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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일기 525: '낡음' - 그 매명(買名)•매명(賣名) 행위에 대한 소고(小考)
2010.03.17(수)

오늘 오후 ㈔맑고향기롭게는 서울 성북동 길상사에서 지난달 24일 작성한 법정스님의 유언장 전문을 공개했다. 그 유언장에는 담긴 그분의 저서와 관련된 '남기는 말'은 이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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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내 것이라고 하는 것이 남아있다면 모두 '사단법인 맑고향기롭게'에 주어 맑고 향기로운 사회를 구현하는 활동에 사용토록 하여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그동안 풀어놓은 말빚을 다음 생으로 가져가지 않으려 하니, 부디 내 이름으로 출판한 모든 출판물을 더 이상 출간하지 말아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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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도 너무 칼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정말 매섭고, 무섭다. 그러나 이 희귀한 유언이 정말 옳고, 매우 귀한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래 무소유의 극치다. 이 실천을 세계 정신문화유산에 등재해야 한다. 그 ‘말빚’까지 깨끗하게 청산하고 가는 이 독야청청(獨也靑靑). 그 청렴성(淸廉性)은 인종과 국경과 종교를 떠나 인류에 산 귀감이 되리라.

청렴성(淸廉性)은 전통적으로 우리네 청백리 정신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정신이었다. 청렴 정신이란 탐욕의 억제, 매명(賣名) 행위의 금지, 성품의 온화성 등을 내포하고 있다. 이같은 구체적인 청렴성의 덕목들을 제일 되는 가치로 삼는 청백리 정신은 선비사상과 함께 우리 백의민족의 예의국가관에 의한 전통적 민족정신이며, 이상적인 관료상이기도 했다.

그분이 풀어놓은 ‘말빚’이란 무엇일까? 우리네 전통적 청렴 사상에 비추어 보건데, 그 ‘말빚’이란, 아마도 ‘매명(賣名) 행위 금지’ 조항과 유관한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 그러니까 그분의 문재(文才)가 빚은 어쩔 수 없는 매문(賣文)∙ 매명(賣名)의 ‘말빚’이 더 이상 그분의 유작을 출판할 수 없도록 강제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 수도승의 결벽은 스스로 매문(賣文)∙ 매명(賣名)의 ‘말빚’이라고 여긴 출판물의 출간 금지 유언으로 그분을 이끌었음직하다.

이런 결벽증적인 죄의식은 법정(法丁) 만이 몫이 아니었다. 문재(文才)를 지닌, 그 재주로 먹고 산 인간들은 그런 매문(賣文)∙ 매명(賣名) 행위에 대한 죄의식에 괴로워했다. 이를테면, 현대시의 아버지라 일컬음을 받는 시인 김수영은 그의 수필 「茉莉書舍」에 이런 글귀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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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는 아직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그리고 앞으로도 좀처럼 해결하지 못할 것 같은 세 가지 문제가 있다. 죽음과 가난과 매명(賣名)이다.

죽음의 구원. 아직도 나는 시를 통한 구원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죽음에 대한 구원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40여 년을 문자 그대로 헛산 셈이다.

가난의 구원. 길가에서 매일같이 만나는 신문 파는 불쌍한 아이들을 볼 때마다 느끼는 자책감에서 헤어날 길이 없다. 역사를 긴 눈으로 보라고 하지만, 그들의 천진난만한 모습을 볼 때마다 왜 저 애들은 내 자식만큼도 행복하지 못한가 하는 막다른 수치감에서 헤어날 길이 없다. 나는 40년 동안 문자 그대로 피해 살기만 한 셈이다.

매명의 구원. 지난 1년 동안에만 하더라도 나의 산문행위는 모두가 원고료를 벌기 위한 매문∙매명 행위였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 하고 있는 것도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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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법정의 ‘말빚’과 김수영의 ‘산문행위’로서의 매문∙매명 행위는 색깔이 같을 수 없다. 그리고 수도승적 화두를 풀어 내던지는 행위나 스스로 좋아서 쓰는 글은 매문이나 매명을 위한 수단일 수는 없다. 그랬어도 결과적으로 그 작문행위가 매문∙매명 행위였다고 그들은 한 결 같이 고백하고 있다.

