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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 400회를 함께(syn)한 사람들에 대한 단상

2009.10.14 23:37

김성찬 조회 수:3291 추천:54



영혼일기 400: 400회를 함께(syn)한 사람들에 대한 단상
2009.10.14(수)


바울은 복음으로 세상을 뒤집는 자신의 빛나는 영적 전투에 늘 함께해 준 이들이 있었다고 전한다. 사도 바울은 접두사 syn('함께‘라는 뜻)으로 시작하는 복합어를 매우 좋아했다. 그 함께 한 사람들은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었다.

그가 제일로 많이 사용한 단어는 함께하는 일꾼이라는 의미의 동역자, synergos였다. 그가 목숨을 건 그 치열한 영적 전장(戰場)에는 외로움으로 옥쇄하지 않을 만큼의 전우들이 늘 함께 했다고 그는 술회했다.

한때 극렬한 복음의 핍박자가 그 임무수행을 위해 나섰던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의 예수를 만나 극적으로 예수의 추종자가 된 사건은 그를 일순 외톨이 되게 해버렸다. 그는 일순간 옛 친구들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때 아나니아와 다메섹의 제자들(행9:10,23-25,행22:12-16)이 그와 함께 해 줬다. 복음에는 함께하는 동역자가 늘 수반된다. 그 후 그는 고향 다소 주변에서 10여 년간 선교사로 일하던 중 구브로에서 온 레위 자손 바나바(행11:24-26)의 부름을 받는다. 그리고 그와 함께 이방인을 위한 선교사로 바나바와 함께 역사적인 전도여행을 떠나는 행운을 얻는다. 그리고 계속되는 전도여행을 통해 그는 예루살렘교회의 한 지체 실라(실루아노)(행15:40), 루스드라의 디모데(롬16:1-3), 사랑받는 의사요 문필가인 누가(몬24), 안디옥의 디도(고후8:23), 고린도의 브리스길라(브리스가)와 아굴라(롬16:3), 바나바의 사촌 마가(골4:10;몬24) 등이 그의 사명의 길의 동역자들이었다고 그는 전한다.

또, 갇힌 자되었던 바울은 그와 '함께 갇힌 자’(synaichmalotos)된(단어의 원 뜻은 함께 포로된 자) 동역자들이 그에게 있었다고 전한다. 데살로니가 출신의 마게도냐인 크리스천 아리스다고(골4:10), 그는 로마에 감금되었었거나, 아니면 전에 에베소나 가이샤라에 같이 감금된 적이 있었음을 뜻한다. 또한 ‘함께 갇힌 자’라고 불리우는 이는 골로새의 에바브라(몬23)이다. 이 에바브라는 리쿠스 계곡의 전도자였고, 그곳에 세워진 골로새교회, 히에라볼리 교회, 라오디게아교회(골4:13)의 목회자였다. 에바브라는 바울과 함께 옥에 갇혀 있느라 그 교회들을 찾아 다닐수 없게 된 때에도 언제나 그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던, 분명 바울의 마음을 닮은 사람이었다. 에베소감옥의 안드로니고와 유니아(롬16:7), 그리고 로마감옥의 골로새의 오네시모-그는 바울이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몬10절)라고 소개하고 있다.

바울은 아킵보(골4:17)를 가리켜 ‘함께 군사된 자’(synstratiotes)라고 부르고 있다. 또한 바울과 ‘함께 군사된 자’는 에바브로디도이다. 바울은 그를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군사된 자’(빌2:25)라고 부르고 있다. 그리고 바울은 ‘함께 군사 된 자’인 에바브로디도에 대해 골로새서 1장 7절에서는 ‘함께 종 된 자’(syndoulos)로 부르고 있다. 바울은 아시아 본토인 인 두기고를 가리켜 주 안에서 함께 종 된 자라 부르고 있다. 그는 골로새서의 전달자(골4:7)요, 에베소서의 전달자(엡6:21)지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와 멍에를 같이한(synathleo) 여인들에 대해 말한다. 협력자들이다. 빌4장 3-4절에 나오는 유오디아와 순두게다. 그녀들의 불화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지만, 그녀들은 바울과 함께 복음에 힘쓰던 여인들이었다. 그리고 4절에 나오는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 한 자 네게 구하노니’라는 익명의 멍에를 같이 한 동역자에 대해 어떤 주석가 들은 그녀가 바로 빌립보의 첫 회심자인 아시아 두아디라 출신 자주장사 루디아라고도 말한다. 그녀의 집은 빌립보 성 개척교회의 그 본부였다.

그리고 바울의 보호자가 있었으니 그녀는 겐그레아의 여집사 뵈뵈였다. “내가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으로 우리 자매 뵈뵈를 너희에게 천거하노니 / 너희가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줄지니 이는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니라(롬16:1-2).”

나는 지금 400회째 영혼일기를 쓰고 있다.

내 추레한 영혼의 내면을 커밍아웃한 일기를 난 400회째를 쓰는 은총을 주께 힘입었다. 400회를 맞이하면서 먼저 나는 사람들이 떠올랐다. 지금 내 심상에는 그동안 나와 함께 해 준 사람들의 면면이 오버랩 되고 있다. 하여 바울과 함께한 사람들의 면면을 살펴보게 됐다. 내가 바울 같이 훌륭한 영적 위인은 아니지만, 바울 사도가 그 고단한 사역 중에 자신과 함께 했던 이들의 이름 석 자를 불러대며 감사를 표한 아름다운 도리를 나도 실천해 보고자 함이다. 바울은 공개적으로 그의 서신에서 그들의 이름을 불러 줌으로 그들의 이름은 이후 불멸의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꽃이 의미된 것이다.

