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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1: 흔적

2013.06.22 12:04

김성찬 조회 수:485 추천:29



영혼일기 1331: 흔적
2013.06.22(토)

죽은 자는 잔인하다. 

흔적을 남김으로 잔인하다.
그러나 죽은 자가 살았던 흔적을 다 지우고 갈 수가 없다.
하여, 모든 죽은 자는 본의 아니게 잔인하다.
 

매우 정갈했던 아지는

죽기 이틀 전까지도 움직여지지 않은 몸을

오체투지로 죽을 힘을 다해 끌고나가

화장실에서 용변을 보던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 눈물겹게 몸부림 쳐 댄 아지도 

 

제 힘으로 다 지우지 못하고 간 흔적들로 가득하다. 


방문 닫지 말라고,
방문 열어 달라고,
앞발로 긁어댄 방문마다 긁혀 흰 칠이 벗겨진          

아지의 흔적이 우리 눈에 선연하다.

 

흔적은 우리를 우울하게 한다.
흔적을 남긴다는 것은 잔인한 일이다.


그러나 그 누구도
아지를 추억하는 한,
그 나목(裸木) 된 아지의 흔적을 지우려 들지 않을 것이다.       

기억 속의 아지를 지우려들지 않을 것처럼.

그 흔적이 우리들의 상심을 덧나게 할지라도.

누군가 방문을 꽈ㅡ악 닫았다.
순간, 

'문 열어 놔, 아지 돌아 다니게.'
그런 말이 튀어 나오다 멈췄다.
'그래, 우리네 소통의 사신, 아지가 갔지·······.'
일순, 그 상실감에 가슴이 저몄다.

기억되지 않은 존재는 불행하다.
그러나 그 기억을 기억해 낼 수밖에 없는 존재들은 힘겹다.
죽은 자의 자취에 산자의 고통이 자리한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먼저 간 자들의
무욕(無慾), 무사(無邪)조차도 결국엔 산 자의 몫이다.
산 자들을 몸부림치게 하는 각성제다.

역사는 산 자가 아니라, 죽은 자가 있어 역사를 이루어냈던가 보다.
죽은 자를 기억해 내어,
죽은 자를 따라 살다가,
죽은 자를 죽음으로 따른 죽음의 행렬이 역사인가 보다.

문득

마가의 다락방에서 부활 승천하신 예수께서 명하신 말씀 따라
부활의 힘찬 증언을 위한 성령충만을 얻기를 간구하던 

어머니 마리아와 그의 동생 들을 

나는 기억해 낸다.

아들을 잃은 상실감에 몸서리쳤을 어머니 마리아와
적어도 형이 살아 있었던 때에는 형 예수를 믿지 않았던 동생들이
함께 모여
부활한 아들 예수,
죽어 다시 살아 난 맏형 예수의 분부따라
그 부활의 증인됨을 자처하고 나선 광경을 말이다.(행1:14)
 

그 상실감은 부활로 완벽하게 치유되었던가 보다.
치유는 부활에 있다.

 

천하보다 귀한, 모든 것의 모든 것 된 생명을 잃은 상실감조차
부활로 회복이 가능했다.
죽음은 다시 사는 생명으로만 그 상실감의 치유가 가능하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죽어 다시 살 수 없는 존재, 라고 우리가 알고 있는 

우리 아지의 죽음을 창조적으로 승화시킬 

우리 안의 부활이 필요하다. 

 

현찰 같은 예수가 허망하게 십자가에 못박히자 

부활이란 있을 수 없다고 낙담하며, 예수의 부활의 언약을 외면하고 산 

부활 소망을 잃어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하던 베드로에게

주님의 말씀은 한 톨 어김없이 이루는 신실한 언약임을 확증시켜 준

복음의 수탉. 

 

죽어 다시 살 수 없는 존재인

아지의 돌이킬 수 없는 그 안타까운 죽음을 통해,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는 수탉처럼 

불신앙에 빠진 제자에게 신 의(神意)를 알렸던 복음의 수탉처럼, 

부활신앙의 소중함을 재 인식시켜 준 아지는

오늘 우리네 복음의 수탉이었다.

 

등대처럼 부활의 포구로 우리의 눈길을 돌려 놓은

복음의 수탉

아지는  

부활 없는 제 사명을 다하고 갔다.  

그 사명을 이룬 삶이 아름다웠다.

자신의 주검으로 

인간인 내가 몸의 부활을 창조주께 선사 받은 

존귀한 클래스임을 일깨워 준, 

우리를 눈물나게 한 미물 아지의 사명을 이룬 생이 숭고했다. 

 

이 생의 몸이 모든 것인, 내세의 심판이나 상급도 없는 녀석이 

그럼에도 불구히고

남김 없는 순종과 헌신을 다 한 사실 또한 우리에게 큰 교훈이 되었다. 


다시 볼 수 없는 녀석을 고이 묻느라 힘을 썼더니, 내 힘에 지난 힘을 썼더니 입맛을 잃었다.

소망 없는 땅 파기가 얼마나 힘들었던지 온 몸 맥이 확 풀려 그냥 픽, 픽 쓰러지곤 한다. 

시도 때도없이. 날짜 변경선 넘어 온 여행객처럼 ㅡ 낯선 시간, 낯선 환경 속으로 진입해 드는 월사금 치뤄야 하듯. 
 

그래, 온 몸이 근무력증에 시달리고 있다. 

거기다 더해 아지를 보내고 싶지 않았던 안타까움과 아픔이 근육의 기억 속에도 스며들었던지,

몸을 움직일 때마다 상심한 달이 내 심상에 하현달로 떠오른다.

먹을 거 달라고, 내 종아리를 앞 발로 긁어 놨었는데,

아직도 그 흔적이 가시지 않 았다.          

 

그 육신에 새겨진 흔적은 이내 가시겠지만, 

사는 날 동안 지울 수 없을  

흔적으로

아지는 우리 마음에 자리할 것이다.

 

내내