그분들에 비하면 조족지혈(鳥足之血)에 불과하지만, 나 또한 적잖이 매문∙매명 행위에 연루된 사람이다. 인터넷 세상은 나에게도 매명(賣名)의 기회를 무제한적으로 제공하고 있다. 난 그 유혹에 빠져 내 홈피 조회 수 부풀리기를 별 죄의식 없이 거의 날마다 해왔다. 한번 누를 걸, 두 번 이상 눌러대는 매명(賣名) 행위를 난 일상화 해 왔다. 조회 수가 이름을 날리는 바로미터라 여긴 것이다. 내 홈피에 들어와 용기 있게 격려의 글을 실어 주는 친구들의 글뿐만이 아니라, 내 ‘영혼일기’마저도 그랬다.

법정 스님은 살아생전, 어느 인터뷰에서 이젠 뻔뻔한 수필이나 칼럼이 아닌 일기문을 쓰고 싶다고 했다. 난 그 말의 깊은 의미를 이내 포착했다. 그랬다. 설교나 칼럼이 말하는 교훈조의 글이 아니라, 자기고백적인 일기문을 공개적으로 쓰는 일은, 글 쓰는 이들이 희원하는 글쓰기의 최종 목적지다, 라고 그분은 말하는 듯했다. 그래서 그분은 그 허허로운, 잡소리 같은 매명(賣名)행위의 산물인 그의 저서들의 간행을 주검으로 막아선 것 아닌가 싶다.

요즘 들어 내 홈피 중 ‘영혼일기’가 외부에 자의반 타의반 노출되어 시사성이 있는 일기문의 경우, 기백 단위의 조회 수를 나타내 보이고 있다. 그 시사성 있는 글이란, 작금 우리 성결신앙공동체 개혁의 화두다. 강남철 목사로 촉발된 개혁드라이브가 탈(脫) 주홍글씨 김명기 목사의 전투력이 가세해 점입가경이다. 그들은 적어도 매문(賣文) 행위야 하지 않겠지만, 부디 매명(賣名) 행위로 변질되지 않길 바란다.

그 낡음. 케케묵음. 진부(陳腐)함에 대해.

그런데 오늘 법정 스님의 ‘말빚’ 청산 유언이 공개된 오늘 새 아침에 ‘성결네트워크’에 올라 온 음성파일은 우리 성결신앙공동체의 매명(買名)•매명(賣名) 행위가 그 도를 넘고 있음을 선명하게 들려줬다. 각색해 보자면, 이런 요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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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만 빌립시다. 매명(賣名)을 강요하다가, 강력하게 거절하지 않고, 그냥 안 해, 하면 허락하는 걸로 알겠습니다, 라는 식으로 허위로 매명(買名)하고, 그렇게 얼굴과 이름이 팔린 매명(賣名) 행위에 대해 그 어떤 이들은 내심 득의만면(得意滿面)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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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아니다. 그 수법이 너무 낡았다. 온당치 못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저들은 구태의연하고, 시대착오적인 수법을 무차별적으로 구사했다.「한국성결신문」 전면 광고로 깨알같이 가득 채운 이름 석 자들은, 결과적으로 그 부도덕한 매명(買名;아니 엄밀히 말해 태반은 도명(盜名)이란다)에 의해 매명(賣名)된 이름자들이다. 교단의 차세대 선두주자라고 자임하는 이들이 행한 백주의 테러다. 그러나 다시 말해 그 수법이 너무 낡았다. 걸레처럼 낡았다.

