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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3: 마비

2013.05.13 15:05

김성찬 조회 수:429 추천:22



영혼일기 1293: 마비 

2013.05.13(월) 

 

처지 곤란한 건 물건만이 아니다.

시간도 그렇다.

목신원 교무회의를 다 마친 후, 수업 시간까지 무려 4 시간의 공백이 있었다.

그런데 그 어디에 몸을 맡길 공간이 없었다. 

 

어렸을 때, 나는 만화 가게에 들어가 본 적이 없다. 그런 곳은 불량 소년들의 소굴이라고 세뇌 되었었기 때문이다. 그런 염려를 안고, 어쩔 수 없이 시간 죽이려 찾아 들어 간 곳이 학교에서 다소 떨어진 곳에 위치한 PC방이었다. 다소 꺼림찍한 맘으로 들어섰는데, 와우 내 안전에 펼쳐진 그곳은 신천지 문화공간이었다. 그곳은 나의 전근대적 인식을 배반한 밝고, 깔끔하고, 쾌적한 초고속 문명의 장場이었다. 사람들이 왜 PC방에서 죽치고 앉아 세월을 보내는지를 나는 금새 이해할 수 있었다. 시간 당 1,000원, 시원한 아이스 녹차가 단돈 500원 그리고 간식 거리들이 실비로 제공되고 있었다. 웬만한 커피숍에서 5 천원 가량 되는 커피를 홀짝거리며 마시는 것보다는, 혼자 몸일 경우 PC방에서 문명의 이기를 대하며 시간을 보내는 편이 훨씬 더 실리적이고, 창조적이겠다 싶었다. 

 

몸이 피곤했던, 나는 먼저 가슴 뻥 뚤리는 대형 모니터를 켠 후, 아이스녹차를 한 잔을 들이키다가 편안한 의자에 묻혀 오수午睡를 즐겼다. 자연스레 깨어 그동안 미뤄뒀던 내 관심사를 촉발시킨 강의를 써핑했다. 유익한 내용들을 다양하게 접할 수 있었다. 

 

강신주는 제임스 조이스의 『죽은 자들의 사회』를 논하면서 '마비'에 대해 설파하고 있었다.

더블린이 나를 마비시킨다. 

는 화두를 오늘 우리 사회, 제諸 군상들에게 내던지고 있엇다.

    

윤간을 당하던 여인이 처음엔 완강하게 저항하다가, 

다투어 덤벼드는 놈들에게 그냥 몸을 내주며 눈물만 흘리는 형국을 

그는 마비로 셈했다.

 

저항하다가 편해져 버리는 것. 불쾌한 느낌에 적응해 버리는 것. 

마비는 그렇게 오는 것.

 

내 

손발이 저렸던,

가슴이 아렸던,

그날이 

과연 언제였던가? 그랬던 날이 존재하기라도 했던가?

 

밤에

정목 스님의 힐링을 시청했다.

 

그녀는 마비를 단호히 거부한 용사였다.

해서 그녀는 어린 열 여섯 나이에 출가를 했고,

젊은 시절 승려복을 반납하고 주유천하 인간의 인간 됨을 찾아 나섬으로,

그녀는 일상이 누구나에게 안기는  

마비

에서 벗어 났음을 나에게 보여줬다.

 

그리고

실천적 수행을 앞세운 용맹정진을 오늘도 늦추지 않고 있음을 보여줬다.

그녀의 사전에는 마비, 란 없음을 보여줬다.   

 

파괴가 아니라 창조를 위해

마비

에서의 탈출.

 

그녀는 히말라야 이빨 빠진 꾀죄죄한 셀퍼가 전해 준 한 송이 꽃 미소에서

격려만큼 귀한 행함이 없음을 깨닫고 돌아 와,  

몸을 내던져 섬기는 자리로 나아갔다던가?

 

손발을 주물러 본다. 

움직인 일이 없으니, 마비 될 수밖에. 

 

요즘 읽은 책 『막스 베버 소명으로서의 정치』(최창집엮음/박상훈옮김 폴리테이아)에서,

 

「베버는 먼저 한 사람의 정치인이 갖추어야 할 세 가지 요소를 지적한다. 

열정Leidenschaft/Passion, 책임감Sense of resposibility, 균형적 판단Judgement이 그것이다. 

 

열정은 소명의식을 갖는 정치인이 정치 행위를 하는 데 필요한 에너지라 할 수있다. 그러므로 열정을 갖는 정치는 단순한 정치적 아마추어의, 내용 없는 흥분과 구분된다. 동시에 부통의 정치인들이 권력을 추구하거나 가졌을 때 흔히 갖는 허영심과도 거리가 멀다. (중략)

 

열정을 뜻하는 독일어의 Passion 내지 Leidenschaft와 영어의 Passion은 동일한 의미를 갖는다. 두 말은 모두 예수가 받은 '수난'이라는 말과 연결되어 있다. 메리엄-웹스터 영어 사전을 참조하면, Passion의 첫번 째 정의는 "최후의 만찬과 그의 죽음 사이에서 예수가 받은 고통"이고, 두 번째 정의가 "강력한 느낌", "이성과 구분되는 감정"이다. 예수의 고통을 자기의 고통으로 내면적으로 공감하는 것에 가까이 가고자 하는 강력한 믿음, 감정의 치열함은, 곧 고통이자 강력한 감정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이 기본적으로 강렬한 내적 신념이 탐욕과 욕구를 억제하는 열정에 의해 금욕적 정신을 갖도록 하는 칼뱅주의의 정신이고, 베버의 사회적 인간 행위에 대한 설명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그런데 칼뱅주의의 맥락에서 열정은, 개인적으로나 감정적으로 터져 나오는 종교적 충동과 연결되는 감정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엄격한 규율의 교리이고, 복음에 복종하고 신을 위해 희생하는 것을 가르친다. 신앙인의 종교적 에너지는 구체적이고 가시적인 교회의 형태를 통해 공적으로 규율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맥락에서의 열정은 차라리 반감정작 열정, 이성에 의해 규율되는 차가운 열정을 의미한다. 한 사람의 정치인이 정치 행위에 대해 열정을 가진다고 말할 때, 그것은 어떤 정치적인 신념이나 목적을 추구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그것을 실천하고 실현하는 행위와 그 결과를 포괄하는 것이다.」

 

나는, 

십자가의열정은고통에서기인한 것이라는데.

지렁이도꿈틀거린다는 데,

무통분만을즐기듯, 

손하나까딱이지않는세월을살아오고있다.

마비다마비속절없어뵈는마비다.

허나실상내마비는호강에겨운철부지의투정에기생하고있다.

 

니가 아프지 않고 나만 아픈 이 통증은 

엄밀히 말해 마비다. 

 

니가 아프서 내가 몸부림치지 않을 수 없는 고통을 발한 

십자가의 예수는

날마다 숨쉬는 순간마다 인류를 앓았다. 

 

이 밤,  

나 는,

온 인류인, 만인 인

너 를, 

앓 고 싶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