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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2: 어떤 해후

2009.08.31 22:00

김성찬 조회 수:3187 추천:83

영혼일기 372: 어떤 해후
2009.08.31(월)

친군데 여기서 만났…….
벽제 화장터에서 그와 영결하려는 나를 배웅하면서 그의 아내는 말끝을 흐렸다.

친군데 이제사 만났다.
그가 시신(屍身) 되어 누운 그의 영결예배 설교자로 난 그와 해후했다.

그가 어찌 알았겠는가?
내가 그의 장례식의 주빈이 될 줄을…….

내 어찌 알았겠는가?
그가 내가 주관하는 예배의 주빈이 될 줄을…….

그랬을지라도, 나는 그가 내게 마지막 내민 그 손을 뿌리치지 않았어야 했다.

혹자는 텅 빈 그의 빈소를 빗대어, 그가 세상을 잘못 살았다고 시비했다. 그랬다. 그는 늘 양지를 좇는, 때깔 고운 허상을 좇는 삶을 살다 결국 사람다운 사람을 잃고, 사명마저 잃었던 사람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가 양광을 좇는 해바라기처럼 살았던 이유는 세속적 힘이 필요해서였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그는 그의 아내의 말대로 늘 세상이 버거운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정말 세상을 감당할 수 없는 심약한 사람이었다. 하여 그는 가슴이 늘 오그라들었고, 끝내 그 흉부에 파고든 매서운 칼바람을 이겨내지 못하고 단번에 픽 쓰러지고 말았단다.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그분, 예수를 맘에 모신 그였지만, 그 신앙조차 그에게 힘 되지 못했던 것 같다.

인간적 오기와 집념이 필요해. 교회를 한 번 뒤집어 버린 후, 재기에 성공한 어느 친구가 나에게 그렇게 말했다. 인간적인 오기와 욕망 그리고 집념. 보다 본질적인 영성을 추구하는 이들은 그런 말을 귀담아 듣지 않는다. 아니 귀에 들리지도 않는다. 그런 용어가 그 자신과는 전혀 무관한 비속어에 속하기 때문이다. 나도 그런 류에 속한다. 그러나 그는 나보다 더했다. 하여 그는 맑고, 고운 수도원적 영성을 마음 한편에 흠모하며 살았다. 그러면서도 뭐가 아쉬웠는지 그는 유독 인간관계론, 처세론, 성공 비법을 담은 책들을 늘 옆구리에 끼고 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외딴 수도원의 수도사처럼 결국 홀로 갔다. 처세완 무관한 초라한 장례행렬의 주빈 되어 청빈하게 갔다.

물론 알 수 없다. 살아있는 자 그 누가 감히 그 삶과 죽음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할 수 있을까? 천국은 상대평가를 하는 곳은 아니리라. 천국은 절대평가를 하는 곳이리라. 누가 얼마나 많은 조문객을 불러 들였는가를 그 하늘은 평가의 기준 삼지 않으실 거다. 관객동원에 성공한 영화가 작품성이 다 뛰어난 것은 아니듯, 그분에 대한 절대 믿음으로 우리를 평가하실 최후의 의의 심판은 우리네 기준과는 사뭇 다르리라 믿는다.

그러나 그런 자위로 제 맘을 달래기에는 매우 허전한 하루였다. 제 설움에 곡하는 조문객처럼, 나는 그를 반면교사 삼아 날 돌아 봤다. 두 구절의 말씀이 맘에 부딪혀왔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니라 -빌립보서 4:5.

낯선(?) 친구 아내의 의아해 하는 눈빛. 어디 있다가, 어떻게 왔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먼저 손을 내밀지는 못했을망정, 내민 손을 잡아주지 않은 이 협량. 주께서 가까우시다는데. 나도 머잖아 바람처럼 휙 사라져갈 것인데. 그래도 옹근 오기로 난 여전히 그 누군가에 대해 굳다. 굳어 산 존재임을 확인하는 이 강박증. 그러니 삶이 삶이 아니다. 삶이 삶이 아닌 이 삶을 삶이라 여기는 삶이 과연 참 삶일까? 그래도 나는 그 강박증에 시달리는 삶을 삶이라 여기고 있다. 항암주사를 맞아야 살아 있음을 느끼는 암환자처럼, 나는 병들어 살아있다. 병이 있어 생명이 있다. 이 병든 존재감.

그래 난 병든 생명이다. 난 억지를 부린다. 저 시신은 병든 존재감도 없는 것 아니냐. 관용이 주는 평강을 누리지 못한 현실에 대한 억지요, 투정이다. 참 삶에 대한 왜곡이다. 평강의 주께서 가까운 존재는 관용하는 사람이라는데. 난 관용의 평강을 누려 본 적이 없어, 강박증의 불용만 즐기는 죄 된 노예의식으로 충일하다. 맞고 살아야 존재감을 느끼는 타악기처럼. 나는 그렇게 둥둥 북채를 기다리고 있다. 여전히 내 안의
마조히즘[masochism]
이 날 구원하고 있다. 주께서는 먼. 아주 멀고 먼.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내게 주리라 -요한계시록 2:10.

그 ‘죽도록’ 이란, 네가 십 일 동안 환란을 받으리라는 말씀에 이어져 있다. 십 일- 우린 십 분 쉬어라는 말의 이중성을 잘 안다. 십 분이란, 충분히, 한껏, 쉬고 싶은 만큼 이라는 의미도 있다는 것을. 여기서 십 일이라는 기간도, ‘죽도록’이라는 한정어와 연결해서 해석해 보면, 그 십 일은 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한평생 내내 환란을 받는다는 말로도 해석할 수 있다. 무서운 말이다. 무기수의 형벌이다. 그러나 그 기간이 단 열흘이든, 일평생을 뜻하는 십 일이든 우린 그 환란 속에서도 죽도록 충성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수 있다. 이런 무지막지한 해석을 곁들이니 가슴이 막혀 온다. 그래서 그 친구는 가슴이 무너져 속히 가버렸던 것일까?
      
그와의 해후는 산자가 죽은 자를 듣는 일방적인 해후였다.
그의 아내는 그 강가에서 울부짖었다.

함께 건널 수 없는 해후 이후, 냉정하게 되돌아서며,
나에게 죽음의 사신처럼 엄습하는 관용과 충성 강요에 나약한 내 가슴이 저렸다.
그 감당할 수 없는 은혜 나는 죽어도 갚을 길 없을 것만 같다.

용납 못하는 이가 내 안에 천지고,
충성할 기력을 잃은 내 영력은 바닥을 치는데.

주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

그래도 입관 시 그의 얼굴이 해같이 빛났었다며 그 아내는 애써 웃음지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