물론 그가 그의 서신서를 통해 불러 댄 사람들의 이름은 이상에 소개한 이들보다 더 많다. 그리고 그가 그 서신서에 불러내지 않은 함께 한 이들도 허다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 또한 그 생명책에는 생생히 기록되어 있을 것이다.

오늘은 눈에 띄지 않고, 접속마저 끊겼으나
김채균.
그는 나의 오네시보로다.

오네시보로는 바울이 매우 어려울 때 가장 큰 도움을 준 사람이다. 그의 이름은 성경에 두 번 밖에 나오지 않으나 모두 목회 서신(딤후1:16-18;4:19)에 있다. 그의 이름은 ‘유익한’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그는 에베소에서 바울에게 큰 도움을 주었으며(에베소는 그의 고향이었던 것 같다), 많은 해(害)를 보인 구리장색 알렉산더와는 대조적이다(딤후 4:14,15). 또한 바울은 자기가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을 때 “저가 나를 자유 유쾌케 하고 나의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 아니하며 로마에 있을 때에 나를 부지런히 찾아 만났느니라/ 또 저가 에베소에서 얼마큼 나를 섬긴 것을 네가 잘 아느니라(딤후1:16b-17. 18)."고 말하고 있다. 그 때 당시 바울의 처지는 이랬다. 그는 가택연금보다 더 심한 제약이 따르는 두 번째 로마 감옥에 갇혀 있었다.(행28:30). 그곳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편지를 보낸 것이다.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 이 일을 네가 아나니 그 중에 부겔로와 허모게네가 있느니라(딤후1:15).”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딤후4:16).”

그런 그였기에 바울은 거듭거듭 그를 위해 복을 빌고 있다.
“원컨대 주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옵소서 / 원컨대 주께서 저로 하여금 그 날에 주의 긍휼을 얻게 하여 주옵소서(딤후1:16a,18a)."

오늘 이 글의 주요 인용 글을 제공한 책은, F.F 브루스(윤종석역)의 ‘바울곁의 사람들(The Pauline Circle)'이다.

이 책에서 오네시보로에 대해 이렇게 계속 증언하고 있다.

“이런 시기에 사도 바울을 찾는 다는 것이 어려운 일이기도 했겠거니와, 그의 주변 인물 중 하나로 인식된다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이기도 했다. …… 그만큼 바울은 오네시보로가 보여 준 용기와 결단을 더욱 귀하게 여기고 있는 것이라라. 어떤 학자는 오네시보로를 ’요동하는 군중 속의 줏대 있는 한 얼굴‘이라고 표현하면서 그에 관한 생생하고도 박진감 있는 묘사를 이렇게 남겼다. ‘에게해의 먼 해안 지방에서 온 낯선 사람이…익숙치도 않은 실타래 같은 미로를 지나, 문마다 노크를 하고 실마리 같은 단서가 있을 때마다 일일이 좇아가 보며, 지금 자기가 하는 일이 얼마나 큰 모험인가에 대해 경고도 받았지만 끝까지 탐색을 멈추지 않고 마침내 어떤 어둠침침한 감옥 같은 집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한 귀에 익은 목소리가 인사를 건네온다. 거기 바울이 한 로마 병사에게 사슬 묶여 갇혀 있었던 것이다.’”

사람을 살리는 것은 사람이다. 사람이 사람을 죽게도 하지만, 사람이 사람을 살린다. 함께 한 이들이 비록 단 한 사람이었을지라도 내 곁에 있으매, 난 살아남았다. 그 옥창(獄窓)에 기대어 한결같은 맘으로, 말없이 날 떠받들어 주었던 김채균 형제. 그는 나를 위해 스스로 갇힌 자된 복음의 간수였다. 그의 실제로 한 때, 교도관이었다.

바울 곁의 사람들, 동역자(synergos), '함께 갇힌 자’(synaichmalotos)’ ‘함께 군사 된 자’(synstratiotes), ‘함께 종 된 자’(syndoulos), ‘멍에를 같이 한 자’(synathleo) , 보호자들로 분류되는 이들 같은 내 곁의 사람들이 내게도 있다. 김채균 형제만이 아니다. 바다건너 서로의 내 형편과 처지를 위무하는 오해춘형제, 친애하는 몇몇 형제 같은 선후배들. 그리고 멍에를 같이 하고 있는 여인네와 우리 교우들과 피붙이들. 내 영혼일기를 열심히 읽어주는 애독자, 비판적 지지자 그리고 검열관 등등. 그 모두는 여기 내 일기에 그 고귀한 이름 석 자를 적어 놓지 않아도 저 하늘 생명책에 기록될 이들, 그들이 있기에 난 오늘 여기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기원한다. 바울처럼 행여 그 누구에게도 허물을 돌리지 않길(딤후 4:16).

그리고 감사한다.

나에게 누가처럼 일기체 형식의 이 새로운 장르의 영혼일기를 기록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매일 만나는 사건에 대한 풋풋한 사실성을 내 주관적 정서를 실어 저 창공으로 날려 보낼 수 있는 시대적 은혜를 덧입게 된 사실에, 내 속사람은 반색한다.

그리고 나는 기원한다.

Laurence Housman의 이 찬사처럼, 나도 그런 류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충성심을 일깨우고, 이 적대적인 세상에 도전을 가하는(C.H.Dodd)," 영혼일기를 기록해 나갈 수 있길 소망한다.

마가는
인간의 생명 되신 이의 삶을
기록할 수 있는 은혜를 받은
최초의 성도였다.

주께서 서 곁에 서서 나를 강건케 하심은 나로 말미암아 전도의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이방인으로 듣게 하려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지웠느니라 /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 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딤후4: 17-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