글쓰기에 관한 주제이기도 해서 다시 시인 김수영으로 돌아가 본다. 그는 시인 박인환(朴寅煥)이 경영하는 서점 茉莉書舍에서 한때 박인환과 더불어 시집을 내기도 했고, 그 자신이 박인환의 소개로 문단에 발을 넓힐 수 있었다. 그런 빚진 관계였던 김수영이 시인 박인환(朴寅煥)에 대해 이렇게 퍼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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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寅煥을 가장 경멸한 사람의 한 사람이었다. 그처럼 재주가 없고 그처럼 시인으로서의 소양이 없고 그처럼 경박하고 그처럼 값싼 유행의 숭배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너의 「목마와 숙녀」를 너의 가장 근사한 작품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내 눈에는 ‘목마’도 ‘숙녀’도 낡은 말이다. 네가 이것을 쓰기 20년 전에 벌써 무수히 써먹은 낡은 말이다. (-김수영의 「박인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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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랬을까? 그랬다. 김수영의 눈에 비친, 박인환의 시는 일단 ‘낡았다’는 것이다. 모더니즘은 기본적으로 이전의 것에 대한 전도(顚倒)를 전제로 한 것이고, 표현의 새로움을 통해 자본주의적 근대 현실을 더욱 확연하게 보여주고자 하는 예술적 태도다. 이런 관점에서 표현의 새로움을 보여 주지 못한 박인환의 시는 김수영에게는 전혀 근사하지 않은 것이라는 말이다.

우리 성결신앙공동체는 역사적 퇴행을 거듭하고 있다. 체육관 대통령을 매명(買名)으로 매명(賣名)한 자들을 긁어모아 뽑았다. 그 기억하기도 싫은 구악(舊惡)을 저들은 다시 도모했다. 그들은 그 추악한 역사로부터도 배우지 못했다. 그래서 배움이 없다. 하여, 그 표현의 새로움이 없다. 표현의 새로움이 없다는 말은, 그 내면의 새로움이 없다는 말이다.

그래 그 ‘낡음’이 어찌 저들만의 일이겠는가? 도명(盜名)을 당하고도 일언반구도 없는 이들에게서 그 무슨 구악(舊惡)의 전복(顚覆)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하비 콕스(Harvey Cox)는 『세속도시(The Secular City)』에서 출애굽 사건에 ‘왕의 신격화'를 거부하는 동시에 하나님 외에는 그 누구도 인간을 지배할 수 없다는 원초적인 '인권 선언'이 담겨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어떤 이와 그 추종 세력들의 무소불위한 횡포에 침묵의 카르텔을 구사함으로 저들의 신성성(?)을 용인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46년 동안 짓고 있던 헤롯의 성전을 허물라 명하셨다. 그리고 사흘 만에 내가 성전을 일으키리라 선포하셨다.(요2:19-20) 저들 귀에는 낯선 말이었다.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막1:22).” 예수의 일거수일투족은 매사 ‘새롬’ 그 자체셨다. 사순절은 경이로운 새롬, 그 대사건 부활을 대비하는 기간이다. 바리새인의 누룩, 사두개인의 누룩, 헤롯의 누룩을 우리 안에서 제거해야 한다. 그 구태를 벗어 내 던지는 새 역사를 우리는 함께 펼쳐나가야 한다.

그 날이 오기까지 우리의 신앙 목표는, 日新日日新又日新(일신 일일신 우일신) 날로 새로워지려거든 하루하루를 새롭게 하고 또 매일 매일을 새롭게 함, 에 있다.

내 영혼아!
허명(虛名)을 버리고, 매명(賣名)의 유혹을 떨쳐 버리고, 받는 자 외에는 알 사람이 없는 흰 돌 위에 새긴 새 이름(계2:17)을 사모하자. 그 종말에 서서 두렵고, 떨림으로 현재적 구원을 이루어가는(빌2:12) 영혼으로 거듭나자. 그분이 흠향하시는 기도의 향연(계8:3-4)이 되자. 그리고 날마다 정직한 영의 새 노래로 여호와를 즐거워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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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찬송은 정직한 자의 마땅히 할 바로다 수금으로 여호와께 감사하고 열 줄 비파로 찬송 할지어다 새 노래로 그를 노래하며 즐거운 비파로 찬송 할지어다 (시편3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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