니 밥그릇 크기를 따질 수가 어디 있으랴? 사명을 감당할 자격과 여건을 허락하신 것만으로도, 나는 이미 배부르다. 밥된 사명이 있어 나는 행복하다. 이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